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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면 쉴 권리’는 유엔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권리에 대한 국제규약’ 및 국제노동기구의 ‘사회보장에 관한 협약’의 권고사항이며 한국을 제외한 대부분의 OECD국가가 보장하는 최소한의 보편적 권리입니다. 하지만 한국 노동자들은 아프면 쉬기보단, 생계와 고용 걱정부터 해야 합니다. 최근 진행되고 있는 상병수당 시범사업은 시작부터 실효성을 의심받고 있을뿐 아니라, 정부가 제시하는 노동 및 보건의료정책들은 노동자 건강을 더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역주행하고 있습니다. 이에 '아프면 쉴 권리' 연속기고를 통해 네 차례에 걸쳐 이 문제를 다룹니다.[기자말]
법정 노동시장을 연장하겠다는 '노동개혁'과 동시에 약자에게만 복지를 선별적으로 배분하겠다는 '약자복지'는 아프면 쉬는 노동을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법정 노동시장을 연장하겠다는 '노동개혁'과 동시에 약자에게만 복지를 선별적으로 배분하겠다는 '약자복지'는 아프면 쉬는 노동을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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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사람들에게 아프면 쉬면서 건강을 돌보는 일만큼 어려운 게 또 있을까? 코로나19 대유행을 계기로 상병수당이 도입되면서 아프면 쉬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도 보편이 되어가나 싶었는데 다시 제자리다. 상병수당은 '보편적 건강보장'이라는 제도의 목표가 무색할 정도로 보장성이 축소되고 있고, 그나마도 이를 사용하기 위한 노동의 여러 제도적 조건은 더욱 열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법정 노동시장을 연장하겠다는 '노동개혁'과 동시에 약자에게만 복지를 선별적으로 배분하겠다는 '약자복지'는 아프면 쉬는 노동을 두고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이 기조를 따라 고용노동부가 국가인권위원회의 유급병가 법제화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결과, 아파도 출근하는 것이 여전히 노동의 표준이다.

아플 때조차 쉬지 못하고 일하는 삶인데 정부는 법으로 허용하겠으니 쉬지 말고 마음껏 더 많이, 더 오래 일하라 한다. 낮은 소득대체율과 긴 대기시간 등 진작 낮은 보장성과 접근성을 특징으로 하던 상병수당 시범사업이었지만, 2차 시범사업은 대상자 범위를 소득하위 50%로 더욱 축소했다. 어쩌면 한국 사회에서 노동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유일한 경로라고 할 수 있는 노동조합 '때리기'를 통해 상병수당을 포함한 다른 노동 의제를 한꺼번에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이러한 상황에서 아파서 쉬는 것은 낙타가 바늘을 통과하는 일과 같다.

노동자들의 아픈 몸과 마음을 돌보지 않는데 이토록 적극적인 정부라니. 노동에 대한 가치절하는 정권을 잡기 전부터 노골적이었지만 이 속도와 적극성에는 놀랄 수밖에 없다. 이 모든 것이 "공정한 노동시장"과 "자유롭고 건강한 노동을 위"한 것이라는데 도대체 여기에 공정과 노동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할 따름이다.

노동시간 유연화의 역설 1 - 아픈 노동

노동시장 유연화는 경제 상황에 따라 주로 자본과 기업이 경영 효율이나 비용절감 등을 목적으로 내외부적으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 마련에 관심을 둔다는 점에서 자본친화적이다. 고용과 해고를 더욱 쉽도록 하는 것은 외부 유연화 전략이고, 정부가 추진하려는 것과 같이 노동시간을 자율적으로 조율하도록 하는 것은 내부 유연화 전략이다. 두 전략은 모두 노동의 기능보다는 '수량'을 조절한다는 공통점을 가진다.

노동시간 유연화가 노동자의 시간주권을 보장함으로써 일-생활 균형을 이루는 수단이 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이 보장하는 것은 사용자의 시간주권이다. 고용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균등한 힘의 차이로 인해 일하는 보통의 사람들은 시간으로 구성되는 매일의 일상에 대한 예측이 어려워지는 경우가 많고, 이윤을 동기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시장에서 더 길게 일하는 모순을 경험하게 된다. 한국 사회와 같이 기본급이 낮은 저임금 구조에서는 이 장시간 노동이 자발적인 것으로 보이는 착시효과도 있다.

