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과거를 잊어버린 자는 그것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가 남긴 격언이다. 어제의 역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교훈을 주지만 그 교훈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달렸다.
 
2월 14일 방송된 tvN 역사교양 <벌거벗은 세계사> 86회는 '일본의 전범들을 살려낸 위선의 도쿄재판' 편을 통하여 일본이 2차대전의 잔인한 교훈에도 불구하고 역사청산에 실패한 과정을 조명했다. 일본 전문가인 박삼헌 건국대 일어교육과 교수가 오늘의 강연자로 나섰다.
 
일본은 20세기 들어 제국주의의 길을 걸으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숱한 전쟁을 일으켰고 수많은 나라를 침략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민간인과 연합군 포로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전쟁범죄를 일으켰다. 당시 일본 포로수용소 사망자만 54만, 민간인 학살은 약 596만에 이르며 그 외 전쟁에서 사망한 군인과 희생자를 포함하면 약 천만 명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차대전으로 일본이 패망하면서 승전국인 연합국은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일본의 전범들에 대한 재판을 진행했다. 도쿄 재판(극동국제군사재판, 1946-1948)에는 일본의 A급 전범 피고인 28명이 참석했다.
 
그런데 이 재판에서는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다수의 전범 용의자는 석방되고, 심지어 최고 책임자였던 쇼와 천황은 재판에 출석조차 하지 않았다. 이는 국제적인 논란에 휩싸였고 "도쿄재판은 역사상 최악의 위선"이라는 오명을 쓰기에 이른다. 일본의 전쟁 학살자들은 어떻게 법망을 피하여 빠져나갈 수 있었던 것일까.
 
2차대전이 마무리되어가던 1945년 7월, 승전을 눈앞에 둔 연합국 지도자들은 독일에서 '포츠담 협정'을 맺고 전후 처리 문제에 관하여 논의한다. 여기에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일본의 전범들에 대한 재판실시도 포함되어 있었다. 포츠담 선언 10항에는 '일본의 전쟁 범죄인에 대한 엄중한 처벌'을 명문화해놓기도 했다.
 
일본은 전쟁 기간동안 주민학살-성폭력-도시파괴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고 연합국은 이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포로학대' 문제에 대하여 강한 분노를 드러냈다. 일본군에 의한 연합군 포로 사망률은 무려 전체의 23%에 이르렀으며, 이는 2차대전에서 발생한 포로 사망률 중 최고치였다.
 
하지만 여기서 상대적으로 약소국인 아시아 국가들이 당한 피해와 보상은 철저히  무시당하고 만다. 소외당한 대상에는 일본의 식민지배로 많은 고통을 받았던 한국도 포함되어 있있다. 연합국들은 일본의 식민지배로 인한 범죄는 포함시키지 않았다. 당시 일본과 마찬가지로 식민지를 다수 보유했던 연합국들로서는, 이를 문제삼을 경우 제 얼굴에 침뱉기였기 때문이다. 이로서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배와 전쟁피해에 대하여 제대로 추궁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일본의 패망과 항복으로 2차대전이 막을 내리고 미국의 주도하에 일본으로 보내진 인물이 바로 더글라스 맥아더였다. 그는 연합군총사령부(GHQ)의 사령관으로 일본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게 됐고, 1946년 전쟁범죄 처벌을 위한 도쿄재판소 설립을 주도했다.
 
연합군총사령부는 국동국제군사재판소 조례를 제정하며 전쟁범죄의 범위를 규정하고, 전범의 구분 기준을 세워서 A, B, C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가장 책임이 무거운 A급 전범은 전쟁의 계획, 준비, 시행을 주도한 원흉으로 지도자들에 해당한다. 등급에 따라 전범들의 재판 장소는 달라졌고, 실무자들에 해당하는 B, C급 전범들은 주로 체포된 현지에서 즉결심판을 받았다. 일본인 타쿠야는 오늘날 일상생활에서도 스포츠 경기에서 부진한 선수를 질타하는 의미로 쓰이는 등 '전범'이라는 단어가 일본에서 흔하게 사용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도쿄재판에서 A급 전범 용의자로 지목된 인물은 총 118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 중 대부분이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 실제로 기소되어 재판정에 오른 인물은 고작 28명으로 약 5분의 1에 불과했다. 내각총리대신인 도조 히데키, 만주사변을 주도한 미나미 지로와 이타가기 세이시로, 중일전쟁과 난징대학살의 주범인 하타 슌로쿠와 마쓰이 이와네 등이었다.
 
