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인간 잡학사전>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인간 잡학사전> ⓒ tvN


모든 것이 완벽하고 빈틈없는 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과연 매력이 있을까. 오히려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약간의 결점을 가지고 있어서 그래서 더 성장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인간이 더 매력적이다.
 
지난 16일 방송된 tvN <알아두면 쓸데없는 인간 잡학사전>에서는 '사랑하고 싶은 인간'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학회 참석으로 불참한 심채경을 대신하여 <헤어질 결심> <작은 아씨들> 등의 화제작을 집필한 작가 정서경이 이날의 특별 게스트로 합류했다.
 
잡학박사들은 성수동의 한 미술관에 모였다. 마침 미술관에서는 '사랑'을 주제로 세대별 순정만화와 이를 재해석한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영하는 "인간이 사랑에 빠졌다는 것은 현재에 머물러 있는 굉장히 드문 상태라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대부분의 인간은 걱정을 하거나 후회를 한다. 그런데 사랑을 할 때면 미래도 과거도 없이 오직 사랑하는 그 대상과의 현재에만 몰입한다. '순간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쩌면 사랑의 본질"이라는 생각을 밝혔다.
 
정서경은 어릴 때 의외로 순정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고백하며 "종이 위의 그림들이 그리 설레지 않았다."고 밝혔다. 정서경은 "오늘 전시를 보면 왜 설레지 않았는지 이유를 알겠다. 종이위의 글씨는 자유롭게 상상이 가능하다. 그런데 순정만화는 (실제와 달리) 무조건 잘생기고 멋있어야 하니까"라는 생각을 밝혔다. 

김영하는 '연애를 한다는 것은 마치 이상적 부모를 찾는 것과 같다.'는 한 작품의 대사를 인용하며 "연애 이야기에서 가장 로맨틱한 대사들은 사실, 이상적인 부모에게 듣고 싶어하는 말"이라고 분석했다. "어릴 때 부모의 사랑은 당연하게 여겨진다. 사랑의 크기가 작아지는 과정이 성장과 독립이듯이, 순정도 절대적인 부모의 사랑에 가깝다. 연애라는 것은 서로에게 잃어버린 부모의 사랑을 회복시켜주는 것 같은 환상을 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정서경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무언가를 꺼내놓는 일이기에 뭔가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라는 생각을 밝히면서 "요즘 10대-20대의 과제는 사랑보다는 생존이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로맨스에 대환 관심도 줄어든 게 아닐까."라고 이야기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인간'이란 어떤 인물일까. 물리학자 김상욱은 '물리학자가 사랑한 물리학자'로 불리우는 리처드 파인만을 지목했다. 파인만은 '지구 멸망의 순간에 모든 지식이 파괴되고 단 한가지만 물려줄수 있다면?' 이라는 질문을 받고 "세상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있다."는 답을 남겼다.
 
뼛속까지 물리학자였던 파인만은 정의할 수 없는 것을 논쟁하는 것을 시간낭비로 여겼다. 파인만은 22살에 대학원에 입학하며 물리학-수학 등을 만점을 받았으나 국어나 역사 성적은 처참했다. 이에 파인만은 "자연과학은 자연에 대한 사실을 다루는 학문이고 누가 하든 똑같은 결과를 얻게 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은 대단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반면 "국어는 인간의 약속에 불과하다. 결국은 암기과목에 공부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반골 기질이 강했던 미국 출신의 파인만은 당시 교양을 중시하던 유럽 위주의 물리학계로부터 별종 취급을 받았다. 파인만은 교양 역시 인간의 약속에 불과한데 그걸 잘 모른다고 무시하는 사회와 학계 분위기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본업인 물리학에서는 누구보다 최고였던 파인만은, 20대의 나이에 유진 위그너, 존 폰 노이만, 볼프강 파울리,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 노벨상 수상자들이 즐비한 세계적인 석학들에게도 인정받는 물리학자가 됐다.
 
