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이란영화를 표상하는 거장의 신작
 
2011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로 황금곰상을 비롯해 주요부문 상을 휩쓸다시피 수상하고 내친김에 미국 아카데미 국제영화상까지 석권하는 성취를 달성한다. 그이후로 아쉬가르 파라디의 이름은 (여전히 '이란 영화'하면 첫손으로 꼽히는) 세상을 떠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정부와의 갈등으로 온 가족이 망명을 선택한 모흐셴 마흐말바프, 역시 정부와 불편한 관계로 창작활동 금지 및 가택연금 상태인 자파르 파나히를 대신해 이란영화의 상징이자 얼굴로 등극하기에 이른다. 키아로스타미와 마흐말바프, 현대 이란영화의 양대 거장들이 유고와 망명으로 이란 내 작업을 중단한 상황에서 현재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만큼 이란 내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널리 알려진 존재는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2013년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아무도 머물지 않았다>, 2016년 칸영화제 각본상에 이어 두 번째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달성한 <세일즈맨>, 2018년 칸영화제 개막작이 된 <누구나 아는 비밀> 등의 후속 작품으로 감독은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왔다. 하지만 지난 몇 해 동안 다소 정체된 것 아닌가 하는 평가가 만만찮던 중 새롭게 선보인 신작은 그에게 지금의 명예를 안겨준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를 강하게 연상시키며 감독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현대 이란영화의 선배들이 상대적으로 낙후된 농촌지역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존재들을 주요 소재로 삼았던 반면, 파라디의 영화는 대도시를 무대로 중산층 시민들이 선악으로 딱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 설정 속에서 놓이는 윤리적인 딜레마를 정교하게 조성해왔다. 이번 작품 역시 감독의 원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상대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인 채 사회에서 격리된 상태인 주인공을 등장시킨 후, 우연히 다가온 기회 앞에서 평범한 인간 누구나 유혹을 느낄만한 사건을 터뜨린다. 도덕적 위기 앞에서 갈등하는 주인공의 갈팡질팡 행보가 현대 이란사회의 분위기를 충실히 재연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주인공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흥미와 함께 연민을 품은 채 지켜보게 만든다.
 
황금의 유혹 이겨낸 서민 영웅의 탄생과정
 
"어떤 영웅"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어떤 영웅"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라힘은 장인 바람에게 진 빚을 갚지 못해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다. 그런 그는 이틀간의 귀향휴가를 받는다. 아들 '시아바시'를 의탁한 누나의 집으로 향한 그는 오랜만에 가족들과 재회하지만 아들은 누나 가족과 썩 잘 어울리지도, 아빠와 가까워보이지도 않는다. 알고 보니 시아바시는 긴장하면 말을 심하게 더듬는 언어장애가 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힘들어하는 아들은 태블릿으로 게임하는데 골몰하느라 라힘을 불편하게 만든다. 시아바시가 겪는 문제는 아빠 라힘이 처가에서 절연을 당하다시피 불편한 관계인 데다 수감 중인 상황과 곧바로 연결되는 느낌이다.
 
라힘에게는 출옥 후 결혼을 약속한 여자 친구가 있다. 둘은 차 안에서 긴요한 이야기를 나눈다. 실은 여자 친구 '파르크혼데'는 일주일 전에 금화가 가득한 여성 지갑을 길에서 습득했다. 둘은 이 금을 팔아서 장인에게 빚을 변제해 감옥에서 나올 궁리를 논의한다. 둘은 함께 금 환전소에 들러 습득물의 가치를 확인한다. 채무액의 절반 정도는 되는 규모다. 이 정도면 장인도 솔깃할 만하다. 그런 기대감에 라힘은 매형과 함께 장인을 찾아가 교섭해 보지만 전처나 장인이나 그의 제안에 냉랭하기만 하다. 절반을 갚고 출소하면 일을 해서 빚을 갚겠다는 라힘의 제안을 그들은 신용하지 않는 표정이 역력하다.
 
