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포스터

다큐멘터리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포스터 ⓒ 영화사진진

 
그럴 때가 있다. 편지 한 통이, 메일 하나가 운명을 바꿀 때가. 그 운명을 붙잡는 건 온전히 개인의 선택에 달린 것이고. 지난달 28일 개봉해 1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The Man Who Paints Water Drops)의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린 미루픽쳐스 김영 대표의 경우가 그랬다.

이 79분짜리 다큐멘터리는 고 김창열 화백의 삶과 작품 세계를 조명한 한국과 프랑스 공동 제작 영화다. 50년간 묵묵히 '물방울'만을 그리며 전 세계의 사랑을 받은 화가 김창열의 삶과 작품 세계, 그 '인간 김창열'의 시간들을 역시 사진과 음악, 영화를 두루 섭렵한 예술인인 아들 김오안 감독이 카메라에 담았다. 프랑스 감독 브리짓 부이요와 함께였다.

먼저 프랑스 파라이소 프러덕션이 제작에 돌입했다. 2015년을 전후해 김요안 감독이 카메라를 들었다고 했다. 사진을 전공한 김 감독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각본과 촬영, 음악과 사운드를 도맡았다. 영화는 처음이었기에 이후 부이요 감독이 합류했다. 촬영이 본 궤도에 오르고 막바지에 이르렀을 즈음인 2017년 하반기, 프랑스 제작자인 클라리스 튀팽은 한국의 공동제작사를 백방으로 수소문 중이었다.

마침 김영 대표는 영진위 공동제작 워크샵을 통해 프랑스 일정을 소화 중이었다. 운명 같은 메일이 당도했다. 파라이소 프로덕션의 프로포즈 메일을 접한 김 대표는 바로 만남 일정을 잡았다. 프랑스 제작진과 구두로 공동제작에 합의했다. 이후 김 감독과 서울에서 미팅을 진행하면서 공동제작이 현실화됐다. 언제나 수많은 선택들 중 하나가 운명을 좌우하는 법이다.

내한 중인 김오안, 브리지트 부이요 감독과 바쁜 일정을 소화 중이던 김영 대표를 지난 6일 성곡미술관 인근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성곡미술관은 오는 15일까지 영화와 동명인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전시를 진행 중이다.

영화 개봉과 함께 김창열 화백의 삶을 더 가까이 들여다 볼 수 있는 전시까지 마련한 김영 대표에게 한국과 프랑스 공동제작의 과정을 물었다. 실제 촬영은 김 화백이 활동했던 프랑스에서부터 김창열 미술관이 위치한 제주까지 이어졌지만 김 대표의 활동 영역은 조금 달랐다. 김창열 우연인 듯 운명처럼 만난 이 '시네마 에세이'의 제작 후반부에서 빚어진 흥미진진하고도 흔치 않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다.

북한 촬영이 허가가 났었더라면 바뀌었을 운명
 
 성곡미술관에서 간담회를 진행 중인 브리짓 부이요 감독(왼쪽에서 두 번째), 김오안 감독, 김영 대표(왼쪽에서 네번째).

성곡미술관에서 간담회를 진행 중인 브리짓 부이요 감독(왼쪽에서 두 번째), 김오안 감독, 김영 대표(왼쪽에서 네번째). ⓒ 미루픽처스

 
"미루픽쳐스가 2014년 수입 개봉한 <피부색깔=꿀색>의 융 전정식 감독의 다음 작품 취재를 위해 2015년 이후 프랑스를 오갔다. 이후 영진위에 공동제작 워크샵을 통해 프랑스에 갈 수 있었고, 굵직한 프랑스 영화인들을 두루 만났다. 그때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콘트롤타워인 파라다이소 프로덕션의 클라리스 튀팽 프로듀서가 다큐 공동제작에 관심있는 한국 영화인들에게 메일을 보낸 거다. 김창열 화백의 다큐를 만들고 있다고.

바로 메일을 했다. '어, 나 마침 파리에 있는데?'. 당장 만나자고 해서 실제 짧게 만났지만 확정은 아니었다. 이게 2017년 말이었다.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김오안 감독이 서울로 와서 만나게 됐다. 이제 프로듀서도 만나고 감독도 만났지만 이 작품을 하게 되는 구나 싶더라."


