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드라마 <블라인드>의 한 장면.

tvN 드라마 <블라인드>의 한 장면. ⓒ tvN

 
드라마에 '희망복지원'이 등장되자 귀가 예민해졌다. 복지원이라는 말만 들어도 바짝 신경이 쓰이기 시작한 건, '형제복지원'의 참상을 접하면서다. 너무나 많은 사람 그것도 아이들이 감금 당하고 고문 당하고 (성)폭행 당하고 살해 당했다는 진실 앞에 충격을 받지 않으면 이상한 일일 것이다.
 
tvN 드라마 <블라인드>는 형제복지원을 강하게 환기시키는 희망복지원에서 벌어진 피해와 가해의 양상을 다룬다. 드라마 제목이 블라인드(blind)인 것은 주인공 성훈(하석진)이 "당신들은 정말 우리를(피해자들) 보지 못 했느냐"고 재우치듯이, 폭력이 산재해있어도 보지 못 하거나 보이는 데 외면했던 대중의 무관심과 부정의를 깨우치기 위함이다.
 
우리는 '형제복지원' 사건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드라마 속 희망복지원의 등장은 이 드라마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전격적으로 다룰 것임을 암시한다. 매우 고무적인 시도인데, 형제 복지원 사건이 심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에도 지금껏 다루어지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더욱 이상한 것은, 형제복지원 사건이 그 폭력 피해의 양태나 규모 면에서 매우 심각한 인권침해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이목이 집중되지 않은 것이다.
 
드라마 속 희망복지원에서 아이들이 당한 학대는 형제복지원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이다. 매일 매맞고 상습적 언어폭력을 당하고 노역으로 착취 당하면서 딱 굶어 죽지 않을 만큼 먹을 수 있었다. 더 이상 살 수 없겠다 싶어 도망치는 아이들은 반드시 잡혀 처절한 고문으로 보복 당했다. 이들에게 하루는 삶이 아니라, "당장 오늘 안 맞고 좀 더 잘 수 있"기를 바라는 포로의 시간이었다. 드라마에 드러나는 참상은 극화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훨씬 가볍다.
 
드라마는 어느 날 희망복지원이 폐쇄되며 이곳에 수용되었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 설정한다. 이 상황은 형제 복지원이 1987년 검찰에 고소 당하며 폐쇄되는 정황과 유사하다. 당시 매일 신체적, 인격적 학대 속에 살며 그토록 바깥세상을 그리워하던 수용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해방되었을까? 드라마 속 아이들처럼 그렇게라도 어른이 되었을까?
 
말로는 부랑아를 갱생시키는 것이 형제복지원의 목표였지만, 실상 부랑아는 소수였고(부랑아도 잡아 가두어서는 안 되지만) 대부분 납치된 아이들이었으며, 이들이 내세운 갱생은 사회 복귀를 위한 준비로 존재한 적이 없다. 사회로부터 철저히 배제되고 고립되었던 이들은 지옥 같던 곳을 벗어나서도 자유롭게 살기 힘들었다. 매일 혹독한 규율 속에 "맞아도 저항할 수 없는 존재 만들기"에 길들여진 이들이 바깥세상에 나오게 되었다고 하루아침에 주체성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형제복지원 한 피해자의 증언처럼, "사람에서 짐승처럼 되긴 쉽"지만, "짐승에서 사람으로 온전히 돌아간다는 것은 너무나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형제복지원에서 이들은 존엄을 탈취 당했다.
 
드라마 속 아이들은 시설 폐쇄로 흩어지며 대부분 입양된 것으로 상정된다(형제복지원의 경우 20년도 넘는 기간 동안 운영되었기에 어린아이로 들어갔던 피해자는 아무 지원도 없이 중년의 나이가 되어 사회에 던져졌다). 이 아이들이 화나고 불안한 어른이 되어 귀환한 미션이 복수인 것은 인간적으로 타당하다. 그러나 복수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인간적인 차원을 넘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받은 것만큼 만이라는 고도의 절제가 필요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복수의 정의는 복수의 잔혹함 정도를 정한 것이 아니라 딱 당한 만큼이어야 한다는 경구다. 이런 면에서 공정한 복수란 도달하기 어려운 경지일지 모른다.
 
그렇다면 <블라인드>의 복수는 어떻게 펼쳐질까? 이 드라마가 취하고 있는 장르가 스릴러라는 본령 상, 희망복지원을 떠났던 아이들이 귀환해 복수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이 왜 저런 일을 저지르는가 보다는 누가 범인일까에 집중하게 된다. 또한 애초 "우리가 당한 그대로 갚아준다"는 복수의 원칙은 인성(박지빈)의 궤도 이탈로 선을 넘는다. 게다 인성이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살인을 즐기는 행태는 피해자로서 마땅히 행하는 복수를 행할 때 시청자에게 솟아나는 카타르시스를 빠르게 냉각시킨다.