기운이 빠진 라힘은 여자 친구와 대화하던 중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은행에 가서 분실물 찾는 이가 없는 지 알아보고 열심히 전단지를 거리에 붙여가며 주인을 찾는다. 하지만 다음날 교도소 복귀를 해야 할 처지에다 휴대전화 사용도 그 안에선 당연히 안 되는지라 교도소 번호를 연락처로 기재해둔다. 며칠 후 지갑 주인을 자처하는 여인에게서 연락이 온다. 지갑을 맡아뒀던 누나는 주인이 맞는다고 생각해 지갑을 돌려준다.
 
그렇게 훈훈하게 마침표를 찍는 것 같았는데, 교도소 관리들과의 대화 과정에서 라힘의 미담이 외부에 알려지자 방송과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다. 교도소에선 자신들의 이미지를 향상시킬 기회로 보고 적극적으로 취재에 협조한다. 빚을 갚지 못해 수감된 상황에서도 유혹을 이겨내고 선행을 행한 평범한 '영웅'으로 사회적 화제가 되면서 라힘을 돕기 위해 자선재단도 나선다. 추가로 귀휴를 얻어 다시 가족에게로 향한 그는 이제 채무 변제를 통해 자유의 몸이 되고 새로운 출발을 맞이할 꿈에 부푼다.
 
영웅의 탄생과 몰락은 롤러코스터처럼
 
하지만 이제는 이혼한 상태인 전처 '나자닌'과 장인 바람은 라힘에 대해 여전히 불신을 거두지 않는다. 라힘의 사업실패로 인해 빚보증을 세웠던 처갓집은 거액의 빚을 대신 갚아야 했고 그로 인한 원한은 쉽게 사라질 리 없다. 처가에 진 라힘의 빚은 15만 '토만'(이란 화폐단위)에 달한다(우리 돈으로 3천만원대 중반의 상당한 거액이다). 라힘의 보석금을 마련하기 위해 지원재단에서 자선모금으로 모은 액수는 3만여 토만에 불과하다. 애초에 (금을 팔아 지불하려던) 반절을 일시불로 낸다고 해도 나머지 반을 라힘이 출소 후 과연 갚을 수 있을지 의심하던 장인이다. 하지만 자선재단 관계자들의 거듭된 종용과 안정된 일자리 제공 협조에 못이긴 척 장인은 자신의 입장을 누그러뜨린다. 이제 일자리만 구하게 되면 어렵사리 새 인생이 눈앞에 펼쳐지는 상황이다.
 
그러나 처가 식구들에 이어 또 다른 암초가 등장한다. 재단이 주선한 일자리는 국회업무와 관련되어 공신력 있는 데다 자신의 장기도 살릴 수 있다. 채무변제는 물론 새 출발하기엔 더 바랄 게 없는 꿈의 일자리인 셈이다. 하지만 부푼 꿈을 안고 찾아간 국회 인사책임자의 반응은 기대와는 180도 달랐다. 인사부장 '나딜리'는 라힘의 선행이 지인들의 증언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증명할 수 있는 게 없다며 노골적으로 라힘을 의심한다. 그는 선행을 증명하려면 금을 돌려준 당사자를 찾아오라고 종용한다. 금을 찾으러 왔던 여인을 태웠던 운전기사와 연락이 닿아 여인이 내린 동네 주변을 수소문해보지만 행방은 찾을 길 없다.
 
처음엔 소박했던 취지와 회심의 결과이다 보니 라힘은 세간에서 의심하는 사기극의 주범이라는 인식과 달리 정말 아무 대비도 해둔 게 없었다. 당시에 교도소에 수감 중이다 보니 당사자를 실제 만날 수도 없었다. 선의만 믿었던지라 혹시 훗날 발생할 사건에 대비한 연락처 하나도 준비해두지 않았던 라힘은 사람들의 의심에 증명할 수단이 아무것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라힘을 공격하는 익명의 제보가 여기저기 들쑤셔대기 시작한다. 주변 지인이 아니라면 쉽게 파악하기 힘든 라힘의 불리한 사정이 빼곡하게 유포되면서 그를 '영웅'으로 칭송하던 여론은 하나 둘 라힘의 선행에 의구심을 품게 되다. 이제 모든 것을 잃어버릴 위기에 처한 그는 절박한 나머지 허술하기 짝이 없는 무리수를 기획하지만 그로 인해 더욱 큰 곤경에 처하고 만다. 과연 라힘은 절체절명의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을까.
 