공동제작은 처음이었다. 다만, 벨기에에서 자라난 한국계 입양아 '융'의 성장애니메이션인 <피부색깔=꿀색> 융 해낸 감독과의 인연을 맺고 차기작을 준비하면서 유럽 및 프랑스와의 접점이 생기게 됐다. 그 인연이 김창열 화백의 시간을 담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와 만날 수 있는 운명으로 이끌어 줬다. 또 마침 남북의 평화 분위기도 김 대표의 의욕을 북돋워주고 있었다. 김 화백의 고향이 평안남도 맹산이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기억하시겠지만, 2018년 초에 기업인들과 문재인 대통령이 방북하고 백두산에 올라가고 했잖나. 그에 앞서 저는 2005년과 2008년에 영화인들, 종교인들과 금강산도 가고 평양에도 갔었다. 그 이후 10년 만에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를 만났는데, 꼭 북한에서 촬영해야 겠다 싶더라. 김창열 화백 고향을 감안한 유럽 제작진이 먼저 북한에서 촬영하는 걸 고려해 보자고 제안했다. 저 또한 가본 경험이 있고, 당시 남북이 평화 분위기니까 '좋다' 추진해 보자 싶었다.

처음 제가 합류하기 전엔 김창열 화백도 북에 방문하는 계획이었다. 김 화백님이 같이 가기 보다 프랑스 제작진을 보내는 걸로 생각했다. 처음엔 저도 따라가려가고 했고 이런 깜찍한 생각까지 했었다. 일단 그림을 들고 (김창열 미술관이 있는) 제주를 찍고, 목포에 가서 세월호 현장을 방문하고 영화의 도시인 부산을 갔다가 광주 갔다가 서울 들르고 DMZ 갔다가 평양 갔다가 맹산에 가자. 금강산, 백두산 다들리자. 기업인들을 섭외해야 하나(웃음)."


성사됐으면 블록버스터급(?) 다큐가 될뻔 했으나 결과적으로 아쉬움을 남긴 시간이 됐다. 열과 성을 다해 북한 촬영을 진행했지만 성사시킬 순 없었다. 마침 '남북'을 내걸었던 평창국제평화영화제도 시작됐고, 영진위 내에 대북 위원회가 평창이랑 같이 뭔가를 하려던 분위기들도 조성됐던 시기였다.

여러 루트를 통해 백방으로 알아봤다. 프랑스 제작진이 북한의 허가를 받으면 되는 일이었으나 끝내 허가가 안 났다. 2018년 내내 그런 작업들이 있었다. 북한이 호의적으로 여겼던 모 방송사에 의뢰도 해 봤다. 처음부터 함께 작업한 것도 아니라 성사되지 못했다.

심지어 '브로커'를 소개 받아서 북한 쪽 촬영팀을 알아 보라는 얘기도 나왔다고 한다. 그렇게 위험하게 할 일은 아니었다. 하노이 회담이 결렬도 되고. 갈수록 정세가 안 좋아지면서 일단 북한 촬영은 접었다. 이 과정을 찍었어도 '그림'될 영화 같은 이야기라 할 만 했다. 김영 대표가 프로덕션에 적극적으로 관여할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무산됐다.

"그 즈음 편집 중이었는데 의견도 드리고 했었지. 당시엔 다큐멘터리에 인터뷰 내용이 많았다. 유명 화백들이 보는 김창열 화백의 이야기도 좋지만 그건 이미지가 우선시되고 시적인 시네마 에세이로 가는 게 맞다는 의견을 드렸었다. 또 저 같은 경우, 촬영이 막바지 단계라 프로덕션에 관여할 여지는 크지 않았다."

공동제작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들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속 고 김창열 화백과 손자.

영화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 속 고 김창열 화백과 손자. ⓒ 영화사진진

 
영화가 어디 촬영만으로 완성되는 일인가. 후반 작업부터 배급 홍보까지 첩첩산중이었다. 특히 한국영화계가 생소할 수밖에 없는 프랑스 제작진과 감독들에게 한국영화계와 다큐 영화제들을 소개하는 것 자체가 일이었다. 이를 위한 김 대표의 긍정적인 결실로 이어졌다.

