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최○○ 아니라고요, 왜 자꾸 잘 못 불러요." 

자신의 이름을 거듭 잘못 부른 간호사를 향해 말하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깊은 산골짝 메아리처럼 쩌렁쩌렁 병원대기실을 울린다.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일제히 향해 있었다.

"제 이름은 박○○라고요." 

자신의 제대로 된 이름을 대기실 사람들에게도 각인시키려는 듯 주름질 목이 펴질 정도로 힘껏 말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간호사는 죄송하다고 한 뒤 "박○○님이시죠?"라고 정정해서 되물었다.

잠시 후 간호사는 아까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박○○님 진료실로 들어오세요"라고 한글자씩 또박또박 외친다. 비로소 정확한 이름으로 불린 할머니는 아까와는 달리 순한 양이 되어 "네에"하며 진료실로 들어간다.

흔했던 내 이름

문득 그 할머니의 이름이 다시 궁금해져 진료대기판을 보는데 그 아래로 주욱 늘어선 이름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하나도 같지 않은 여러 개의 이름들. 그 이름들은 아마 그들의 부모님들이 밤을 새며 심사숙고 한 끝에 탄생한 걸작이리라.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세상의 부모들은 최대의 힘을 그러모아 열을 올린다. 우리 아이의 존재가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최대한 빛날 수 있도록. 신경질적으로 따지듯 물은 할머니의 행동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간호사가 대강 보아 잘못 부른 이름이 할머니의 존재마저 부정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닐 터이다. 내 이름도 엄마아빠가 며칠을 머리 싸매며 지었다고 했다. 나는 그때마다 "고민하고 지은 거 맞아? 내 이름은 왜 이리 흔한 거야. 이름 바꿔줘"하고 입을 뾰로통 내밀며 퉁명스레 말하곤 했다.

이유미, 부드러울 유에 아름다울 미, 세상 좋은 뜻이다. 좋은 뜻에 반해 내 이름은 그 당시 발에 치일 정도로 흔했다. 우리 반에도 유미라는 이름이 세 명, 학원에도 두 명이 있었으니까. 선생님이 "유미야 이리로 와봐"라고 하면 세 명이 일제히 대답하곤 그 유미가 아닌 다른 유미들은 머쓱해지는 일이 잦았다.

반면 우리반에서 제일 예쁜 여자애인 여진이는 희귀하고 예쁜 이름을 가졌다. 성도 특이해서 한 번 들으면 귀에 콕 박혀 존재감을 빛내는 그 이름, 내겐 그 이름이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말이다.

역사 시간 불현듯 등장한 여진족이라는 단어 이후 우리반 짖궂은 남자아이들은 줄곧 여진이를 따라다니며 여진족, 오랑캐라며 수도 없이 놀려댔다. 한낱 철없는 남자애들의 대수롭지 않은 놀림이라 여기며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던 여진이는 어느 날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오르며 울어버렸다. 그 이후로 나는 다시는 엄마아빠에게 내 이름이 흔하다느니 바꿔달라느니, 라는 말을 입밖으로 내지 않았다.

따뜻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줄 때

얼마 전 옷가게를 들렀다가 주인이 신상입고 소식을 알려준다며 이름과 연락처를 물었다. 이름을 듣는 순간 "어머 언니, 이름이 참 이쁘네요." 물론 상업적인 립서비스라는 걸 알아챘다. "너무 흔한 이름인데요, 뭘." 대수롭잖게 맞받아쳤다.

"요즘 그 이름 또 안 흔해요. 애들 이름 중 유미라는 이름 잘 못 들어봤어요." 그녀는 얼굴 만면에 미소를 그리며 말했다. 어릴 적엔 발에 채이는 흔한 이름이 요즘에서야 희귀함을 가지게 된 건가. 느닷없는 이름 칭찬에 선견지명이 있을지도 모를 우리 아빠를 칭찬해주는 것 같아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었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나서는 내이름이 불리는 일이 흔치 않은 일이 되었다. △△이 엄마로 불리는 게 더 익숙하다. 그나마 내 이름이 똑똑히 불리어지는 곳은 주로 관공서나 은행, 병원 등이었다. 그런 공공연한 장소에서 내 이름이 잘못 불리면 속으로 발끈했던 기억이 여러 번 있다. 잘못 불린 그 이름이 허공으로 메아리 칠 때 누군가에게 내 존재 자체를 존중받지 못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진료대기실 명단에 빼곡했던 이름이 어느새 썰물처럼 빠지고 내 차례가 되었다. 그때 병원 문을 열고 아픈 기색의 아이와 엄마가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까 그 간호사는 다시금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으려는 듯 창백한 얼굴의 아이가 나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며 들었다. 

잘 안 들리는 모양인지 "예쁜 아이야, 이름이 뭐지?"라고 전보다 소리를 높여 물었다. 아이가 깨금발을 들고 간호사를 보며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소리로 또박또박 이름 세 자를 말했다. 간호사는 그 이름을 한글자씩 눌러짚으며 다시금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아까 그 할머니 일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나보다.

천사가 인간 세상에 내려올 때 가장 순수한 염원과 간절한 기원을 담아 주어지는 그 이름. 정신없는 삶 속에서도 누군가의 그 이름을 대강 보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가 따뜻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줄 때, 그 순간 우주에서 가장 긴 메아리로 남아 그 사람의 존재를 빛나게 할 테니 말이다.

"○○○ 들어오세요." 간호사가 따뜻이 불러주는 정확한 이름 석 자에 창백했던 아이의 얼굴이 순간 밝은 개나리빛으로 바뀐다.

태그:#이름, #소중한이름, #타인의이름도소중하다, #정확하게이름을불러주는것, #이름은또다른나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세상의 작은 소리에 귀기울이는 에세이작가가 되고 싶은 작가지망생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