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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갑 두 달 전 뇌혈관수술을  한 여동생의 변화를 바라보며 쓴 글입니다.
▲ 수술 전, 수술 후 회갑 두 달 전 뇌혈관수술을 한 여동생의 변화를 바라보며 쓴 글입니다.
ⓒ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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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막내 여동생이 얼마 전 뇌혈관 수술을 받았다. 회갑 맞이 딱 두 달 전이다. 전신 마취에 대기 시간 포함 5시간이 걸린 '뇌혈관 문합술'. 뇌경색으로 막혀버린 뇌혈관 대신 그 옆 작은 혈관을 이어 붙여 뇌혈류를 늘려주는 수술이란다. 자칫 전신마비 아니면 부분 마비를 일으킬 위중한 상황을 돌파한 것이다.

중환자실, 집중치료실을 하루씩 경유해 일반 입원실로 옮겨졌다. 금지된 입원실 면회 대신 환자 휴게실을 찾아갔다. 막내가 말했다. "입원하러 집 떠나던 날 생각했어. 다시 이 문으로 들어오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왜 아니겠나? 제 아무리 의료기술이 최첨단이라도 예측 불가능한 변수는 발생하기 마련이다. 수술 후 발생할지도 모를 온갖 부정적인 결과에 대한 사전 브리핑도 당사자의 마음을 착잡하게 만들었을 터다.

역시 남편이 제일 편하다니까

다행히 입원 열흘 만에 무사 퇴원. 뇌 MRI 결과, 뇌혈류량은 조금씩 늘어나고 있단다. 뇌조직 괴사도 없다고 한다. 예고됐던 일시적 팔다리 저림이나 손가락 마비 등 수술 후 증세는 발생하지만 순조로운 회복세다. 온 집안이 초긴장 상태에서 풀려났다.

뇌수술이라는 상황, 그건 삶과 죽음의 얇은 경계선에 서봤다는 거다. 특별한 경험이다. 어쩌면 새로 맞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게 된 사람이라는 뜻일까? 흐릿했던 시야가 문득 밝아져 살아가는 일에서 '뭣이 젤로 중한 지'가 명료해지는 상황 말이다.

요즘 그녀는 말한다. "싹싹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남편이 온갖 수발을 들어주더라고. 좀 놀랐어. 수술이 무서워 수술 전에 지레 죽을 것 같은 공포도 하소연할 상대가 남편뿐이었어. 아이들이 하루씩 입원실 당번을 해주기도 했어. 그래도 제일 편한 상대는 역시 남편이더라니까. 이제부터 좀 잘해줘야겠어."

한때 시댁과의 갈등 때문에 이혼 이야기가 격렬하게 오갔던 그들이다. 하지만 33년의 결혼생활로 다져진 전우애가 뜻밖의 적과 교전 중 모습을 드러낸 걸까. 요즘 많이 보이는 '사랑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리는 있는' 부부 유형임엔 틀림없다.

모든 세상사는 죽음 앞에서 도토리가 된다던가. 그 어떤 분노나 미움도 죽음 앞에서는 그저 사소해진다는 말이다. 막내에게 수술은 지난 60년의 삶을 순식간에 되돌아보는, 극적인 전환점이 된 것 같다. 우리가 책 한 권, 또는 영화 한 편을 통과하면서 크거나 작은 변화를 겪듯이 이번 수술을 통과한 막내는 뭔가 달라질 것 같다.

그 변화는 굳이 심오한 깨달음이 아니어도 좋다.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사랑하는 쪽으로 가면 된다. 선물 같은 세 번째 30년을 어떻게 살아갈지, 일종의 인생 리셋이면 좋겠다. 지금까지의 내 원칙을 살짝 내던지는 것을 포함해서다.

오래 원망하거나 미워했던 누군가를 용서할 수도 있다. 내 돈을 떼어먹은 뒤 연락이 없지만 어느덧 보고 싶어진 옛 친구에게 채무 면제를 선언할 수도 있다. 몸이 아픈 이들의 통증, 이에 못지않은 고립감과 우울을 더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 것도 막내를 변화시키지 않을까. 절망으로 눈앞이 캄캄해져본 사람만이 다른 사람의 절망에 말없이 손을 내밀 수 있을 테니까.

새 봄에 피는 꽃도 작년 꽃과 달리 보일 것 같다. 지구별의 한 귀퉁이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이 엄청난 특별함을 제대로 인식하게 될 것 같기도 하다. 한 순간 죽음을 아주 가까이 느껴 본 경험이 지금까지와 다른 삶의 태도를 장착하게끔 도울 테니까. 조금 다른 생각으로, 조금 다른 태도로 막내가 60 이후의 삶을 더 다채롭게 살게 기대된다.

더 다정해지는 남매들

막내의 수술로 형제들도 조금씩 변하고 있나보다. 채팅방 5남매간 오고가는 글이 늘어난다. 맏이인 언니는 잡채랑 조기조림을 만들어 경기도 분당에서 막내가 사는 서울 충정로까지 배달하러 간다. 결혼 후 각자의 가족에 과도하게 매몰돼 살아왔다는 약간의 반성까지 곁들여 5남매간 왕래가 잦아진다. 혈연으로 묶인 인연의 특별함을 갑자기 되새긴 계기가 돼 준 병 덕분에 우리는 서로에게 더 다정해지고 있다.

퇴직 후 막내는 해금을 배우러 매주 종로에 있는 교습소에 다녔다. 이제 보니, 그 평범한 일상은 참 축복받은 일이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해금 수업에 가게 된다면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행운이 될까. 막내는 꽃을 심고 나무를 가꾸는 것도 좋아한다. 오랜 직장 생활 중 부여에 작은 농막을 지었다. 부여 밭에서 기른 감자와 고구마는 해마다 형제들의 집으로 배달된다. 우리는 오래오래 그 감자랑 고구마를 먹고 싶다.

막내의 회갑이 다가온다. 어마무시한 회갑 통과의례를 치른 막내를 위해 언니와 나와 동생들은 그녀의 회갑 모임을 할 생각이다. 막내에게 해금 연주를 청해야겠다. 그 날 올해 피는 벚꽃나무 아래 함께 오래 앉아 있고 싶다.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태그:#뇌혈관수술, #회갑, #통과의례, #부여농막, #해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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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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