집학박사들은 인생의 중요한 무대에서 차라리 안 왔으면 하는 사람으로 모두 자신들의 우상을 꼽았다. 정서경은 자신의 신작영화가 개봉할 때 부르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의외로 20년간 함께해온 창작 파트너인 박찬욱을 지목했다. 정서경은 "제 머릿속에 이미 박찬욱 감독이 살고 있다. 그래서 일부러 박 감독과 관계없는 작품을 쓰려고 노력중이다. 개봉을 해도 첫 날은 안오시면 좋겠다."고 고백했다.
 
파인만은 유쾌하고 마이페이스적인 성격의 이면에 한편으로 '훌륭한 교육자'이기도 했다. 브라질에서 물리학 강의를 하게 된 파인만은 영어에 서툰 브라질 학생들을 배려하여 본인이 포르투갈어를 공부하여 강의를 하는 열정을 보였다. 김상욱은 한국에서 교수와 학생이 모두 한국인임에도 일정 비율로 영어 강의를 강제화된 현실과 비유하며, 교육자로서 파인만의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파인만의 양자역학 이론을 활용한 유명한 영화가 2017년 개봉한 <컨택트>다. 파인만은 원인과 결과를 중시하는 뉴턴식, 목적론적 해석을 중시하는 해밀턴식으로 대표되는 고전역학의 두 체계를 양자역학까지 확장했다. <컨택트>에서는 이를 운명론적으로 재해석하여 주시제 개념이 없는 외계인과의 소통을 통하여 주인공이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보게 되고, 딸이 죽게 될 것을 알게 되지만 사랑으로 모든 운명을 받아들이는 감동적인 선택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괴짜에 교양도 없는 냉혈한 같은 파인만이지만, 의외로 순정적인 러브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파인만의 첫사랑 알린 그린바움은 결핵을 앓으며 생명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파인만은 그녀와 단둘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파인만은 아내가 결국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주변에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연구와 실험에 매진했다. 또한 알린과 사별한 이후의 파인만은 또 한 번의 이혼을 겪었고 방탕한 사생활과 여자관계로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파인만 사후에 이미 세상을 떠난 알린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편지를 썼던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놀랍게도 파인만은 "당신을 정말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어, 내 아내를 사랑한다고. 내 아내는 이미 죽고 없어도, 리치"라고 그답지 않게 달달하게 쓰여진 러브레터를 통하여, 평생 이성적인 과학자로만 알려진 파인만의 반전 사랑꾼으로서의 진면모를 감추고 있었다.
 
또한 파인만은 나이가 들어서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물리학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라는 어록을 남기기도 했다. 김상욱이 사랑한 파인만은 어쩌면 스스로 불완전한 사람임을 인정하게 되면서 완전한 사랑의 힘을 믿게된 것은 아니었을까.
 
법의학자 이호는 자신의 20년 지기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조남수 박사를 '사랑하고 싶은 인간'으로 선택했다. "조사도 하나 없이 날로 먹으려고 한다."는 주변의 핀잔에, 이호는 머쓱해하면서 조 박사를 선택한 이유에 "그의 직업윤리 속에 사랑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이호는 "인간에 대한 사랑 없이는 전문가적 사랑도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밝혔다. 이호는 2차대전 당시의 홀로코스트를 언급하며 당시 많은 전문가들이 죄의식 없이 가담했던 사실을 지적했다.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유대인들을 학살한 것은 악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윤리적 판단을 포기하고 생각을 멈추었기에 '악'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부지런하고 독특한 궁리가 많은 조남수 박사는, 직업적 사명감으로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범죄자의 DNA를 모아 스스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염색체 연구라는 과학수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며 미제 살인사건 해결에 큰 기여를 하기도 했다. 내가 지금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이라도 혹시라도 사건 해결에 보탬이 될까 싶어서 다양한 연구를 멈추지 않았던 조 박사의 노력 덕분에 2012년 청주 해장국집 살인 사건 등에서 억울한 죽음의 진실이 밝혀질 수 있었다.
 