전범들은 도쿄재판에서 모두 무죄를 주장하며 뻔뻔한 태도를 보였다. 이들은 자신들이 일으킨 전쟁은 죄가 아니며, 이들이 저지른 '평화 파괴자'라는 죄목은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1945년 8월 8일 런던협정에서 만든 '사후법'이라는 논리를 내세워 자신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에 도쿄재판 검사들은 역시 런던 협정을 기반으로 나치독일의 전쟁범죄를 기소했던 뉘른베르크 재판(1945년 11월 20일)의 사례가 있다면서 전범들의 무죄 논리를 반박했다.
 
이에 전범측 변호인단은 "전쟁을 일으킨 게 죄라면 미국도 전범"이라는 새로운 논리를 들고 나왔다. 전범측 변호사로 나선 벤 브루스 블레이크니는 '원자폭탄 투하'를 거론하며, "전쟁 중의 살인은 합법적이고, 죄가 아니다. 전쟁 중의 살인에 형사적 책임을 물은 사례는 없다. 우리는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범인(해리 트루먼 당시 미국 대통령을 암시)의 이름을 알고 있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범죄라면 미국도 전범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재판장은 원폭투하가 전쟁을 끝내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고 평가하며 전범측 변호인단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본격적인 법정 공방이 시작되면서 피고인들의 A급 전범임을 증명하기 위한 각종 증거와 증인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검사측은 일본이 전쟁범죄를 시작한 시기에 집중했고, 만주사변을 일으킨 당시 일본군 관동군참모장이었던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내부고발자의 증언으로 인하여 중국군벌 장쭤린 암살과 철로 폭발사건 자작극 등을 주도했음이 드러난다. 이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계획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고 '교활한 만주침략자'라는 악명을 떨쳤던 세이시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중일전쟁 당시 가장 악명높은 '난징대학살'은 일본군이 약 6주 만에 30만에 이르는 중국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했던 충격적인 사건이다. 민족적 우월주의에 빠져있던 일본은 난징 함락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큰 피해를 받으면서 그에 대한 보복으로 온갖 끔찍하고 잔인한 방법들을 총동원한 대학살을 저질렀다.
 
마쓰이 이와네는 당시 일본군의 중국 중부방면 사령관으로 이러한 부하들의 잔혹행위를 묵인하며 참상을 부채질했다. 하지만 마쓰이는 스스로 증인으로 나서서 "난징에서 약간의 불상사가 있다는 소문만 들었을 뿐 공적보고를 받은 바가 없으며 이런 사실도 종전 이후 미군 방송을 통하여 처음 알았다"고 주장하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난징대학살의 목격자인 미국인 의사 로버트 윌슨은 당시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여성을 강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당시 그의 병원에는 일본군의 총칼에 피해를 입은 중국인들로 넘쳐났다고. 이밖에도 일본군이 난징에서 벌인 잔혹한 학살극을 목격한 증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와네 역시 사형을 선고받았다.
 
잔혹함에 극에 달한 일본군은 심지어 장교들끼리 포로들을 대상으로 '100명 목베기 시합'을 벌였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가해자들의 실명-사진 등이 1937년 일본 자국 언론인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 버젓이 올라오기도 했다. 일본인들은 이러한 잔혹한 전쟁범죄를 전쟁용사의 무용담처럼 여기고 화젯거리로 삼거나 학교 교재로 활용했다는 증거들도 나왔다. 당시 광기에 물든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짐작케한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특히 전범재판에서 전 세계의 이목이 가장 집중된 인물은 '아시아의 히틀러'라는 별명이 붙은 도조 히데키였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습에서부터 태평양 전쟁을 주도한 총책임자였다. 일본 내에서는 독재자의 이미지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천황을 맹신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고.
 