단선적이지 않은 선악의 모호한 구도가 던지는 질문들
 
<어떤 영웅>의 기본 설정은 마치 19세기말 20세기 초, 미국 문학 2세대를 대표하는 동시에 현대 단편소설의 상징 중 하나가 된 오 헨리의 단편들 속 주인공을 연상하게 만든다. 특히 그의 유명한 단편 중 몇 작품은 우연히 거액을 얻게 되거나 금전적인 결정을 내려야 하는 주인공들을 등장시키기도 하는 점에서 본 작품과 연결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 헨리 역시 20세기 초 미국에서 도시가 급속도로 사회의 중심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도시에 거주하는 (농촌과는 비교불가인) 다양한 인간군상에 주목하며 이를 성공적으로 묘사한 점에서 아쉬가르 파라디 감독이 주목해온 지점인, 이촌향도 현상이 심화된 지 오래인 현대 이란 도시민들에 관한 세밀한 스케치와 접점이 있기도 하다.
 
하지만 단편이다 보니 비교적 단선적으로 형상화되고 작가 특유의 필살 반전으로 개성을 얻었던 오 헨리 소설의 주인공들에 비해 이 영화 속 주인공 라힘은 좀 더 복합적이고 모호한 면모로 자신을 두텁게 감싼 존재다. 선행 과정은 관객에게도 별다른 은폐 없이 그대로 공개되며, 그가 주장하는 양심에 따른 결단은 진실과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거나 주변에서 증언하는 라힘의 선량함 역시 왜곡과는 거리가 멀다. 유혹에 흔들리거나 우유부단한 측면이 분명 있지만 영화에서 표현되는 라힘의 면모는 우리 누구나 경험할 법한 평범함은 물론 이를 조금 더 상회하는 선인으로 손색이 없다.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라힘의 부정적인 면모에 대해 과거회상 플래시백 같은 시각적 이미지를 등장시키지 않는다. 그 대신 오직 바람과 전처 나자닌의 입을 통해서만 라힘의 과거가 일방적으로 규정된다. 그래서 관객은 일단 라힘의 영화 속 선량함을 믿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런 주인공을 불신하고 의심하는 이들 또한 적지 않다. 라힘의 선의를 믿지 않는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구분될 수 있다. 첫 번째로는 가장 극명하게 라힘의 본성을 불신하는 장인 바람과 전처 나자닌 등 처갓집 식구들이다. 두 번째로는 라힘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권한을 쥔 국회 인사부장 나딜리다. 세 번째는 라힘에 대해 세세하게 알지 못하지만 곳곳에서 악성댓글과 진위가 불확실한 제보를 날려대는 익명의 얼굴들이다. 라힘이 가면을 쓰고 악한 본성을 위장하고 있다고 믿는 건 동일하지만 그 출발과 근거는 각자 상이하다.
 
우선 장인과 전처가 보이는 불신은 분명 나름대로의 '팩트'에 근거한다고 봐야할 테다. 라힘을 죄수로 전락하게 만든 원인인 사업 실패와 이를 만회하기 위해 무리하게 끌어다 쓴 사채 전력이 처갓집 사람들에겐 돌이킬 수 없는 과오로 뿌리박혀 있다. 선인으로 설정된 극중 라힘의 행적과 달리 과거의 그가 보였던 미덥지 못하고 지속적인 시행착오로 실망감을 안겼던 후과일 것이다.
 
얼핏 보면 바람의 태도는 비록 실패는 저질렀지만 갱생하고자 하는 라힘에게 너무 매정하게 보인다. 하지만 그가 자꾸만 용서를 종용하는 자선재단 사람들에게 울분에 차 항변하는 대목은 상당한 울림과 함께 관객의 공감을 불러올 만하다. 왜 자신을 피도 눈물도 없는 못된 채권자 취급하고 자신이 보증을 서는 바람에 겪게 된 고통은 누구도 신경 써 주지 않느냐고 바람은 맺혀 있던 한을 내뱉는다. 왜 라힘이 영웅이냐고, 성실히 살아온 자신 같은 평범한 사람은 왜 영웅 대접을 못 받느냐는 분노는 라힘을 영웅으로 만드는 게 필요했던 이들의 속사정과 맞물려 상당한 메아리로 돌아온다.
 
