<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포스터

<나는 신이다: 신이 배신한 사람들> 포스터 ⓒ NETFLIX

 
눈과 귀를 의심했다. 이게 다큐라고? 믿기 어려운 수준의 피해자들의 알몸 장면과 증언들이 사이비 교주의 추악함을 까발리기 위해 적나라하게 활용되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나는 신이다> 얘기다.
 
이 글은 <나는 신이다>의 1화만을 보고 썼음을 밝힌다. 쓰기 위해 인내를 갖고 겨우 1화만 볼 수 있었다. 피해의 재현이 너무 폭력적이어서 더 이상은 볼 수 없었다.
 
JMS라는 사이비교 단체를 설명하기 위해 1980년대가 등장한다.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은 암울했고 이를 상쇄라도 하듯 매우 자유롭고 명랑한 선교 단체가 대학생들에게 어필됐다고 다큐는 설명한다. 1980년대면 나도 학교 다니던 시절이다. 문득 은밀히 다가와 선교하던 같은 과 여자 동기가 기억났지만, 그가 JMS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영화는 당시 대학의 심벌이었던 응원단을 연상시키는 치어리더들의 율동들을 반복해서 보여주며 교주가 이렇게 늘씬하고 예쁜 여자애들을 좋아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마치 이 중 하나였을 법한 여자들을 불러내 증언시키고 있었다.
 
한 증인은 "아이를 낳은 후 증언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그 의미는 알 수 있을 듯하다. 그는 내 딸이 될 수 있을 여자들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성폭력의 재발을 막기 위해 힘든 결심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성을 포함해 다큐에 등장하는 성폭력 피해자들의 증언은 이들의 값진 결기를 감안하더라고 듣기가 힘들었다. 이토록 자세한 성폭력 과정의 묘사나 설명은 성폭력 이후 벌어지는 경찰 조사나 법정 증언에서도 2차 가해의 위험이 있기에 매우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한다. 그럼에도 다큐 속 피해의 재현은 불필요하게 상세했다.
 
성폭력 피해 증언의 효용은 피해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따라서 피해를 청취하게 되는 사람들은 종종 드러난 사건 피해 하나를 정지 화면으로 각인하기 쉽다. 하지만 피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일어난 어느 한 순간에 정지되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이후 피해자의 삶에 끊임없이 개입한다. 과거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이런 이유로 그때 어떤 피해가 있었는가에만 국한된다면, 이는 피해를 다 말한 것도 이해한 것도 아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가뿐 아니라, 그 일로 어떤 고통을 겪었고 그 고통을 경유해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까지가 충분히 조명되어야 비로소, 가해와 피해를 공동체 속에서 성찰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다큐 속 성폭력 피해의 '재현'들은 그때 상황의 묘사에만 집중하면서 성폭력을 마치 도착적 성관계처럼 상상하게 만드는 위험에 빠뜨렸다. 성폭력의 피해를 재현하는 일에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지나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성폭력 재현이 성애화되는 함정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은 망설임 속에 증언대에 섰을까를 생각할 때, 이들의 증언을 성애화되게 한 연출에 실망과 분노를 금할 수 없다. 이들의 자세한 증언(교주가 어디를 어떻게 만졌는지, 몇 명의 여자들과 동침하며 어떤 방식으로 몇 차례에 걸쳐 음란한 성교를 벌였는지 등 열거하기도 힘들다)과 교주의 음침한 글루밍과 신음 소리, 피해자임이 분명한 젊은 여자들의 알몸이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송출된 동영상을 반복해 듣고 보면서, 추악한 사이비 교주를 응징할 것과 사이비 교단에 철퇴를 내려야 함에 이성적으로 공분하기란 쉬운 일일까?
 
바람직한 비판과 성역

이 다큐의 또 하나의 문제는 성폭력 문제가 정신 나간 개인의 일탈처럼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또한 성폭력 피해 증언에 나타나는 성폭력 조력자들이 여자 신도들로 나타나면서 성폭력 가해가 마치 여성들 간의 계략으로 일어난 것처럼 오인하게 만든다. 일부 광신도인 여자들이 주도해 주교에 대한 과도한 신앙 증거로 젊은 여자들을 바쳤고, 활용된 피해자들이 그때는 어려서 뭘 몰라 당했다고 인식하게 한다. 어떻게 한 조직이 수도 없이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오랜 기간 성폭행 당한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JMS는 상당히 큰 종교단체로 점조직으로 교인을 모으고 활동하며 젊고 예쁜 여자들을 스스로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교주에게 조직적으로 헌납했다. 하지만 다큐는 많은 여자들이 추악한 교주의 성폭력에 희생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조직의 방관은 다루지 않는다. 위대한 남자의 성적 욕구에 보잘것없는 여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 따위는 무시되어도 상관없다고 간주한 집단적 믿음이 없었다면, 교주의 장기적 성폭력과 조직적 은폐는 가능하지 않다. 종교단체건 정치단체건, 조직 내 성폭력의 핵심은 구성원들(특히 남성들의)의 공조와 침묵과 승인에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불행이 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 이를 재현할 때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다. 하지만 <나는 신이다>는 교주의 음란한 목소리를 잊을 수 없도록 역겹게 배치하고, 성폭력를 마치 미친 성적 욕망을 가진 남자의 도착적 경험을 알리듯 재현함으로써, "왜 사이비 종교 단체와 교주가 존재하고 피해를 일으키는지 질문하고 싶었다"는 제작 의도를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 아무리 공익적 목적이 크다 해도 잘못된 재현으로 입는 피해는 다시 그 피해자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갈 것이다. 이후 피해자들 영상이 SNS를 떠돌며 반복 재생되거나 성착취물로 가공되어 유통되지는 않을지 심히 우려 된다.
 
<오마이뉴스> 김성호 시민기자의 '나는 신이다 PD의 전화... 쉬운 비판이 민망하다'에서 "모두가 외면하는 가운데 아주 오랜 싸움을 벌여온 이들이 동의한 연출 방식에 대하여, 이제 와 그를 보고 선정적이라고 비판하는 것은 얼마나 쉽고 무책임한 일인가"라는 인식 또한 사실을 증명하려는 강박이 무엇을 보지 못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 재현의 전부는 아니다. 사실의 재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사안의 심각성과 피해의 맥락을 통찰하게 하는 도구인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사실을 드러내려는 강박 외 무엇을 성취했는가.
 
또한 '쉬운' 비판이라는 언급에 있어, 비판에 쉬운 비판과 어려운 비판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비판을 당한 이가 이를 수용하고 더 나은 장으로 나아갈 수 있을 때, 바람직한 비판과 그렇지 않은 비판으로 남을 뿐이다. 또한 오랫동안 힘들게 만든 콘텐츠라도 비판의 성역이 되지 않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나는 신이다> 성폭력 재현 재현의 윤리 사이비 종교 집단 성폭력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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