도조는 평소에 군인들에게 포로가 되는 치욕을 당할 바엔 할복자살할 것을 요구했는데, 일본이 패망하고 전범이 되면서 본인의 말이 부메랑으로 돌아와 '자살로 일본의 명예를 지키라'는 투서가 쏟아지면서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도조는 자살을 대비하여 평소 의사에게 심장의 위치를 물어보곤 했다고 한다. 미군으로부터 체포 당할 위기에 놓이자 도조는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나 총알이 빗나갔고 빠른 응급처치로 실패했다. 도조는 정신이 혼미한 상황에서도 "대동아전쟁은 정당한 싸움이었다. 천황폐하 만세" 등을 횡설수설하며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검찰 측은 연합국이 중요하게 여겼던 포로학대 문제에 있어서 도조의 책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충격적이게도 당시 일본군은 미군을 비롯한 연합국 포로들의 인육을 먹기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또한 태평양 전쟁 시기 필리핀에서 벌어진 '바탄 죽음의 행진', 미얀마의 '죽음의 철도' 건설 등을 통하여 지속적인 고문과 학대, 질병, 영양실조, 강제노역 등으로 10만 명이 넘는 포로와 민간들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미국과 국제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지만 정작 도조 히데키는 "포로 관리는 담당 사령관의 재량"이라며 부하에게 잘못을 떠넘기고 자신의 책임을 부정했다.
 
도조는 최후변론에서도 "살기 위한 전쟁이었기에 정당하다"고 주장하며 일본의 개전은 서구세력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강변하며 비겁한 태도로 일관했다. 재판정은 도조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2년 6개월에 걸친 도쿄재판의 결과는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것이었다. 수많은 일급 전범 중 사형이 선고된 것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고작 7명에 불과했다. 특히 최고 책임자인 쇼와 천황을 비롯하여 요직에 있던 천왕의 친족들 중 처벌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또한 악명높은 인간 생체실험을 주도한 731부대도 전범에서 제외됐다. 부대장인 이시이 시로는 일본군들의 부상치료와 세균무기 개발 등을 위하여 수용소에 끌려온 사람들에게 온갖 잔혹한 실험을 실시했으며, 이들은 통나무를 의미하는 '마루타'로 불리우며 철저하게 인간이 아닌 도구 취급을 당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자 A급 전범의 하나였던 기시 노부스케도 증거 불충분으로 면책됐다. 기시는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의 인사와 재정을 총괄한 인물이었고, 731부대장인 이시이의 상관이자 후원자이기도 했다. 각종 전쟁범죄에 관여한 정황이 뚜렸했고 공식연설을 통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을 정당해왔던 인물이지만 도쿄재판 당시 정작 제대로 된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배후에는 바로 맥아더와 미국 정부가 있었다. 맥아더는 천황을 꼭두각시로 남겨두는 것이 일본 통치에 더 유리하다는 판단하에 미국 정부를 설득하여 정치적 거래를 했던 것. 기시 노부스케 역시 친미적인 인사로 분류되어 정치적 활용도를 고려한 면죄부를 받았고, 1957년에는 총리직에 올라 승승장구했다. 또한  731부대는 연구 자료를 미국에 넘기는 조건으로 관련자들을 모두 면책해줬다. 이시이와 731 부대 관련자들은 이후로도 미국과 일본 등에서 의학분야 주요직을 맡으며 승승장구한 것으로 알려졌다.
 
사형된 7명을 제외하고 종신형을 선고받은 전범들은 훗날 대부분 감형 처분을 받았다. 2차대전 이후 전 세계를 강타한 냉전 질서의 영향으로, 미국에 있어 일본의 전략적 비중이 높아지면서 전범국가인 일본에게 주권 회복과 사회 발전의 명분이 생긴 것. 미국은 정치적으로 일본에 손을 내밀면서 당시 수감되어있던 A급 전범들도 모두 사면됐다. 결국 2년여에 걸친 도쿄재판은 극소수의 전범들만 처벌받고 대부분 면책과 감형으로 마무리되면서 '역사상 최악의 위선'이라는 오명만 남기고 말았다.
 
2차대전의 가해자였던 독일과 일본은 전범재판에서도 이후로 상반된 태도를 보였다. 독일은 전범의 잔혹함을 드러내며 잘못된 역사를 인정하고 고치려는 노력을 보여준 반면, 일본은 지금도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이어오는가 하면, 사형된 A급 전범들을 열사로 기리며 전쟁의 책임을 부정하고 있다. 전범에서 면책된 학살자들의 다수는 일본 정계에 진출하여 지금의 일본을 만드는 것을 주도했다.
 
찝찝하고 씁쓸한 도쿄재판의 잘못된 판결이 낳은 뒤틀린 역사인식은, 어쩌면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역사는 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평가하고 그 책임을 온전히 다할 때만이 바로 설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도쿄재판이라는 반면교사를 통하여 얻어야 할 진정한 교훈일 것이다.
벌세계 도쿄재판 쇼와일왕 도조히데키 기시노부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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