폭력의 피해와 상관없는 사람들이 희생되면서 시청자는 고통 당한 피해자에게 품을 수 있을 법한 '그럴 만도 하다'라는 공감에서 '이건 좀 아닌데'라는 감정으로 급속히 기울기 때문이다. 또한 인성이 드러내는 사이코패스 캐릭터 자체도 적지 않은 고민을 남긴다. 폭력에 길들여진 피해자가 그 폭력을 계승한다는 오래된 믿음을 낳으며, 폭력 피해 희생자에게 바람직하지 않은 편견을 작동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습윤된 폭력으로 사이코패스가 되었다는 설정에서 형제복지원 등의 피해자가 어떤 심정이 될지 착잡해진다.
 
이들의 복수가 이런 방향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들이 복수하는 대상을 선별하는 기준에서도 고민을 남긴다. 시설을 운영한 사람은 물론 그 시설과 관계된 모두가 공범이라는 의식은 타당하다. 그러나 동료였던 아이에게 탈출을 밀고한 죄 그리고 복지원 내 성폭행 피해로 협박당하며 살았던 당시 간호사에게 구조하지 않은 죄를 기계적으로 단죄하는 것은 정의로울까.
 
이들 외 아이들을 폭력으로 다룬 시설 관계자들, 뇌물을 받아먹은 경찰, 불량식품을 납품한 업주, 참상을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은 기자 등 모두 공범인 것은 맞다. 이러한 공범성은 형제 복지원에서는 보다 구조적으로 나타난다. 당시 경찰은 정부의 지침에 따라 부랑인 체포 실적을 채우기 위해 거리에 있는 무고한 아이들을 잡아 형제복지원에 넘기며 정부의 부당한 명령에 부역했다. 또한 부랑인에 대한 지역사회의 혐오감은 부랑인이 나오면 지역사회를 어지럽힌다며 영원히 격리할 것을 요구할 정도였다.

복지원을 둘러싼 이권으로 연결된 개인 개인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권력의 프락치 노릇을 한 경찰 권력이었고 지역민의 근거 없는 혐오였으며, 더 나아가 이들에 대한 감금과 폭행 등의 인권침해를 방조했던 국가에 있다.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이 마침내 국가를 대상으로 손해배상 투쟁에 나선 이유다. 드라마가 물어야 했던 것 중, 피해자들이 처참하게 붕괴될 동안 국가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책임도 반드시 있어야 한다.
 
복수 살인을 설계하고 실행한 성훈은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지 않았음을 인정하면서도 사죄 받을 당사자로 고통 당했던 희망복지원 피해자들을 지정한다. 성훈의 입을 빌어 전달된 사과는 정작 우리 사회가 감당했어야 할 책임임을 부끄럽게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가해자에게 복수했던 희망복지원 아이들과 달리, 형제 복지원 피해자들은 그곳에서 풀려나면서 관계자들을 응징하지도 세상 속으로 스며들지도 못했다. 그곳에 갇힌 것이 그들의 잘못이 아니었음에도 세상은 그들을 '형제복지원 출신'이라고 손가락질했기 때문이다. 이들이 낙인을 딛고 세상 속으로 나아가기 시작한 건, 한종선(국회 앞 일인 시위), 최승우(고공 농성), 박순이 등의 피해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피해를 증언하며 피해 당사자로 나서면서다. 피해자들은 이를 기점으로 피해자 모임을 결성하고 마침내 피해 당사자 운동 주체로 나선다.
 
드라마를 보며 시청자들은 고통받은 피해자들에게 시민으로서 미안함을 느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블라인드'를 걷어내고, 이들의 피해에 적극적으로 공감하면서 이들의 행보에 관심과 지지를 표하는 연대의 노력으로 나아가는 일일 것이다. 영화 <도가니>가 청각장애인 시설의 문제를 전면 부각시켜 시민을 각성시킨 것처럼, 드라마 <블라인드>도 형제복지원 사건이 사회적 의제가 되는 마중물이 되기를 바란다.
 
※ 형제복지원 관한 내용은 서울대 사회학과 형제복지원 연구팀이 엮은 <절멸과 갱생 사이>를 참고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개인 블로그 게시
<블라인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국가폭력 <절멸과 갱생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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