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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수는 왜 매일 툴툴거릴까 싶었는데 이제 많은 사람이 그의 명언에 공감한다.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 '참을 인이 세 번이면 호구', '나까지 나설 필요 없다' 등등… 익히 알던 명언들에선 느껴보지 못한 시원함이 밀려온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의 황금률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다들 마음 한구석에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있었던 것이다. "되로 주고 티끌도 못 받으면 어떡해?", "내가 잘해준다고 사람 만만하게 보는 거 아냐?" 같은. 호의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함이 되고, 오늘의 동료가 내일의 경쟁자가 되는 현실에서 남에게 다정한 것만큼 어려운 일이 없다.

타인에 대한 기대도 배신도 없는

모두 엇비슷한 불신 속에 살았던 걸까. 관계에 대한 믿음이 바닥난 사회가 앞당겨졌다. 한겨레 21에 실린 <상처받지 않으려 말 안 하는 MZ> 기사에 따르면 '상처를 덜 주고 덜 받는 것'이 새로운 시대 가치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때 김홍중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현재를 '무해의 시대'라고 진단했다. 남에게 무해하고 싶은 마음 이면에는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강한 의지가 있다.

최근 20대가 겪는 전화 공포증 또한 즉시 올바른 답을 하지 못하면 상대에게 취약함을 드러낸다는 불안에서 온다고 한다. 우리는 실수하면 품어주는 게 아니라 잡은 손이 철회 당한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배웠다. 그런 사람들이 갈망하는 안전지대가 상처도 애정도 없는 무균실이라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다.

타인에 대한 기대도 배신도 없는 곳에서 우리는 정말 더 살만해졌을까? 절망적이게도 그렇지 않다. 남의 아픔에 무감각해지고 나의 일상엔 가혹해지는 것으로 고통을 반복하는 중이다. 서민에게 박하고 기업에 관대한 국가를 보면서, 사회의 슬픔을 책임지지 않는 공직자를 보면서도 내 살길 찾기 바쁘다.

각자도생하지 않으면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서로를 돌볼 여유가 사라져가고 있다. 지지대 없이 홀로 설 수 있다는 믿음이 결국 서로에게 아무것도 줄 수도 받을 수도 없는, 관계의 파산 상태로 이르게 만들까 두렵다. 

무해의 시대가 가속을 내어 도착할 곳이 메마른 사막이라면 손 놓고 있을 수 없다. 이제 우리에게는 좋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도 아주 절실하게. 구멍 난 마음에 바람이 새지 않도록 틈새를 꽉 메워줄 따뜻한 이야기를 듣고 말해야 한다. 내가 만약 의사고 아픈 시대에 처방전을 써줄 수 있다면, 고아라 작가의 웹툰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를 적어 건네고 싶다.

아픈 시대에 처방전 같은 웹툰
 
웹툰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 썸네일
 웹툰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 썸네일
ⓒ 네이버웹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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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심부름을 해다오>는 산신령, 도깨비, 요괴 등 자연물과 인간이 공존하는 판타지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다룬다. 금호산 터널 공사로 깨어난 요괴들이 마을 의양리에 흩어지고 인간들은 골머리를 앓는다.

요괴 퇴치 후 받는 전리품을 모으는 상점에서 주인공 '은호'가 일한다. 은호는 낳아준 부모에게 이름을 받지 못한 아이다. 멍든 채 박스 안에 버려졌고 힘껏 운 울음이 가족 잃은 도깨비 '도연'의 귀에 들어간다.

그는 아이가 새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억을 두 개로 쪼개는데, 학대 당한 은호의 기억은 옆에 자라나는 산삼에게 준다. 산삼은 그렇게 아픈 조각을 짊어지고 태어나 조그마한 요괴가 된다.

아름다운 동화 아래에 아동 학대라는 현실의 문제가 흐르고, 아이들의 깊은 원한을 삼켜 살아가는 절대악 '아귀'가 있다. 아귀는 금호산을 위협하는 존재로 나무를 깎아내고 멍들게 한다. 주인공들은 아귀로부터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할 일을 한다. 이때 산삼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학대받은 아이들을 동력 삼는 아귀에게 찾아가거나 자신에게 지우고 싶은 기억만 떠넘긴 도연을 해코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산삼은 도연에게는 조건 없는 애정과 돌봄을, 은호에게는 넘치는 사랑을 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이 세계관에는 '손해'라는 개념이 없다.  
금호산 신령 금호와 인간의 모습을 한 요괴 산삼의 대화.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 30화 캡처
 금호산 신령 금호와 인간의 모습을 한 요괴 산삼의 대화.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 30화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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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독자를 울린 <30화>에서 금호산의 신령 금호가 현시대에 잊힌 가치를 일깨운다. "누군가에게 뭔가를 베푼다면 어떤 형태로든 네게 돌아올 거야. 마음이 될 수도 있고 재화가 될 수도 있고, 손해라는 개념은 없어. 그러니까 너는 지금처럼 아끼며 사는 거야. 은호도 도연이도 너 자신도".

선의가 선의로 돌아오는 세계에서 주고받음은 등가교환이 아니다. 내가 주지 않아도 받을 수 있는 다정한 세계 앞에서 아득바득 쥔 주먹이 조금 풀어진다.

이유 없는 다정의 귀함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의 산삼과 은호의 선한 선택들은 아귀로부터 금호산을 지키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길을 만든다. 나를 위하고 사랑하는 이를 위하는 마음이 모여 악을 물리치다니, 어쩌면 뻔한 이야기 아닌가 싶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우리가 이미 다 아는 권선징악 강조가 아니다.

주인공 은호를 통해 착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을 가져보자는 제안이다. 아귀와 처음 대면하는 장면에서 은호는 예상을 깨고 아귀를 몸통으로 들이박는다. 그리고 말한다. "나도 할 수 있어. 단순한 유희로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힘을 쓸 수 있어. 내가 약해서 참는 게 아니고 네가 강해서 권리가 생기는 게 아냐. 품위를 지켜."

우리는 종종 내가 가진 상처를 무기로 타인을 상처 주며 그것이 정당하다고 착각한다. 아픔을 경쟁하고 의도치 않은 상처를 주고받는 것에 지쳐서 '무해의 시대'를 원하는 게 아닐까. 어쩌면 아이들의 원혼에 기생하는 아귀보다 버려진 박스에서부터 삶이 휘둘려온 은호가 더 악에 가까워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은호는 품위를 지킨다. 자신을 각별히 아끼고 고통을 대신 가져간 산삼을 품는 쪽으로 마음의 방향을 정한다. 다정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 이유 없는 다정의 귀함을 아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작가가 담담하게 말해주는 것 같다.
산삼을 구해주어 고맙다는 도깨비 도연이의 인사에 답하는 은호.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 89화 캡처
 산삼을 구해주어 고맙다는 도깨비 도연이의 인사에 답하는 은호.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 89화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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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이야기는 행운의 편지처럼 넓고 낮게, 촘촘하게 퍼져야 한다. 옆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기 어려울수록, 비관적인 이야기가 매력적으로 들릴수록 잊었던 순수함과 다정함을 되살릴 얘기를 놓고 떠들자. 가상의 이야기 한 편이 옆 사람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돌려준다면 우리는 이 수다를 멈출 이유가 없다.

태그:#고아라 작가, #네이버 웹툰, #대신 심부름을 해다오, #감성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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