'사돈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픈' 차가운 세상풍경
 
"어떤 영웅"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어떤 영웅"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반면에 중반 이후 라힘을 파국으로 견인하는 일등공신 격인 국회 직원 나딜리의 태도는 전과자에 대한 보편적 편견과 행정적 관료주의가 화학적으로 결합된 것처럼 기능한다. 나딜리의 태도는 우리가 관공서 공무원들에게서 연상하는 부정적 이미지의 총합 격이다. 바람과 그의 딸의 입을 빌어 언급되는 과거 라힘의 허물과는 다르게 그의 시각은 좀 더 원론적인 입장에 가깝다.

평범한 시민들이 세상을 살아갈 때는 기본적으로 선의에 기반을 두고 행동하길 권하게 마련이지만 관료제도 하에서는 늘 안 좋은 경우를 대비하는 게 덕목이 된다. 문제를 만들지 않기 위해 행정 관료들은 선례를 확인하고 의외에 엄격하게 마련이다. 나딜리의 까탈스러워 뵈는 증빙자료 요구는 인사담당자들이라면 익숙할 태도다. 바람 일가의 라힘을 향한 불신과는 상이한 결이지만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는 나딜리의 시각은 주인공을 평가하는데 일종의 '전략적 모호함'으로 진가를 발휘한다.
 
그리고 세 번째, 실체가 분명하지 않는 익명의 제보자들이 있다. 라힘은 영화 속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댓글과 SNS 게시물들에 대해서 이건 분명 처갓집 식구들이나 자신을 시샘하는 교도소 동료 수감자 짓일 거라 단정하고 울화통이 치민다. 하지만 작중 진실은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난처한 상황에 처한 라힘이 '악플'에 의해 정신적으로 몰리면서 실행하는 자충수들만 라힘에게로 돌아올 뿐이다. 물론 익명성에 기대어 타인의 행운을 시샘하며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거는 부정적 행태는 영화 밖 세상에서도 차고 넘치며 극중에서도 아마 대부분은 뚜렷한 근거나 확신 없이 배설하는 데 가까울 테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처음 라힘의 선행을 비아냥거리는 동료 죄수의 태도는 라힘이 조력한 어두운 이면을 예리하게 투영하고 있다.
 
영화 내내 라힘을 괴롭히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냥 주인을 찾아주려 했다면 왜 굳이 라힘은 보안요소에 가까운 교도소 전화번호를 남겼느냐는 것이다. 선행으로 포장하고픈 욕구를 감춘 것 아니냐는 주변의 질타에 라힘은 끝까지 후련하게 답하지 않는다. 물론 라힘이 세간의 불신처럼 모든 걸 용의주도하게 기획한 것과는 거리가 있지만, 라힘 뿐 아니라 우리 누구나 기대하는 작은 칭찬을 듣고 싶은 욕망은 존재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저 주인을 찾아준 개운함으로 끝날 뻔 선행은 마침 교도소 내 치부를 덮고자 하던 관리들에 의해 기획된다. 라힘은 어느 순간 개펄에 발이 빠지듯 이 거대한 스케치에 부속처럼 기능하게 된 것이다. 미디어가 일회성 영웅 프로젝트에 활약하면서 기사거리를 쏟아내자 자선재단 역시 새로운 스타로 라힘을 택한다. 언어장애를 겪는 라힘의 아들 사연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행태는 당사자를 돕기 위한 과정에서의 안일함보다는 도구적 기능성에 바탕을 둔 것처럼 다가온다.
 
결국 사소한 몇 개의 실수가 중첩되면서 라힘을 벼랑 끝으로 내몬다. 이제 만회할 방도는 그가 거짓 영웅으로 판명나면 덩달아 피해가 막심할 이들에게 최대한 협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비장의 방도가 지금껏 라힘의 선의를 왜곡하고 사람들이 그를 못 믿게 만든 홍보의 정점인 걸 알게 된 주인공은 명예와 양심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그 양자택일의 결말이 영화가 전하고자 하는 주제의식일 것이다.
 