노동시간 유연화로 인한 이 역설적인 결과들은 상병수당의 필요를 더욱 높인다. 왜냐고? 이미 잘 알려져 있듯이 장시간 노동은 자살생각, 과로자살 등 자살 위험을 높인다. 또한 장시간 노동은 높은 노동 강도를 동반하는 경우가 많고 이는 심혈관계 질환과 과로사로 이어진다. 세계보건기구와 국제노동기구가 함께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2016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노동자 10만 명당 5.9명, 약 2610명이 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사망했다. 이 죽음들에 예고편이 없었을 리 없다. 장시간 노동이 이들의 몸과 마음에 발현될 때, 이들이 소득 상실 걱정없이 충분히 쉬면서 건강을 돌볼 수 있도록 했더라면 우리는 이 죽음들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동시간 유연화의 건강 영향을 설명하는 것이 비단 장시간 노동만은 아니다. 노동시간 유연화로 인한 노동시간 예측의 어려움과 낮은 임금 역시 일하는 이들의 건강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 노동시간을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 일-생활 갈등과 불균형을 가져오는데, 이것은 건강을 보장하지 않는다. 낮은 소득이 건강에 미치는 나쁜 영향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노동시간 유연화의 역설2 – 불평등

높은 노동시간 불확실성, 낮은 임금, 그리고 장시간 노동은 고용 불안정을 구성하는 차원이다. 이 차원들은 고용 불안정성의 다른 차원인 고용 계약의 임시성, 고용주와의 비대칭적 관계에서 비롯하는 취약성, 고용 및 노동 조건의 개선을 공식적으로도 비공식적으로도 요구할 수 없는 낮은 권한, 그리고 사회보장 등 법적으로 보장하는 권리 행사의 어려움과 서로 맞물려 영향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이러한 다차원적 고용의 불안정성을 건강의 사회적 결정요인이라고 부른다.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고용 불안정성의 차원들은 건강으로 결과하고, 또한 건강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한다.

고용 불안정성이 건강의 원인이라면, 고용 불안정성을 높이는 노동시간 유연화는 건강의 원인의 원인이다. 이 원인의 원인에도 정치라는 원인이 있다. 노동시장 유연화를 추동하는 힘은 기본적으로 차별 기제를 장착하고 있다. 차별 기제란 예컨대 이런 것이다. 고용관계가 노동자 보호의 준거가 될 때, 추가 노동시간에 대한 소득을 보장 받을 수 있는 표준 고용 관계에 있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비정규직의 임금 차이는 더욱 커진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언제나 해고의 위험을 안고 있으므로 정당한 대가와 권리를 요구하기 어렵다.

잘 살펴보면 한국의 노동시간 유연화는 남성과 여성에서 그 전략이 상반된다. 남성에서는 장시간 노동을, 여성에서는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한다. 돌봄은 여성의, 생계부양은 남성의 가정생활의 연장이다. 여성에서 노동시간 유연화 더 나아가 고용정책이 주로 일-가정 양립 정책의 이름으로 추진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 있다. 시장은 더 많이 일한 사람에게 더 많은 특권을 부여한다. 주로 일하는 남성의 생애주기를 표준으로 삼은, 돌봄을 노동으로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서 노동시간 단축 전략은 여성들을 계속해서 노동시장 주변부로 위치시키면서 불평등을 강화한다.

그렇다고 젠더 불평등한 가부장적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이 일하는 남성들에게 긍정적으로 결과하는 것 역시 아니다. 앞서 소개 한 고용 불안정성의 여섯 개 차원이 각각 우울에 미치는 영향을 살펴보았더니, 노동시간 예측 불확실성은 여성이 아닌 남성에서만 우울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시간을 협상하고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이 낮을수록 이들의 노동시간은 소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다른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 생겨도 시간을 조율하기 어려워 병행이 어려울 수 있다. 이렇게 시간의 불확실성은 소득의 불확실성으로 이어진다.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남성의 제한적이고 불안정한 젠더 역할 수행이 이들의 건강에 좋을 리 없다.

이것은 또한 아프면 쉴 수 있는 조건의 불평등이기도 하다. 아프면 쉴 수 있는 노동의 권리는 노동시장 불평등을 따르기 때문이다.

노동시간 유연화와 보편적 건강보장은 양립 가능한가?

이처럼 지금의 '노동개혁'은 건강을 중심으로 볼 때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그리고 건강하지도 않다. 상병수당이 제구실을 하기 위해서는 '보편적 건강보장'이라는 제도의 지향이자 가치를 계속해서 고민해야 한다. 보편적 건강보장은 어느 누구든지 적어도 경제적인 이유로 건강을 증진하고, 예방하고, 치료하고, 재활하며 완화하기 위해 필요한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통제할 수 없고, 예측하기 어렵고, 오래 일하고, 낮은 임금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아프면 쉬는 것은 언감생심이다. 얼마나 더 많은 아픈 몸과 마음으로, 사고로, 죽음으로 노동시간 유연화의 나쁜 건강 영향을 증명해야 하는걸까? 일하는 사람이 필요한 건강 돌봄을 필요한 때에, 필요한 곳에서 소득과 일자리 상실을 걱정하지 않고 이용할 수 있으려면, 그래서 정말로 건강하고 정의로운 노동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유연화가 아닌, '안전화'가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시민건강연구소 노동건강연구센터장, 중대재해 학자 전문가 네트워크 운영위원입니다.


태그:#아프면 쉴 권리, #상병수당 , #윤석열 노동개혁,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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