이호는 "전문가는 자기 영역만 깊이 팔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일을 내가 왜 하고 있는가 의미를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다."고 설명하며 "사람은 같은 시대와 사회를 살아가며 고민과 감정, 양심을 공유한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 내가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를 생각한다면 우리 공동체를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호는 조남수 박사를 보면서 "이 사회의 안전은 거대한 누군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성실한 개인들이 지키고 있구나"라고 느꼈다고 고백했다. 남들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인비저블 인간'이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을 다하는 작은 거인들의 존재 덕분에 우리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
 
정서경은 자신이 창조해낸 작품 속 캐릭터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인간으로 <헤어질 결심>의 송서래(탕웨이)와 <작은 아씨들>의 인주(김고은) 등을 꼽았다. 항상 최근작의 주인공들을 사랑한다는 정서경은 "시나리오를 쓰는 동안 제가 만든 캐릭터들을 마음 속에 넣은 채 밤낮을 보낸다. 꿈속에서도 캐릭터를 계속 안고 살아간다"고 고백했다.
 
정서경은 "캐릭터를 만들 때 결점을 먼저 생각한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할 때 장점 때문에 사랑하는 것 같지 않다. 그 캐릭터의 결점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사랑하게 된다."는 철학을 밝혔다. <작은 아씨들> 인주에게는 '돈에 대한 욕심', 인경은 '무모함' 등의 결점이 있었고, 캐릭터의 결점은 이야기가 진행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외부의 적을 극복해나가는 완전무결한 무적 캐릭터도 있지만, 정서경은 "자신의 작품에서는 인물의 선택들이 이야기를 만들어갔으면 한다."는 소신을 드러내며 "사건과 인물의 결함이 결합될 때 이야기도 감정도 확대된다"는 철학을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캐릭터의 불완전한 결점을 통하여 시청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인공의 성장과 성공에서 감정을 이입하며 희망을 찾게 된다.
 
또한 정서경은 데카르트의 기계론에 빗대어 "인간을 기계장치처럼 생각한다."는 자신의 철학에 따라 캐릭터를 구성하는 요소로 "한 인간이 성취하고자 하는 삶의 목적을 설정하고, 그가 겪게 되는 인간관계와 감정을 동력장치로 여긴다."는 구조를 설명했다.
 
작가 자신이 구상한 캐릭터와 배우가 창조해낸 캐릭터가 달라진 경우도 있었다. 정서경은 그 예로 <작은 아씨들>의 인경(남지현)을 거론하며 본인은 처음부터 '차갑고 건조한 캐릭터'로 설정했지만, 배우 남지현은 열정적이고 당차던 인경이 점점 차갑고 단단해지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시나리오에서 출발한 캐릭터가 연기자와 연출자, 시청자의 눈를 거치며 점점 입체적으로 변해간다는 것.

정서경은 자신이 만든 캐릭터 중 유독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은 캐릭터로 <헤어질 결심>의 서래를 거론하며 "서래는 살인자이지만 그녀의 결함은 헤어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죽여야했던 서래가 그 트라우마로 단 하나의 헤어짐도 견디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김상욱은 김영하가 추천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한 구절 "사랑은 언제나 우연으로 시작한다."를 인용하며 "우연한 만남을 필연으로 바꾸는 과정이 사랑이라면 자연의 수많은 원리도 이와 같다."고 물리학자로서 바라본 사랑을 규정했다.
 
이에 화답한 정서경은 "<헤어질 결심>은 내가 쓴 이야기 중 가장 자연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규정하며 "배우들의 연기, 장소가 주는 느낌들로 의도했던 시나리오의 대사나 장면이 바뀌기도 했다. 마치 제가 결말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고 회고했다. 정서경은 "우연이 만들어낸 거대한 자연의 힘을 관객들이 느끼겠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첩보멜로물로 새로운 작품을 구상 중이라는 정서경은 새 캐릭터의 결함으로 "자기 자신을 잊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자기 정체성을 숨겨야 하는 첩보원의 특성에 빗대어 잃어버린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조금은 독특하고 삐뚤어진 시각 같지만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과 애정이 담겨 있는 잡학박사들의 이야기는 시청자들의 공감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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