영화가 보여준 도덕적 결단과 배치되는 현실의 블랙코미디
 
"어떤 영웅"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어떤 영웅"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영화사 진진

 
영화는 굳이 추리소설 풍의 치밀한 복선보다는 극중 상황을 등장인물과 관객들이 공유해가며 매 선택마다 가슴을 졸이며 쳐다보게 만드는 태도를 취한다. 관객은 라힘이 처한 국면마다 '나라면 어떤 판단을 내릴까?' 질문을 받는 셈이다. 그렇게 감정이입을 요구받다 보니 어느새 관전이 아니라 참여하는 상황이 되고야 만다. 그래서 주인공의 새로운 삶을 응원하고픈 이들이라면 궁지에 내몰린 라힘과 그를 돕는 이들이 최선을 다해 병살타를 날리는 안쓰러움의 순간마다 눈을 감고 싶을 만큼 영화는 웬만한 스릴러 못지않은 긴장감을 조성한다. 액션이랄 것 없는 소소한 풍경이 이어지는데도 요란한 블록버스터 못지않은 감정 선의 파고가 만만찮다.
 
하지만 그렇게 조마조마하게 애간장을 태우던 라힘이 끝에 택하는 결단은 그런 피로함을 단번에 보상해준다. '소피의 선택'이 아니라 '라힘의 선택' 격이다. 그 인상적인 라스트 장면은 담백하고 후련한 동시에 시리도록 애잔하다. 벼랑에 선 것처럼 이제 무엇을 포기할 것인가, 혹은 남길 것인가의 복잡하기 짝이 없는 퍼즐을 그야말로 '고르디우스의 매듭' 자르듯 단칼에 풀어버리는 주인공의 우직한 결심은 말로 표현하기 쉽지 않은 감흥을 남긴다. 그야말로 이성과 감성을 동시에 때리는 울림이다. 우리가 '이란 영화'의 매력 하면 흔히 연상할 정서의 교본 같은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주인공의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는 그가 '인스턴트 영웅'으로 소비될 때에도, 몰락의 위기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게 해주는 진심의 작동에서도 동일하게 기능한다. 유혹에 빠지지 않기란 이 불의한 세상에서 너무나 힘든 일이다. 누구나 시험에 들고 상처를 겪게 마련. 선의로 출발해 온갖 고난에 직면하지만 결국 자긍심과 존엄함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라힘의 시련은 유독 돋보인다.

그런데 영화가 성공한 후 감독의 신상에 일어난 현실의 사건은 그와 연계해 또 다른 기이한 상황을 알려왔다. 창작소재 고갈에 시달리던 감독은 본 작품 소재 관련 '표절'과 연관된 행위로 재판 중이다. 마치 영화에서 라힘이 겪었던 딜레마에 처한 것처럼 보이는 감독의 실제 행보는 영화가 성취한 도덕적 정화의 미덕과는 다소 거리감을 보이는 중이다. 이러한 블랙코미디가 <어떤 영웅> 속 윤리적 시험의 풍경과 연결되는 색다른 감상 포인트가 될 테다.
 
<작품정보>
 
어떤 영웅 A Hero
2021|프랑스, 이란|드라마
2023. 3. 15. 개봉|127분|12세 관람가
감독 아쉬가르 파라디
주연 아미르 자디디(라힘 역)
출연 모센 타나벤데(바람 역), 사하르 골두스트(파르크혼데 역),
사리나 파라디(나자닌 역), 페레슈테 사드로라파이(라드메르 역),
에산 구다르지(나딜리 역)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2021 74회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
2021 93회 전미비평가위원회(NBR) 각본상, 외국어영화상
2021 14회 아시아태평양스크린어워드 감독상
2021 21회 이란 하페즈어워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편집상
2022 33회 팜스프링스국제영화제 국제비평가협회 각본상-남우주연상,
              Bridging the Borders상
어떤 영웅 아쉬가르 파라디 아미르 자디디 모센 타나벤데 사하르 골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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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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