"2018년 가을, 겨울에 프로듀서, 감독 두 분이 다 오셔서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다 다녔다. 그때만 해도 인천 다큐포트 같은 좋은 플랫폼도 있었고. EIDF도 가고. 영화계 분들에게 말하자면 출사표 던지듯이 인사도 좀 했고. 2019년 상반기에 서울독립영화제와 서울산업진흥원이 처음으로 후반작업제작지원을 처음 만들었는데 감사하게도 뽑아 주셨다. 공동제작하는 독립영화도 지원하고 외연을 넓히던 무렵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편집은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편집 감독과 함께 작업했던 나심 고르지-테라니가 맡았고, 두 감독이 함께 참여했다. 그 편집 감독이 2시간짜리 버전을 80분으로 깔끔하게 줄여줬다. 이후 2019년 후반부 서울에서 후반 작업을 진행했다. 믹싱은 <뷰티풀 데이즈> 윤재호 감독의 프랑스 믹싱 기사인 쥘스 위소키가 담당했다. 이 분도 음악을 하는 분이어서 김오안 감독과 잘 맞았다. 이듬해 코로나 팬데믹이 왔다. 영화제 공개 전략이 쉽지 않아졌다.

"이후 아이러니하게 2021년 초에 화백님이 돌아가셨다. 뉴욕 타임즈가 부고 기사도 내고 국내 언론도 사망 소식을 조명하고. 결과적으로, 2021년 상반기에 세계 3대 다큐멘터리 영화제이자 북미 최대 다큐 영화제인 핫독스에서 선보일 수 있게 돼서 다행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저런 고비가 있었는데 화백님이 돌아가시면서 모든 게 정리되는 결과로 이어졌으니까.

그렇게 2021년 상반기엔 핫독스에서 월드 프리미어 상영을 하고 하반기에 DMZ국제다큐멘터리 영화제에서 코리안 프리미어를 했다. 이후 감사하게도 영화진흥위원회가 배급지원작으로 선정해줬다. 배급사 영화사 진진 측과 2022년 상반기 개봉이냐 하반기 개봉이냐 고민을 했는데, 영화 분위기에 어울리는 가을이 맞다고 봤다."


예산 관련해선, 마르틴 김 여사가 투자자고 미루픽처스도 일부 투자를 했다. 여러 도움을 준 스태프들의 인건비, 아카이브 영상들, 홍보 일정 소화하면서 드는 여러 비용들도 미루픽처스의 몫이었다. 특히 기본적으로 프랑스를 오가다 보니 통번역료가 다수 발생했다. 그렇게 2020년 초 프로덕션은 완전히 마무리됐다. 안타깝게도, 김창열 화백을 직접 마주하고 인사를 나눌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고 했다. 

김영 대표는 인터뷰 내내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미루픽처스는 공동 제작 파트너로서 한국 개봉 전체를 책임졌다. 그 과정에서 도움을 받은 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와 별개로 관객들의 공감도 소중했다. 특히 해외에서든 한국에서든 젊은 관객들의 호응을 확인한 것이 큰 수확이었다. 프랑스와의 합작 영화라 가능했을 경험들이었다. 

"아직 프랑스 개봉 일정은 안 잡혔는데, 시사는 몇 번 한 것 같더라. <꿀색> 개봉 때도 느꼈지만, 전 세계적으로 영화를 접하는 관객들이 느끼는 반응이 비슷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질문도 비슷하고. 해외에서 받은 상들도 감독님들께 다 의미가 있어 더 감사하다.

또 마케팅의 일환으로 성곡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했던 것도 너무 좋았다. 또 N차 관람해주시는 분들이 요청을 많이 주셨다. 영화 속 감독님 나레이션이 너무 인상깊은데 활자화 하는 건 어떻느냐고. 아직 예정인데 사진 책을 낼까도 고려 중이다."

 
 성곡미술관에서 간담회를 김영 대표(왼쪽에서 다섯 번째).

성곡미술관에서 간담회를 김영 대표(왼쪽에서 다섯 번째). ⓒ 미루픽처스

덧붙이는 글 <물방울을 그리는 남자>의 영화제 수상 및 출품 이력.

시애틀 국제영화제 48회(2022년) Asian Crossroads
피렌체 한국영화제 20회(2022년) 한국 다큐멘터리 섹션 다큐멘터리상
파지르 국제영화제 39회(2022년)
서울독립영화제 47회(2021년) 페스티벌 초이스
뉴욕 다큐멘터리영화제 12회(2021년) Kaleidoscope 경쟁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13회(2021년) 한국경쟁 신진감독상
텔아비브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3회(2021년) Arts and Culture
핫독스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8회(2021년)

물방울을그리는남자 김영 미루픽쳐스 김오안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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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작업 의뢰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등 취재기자, 영화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각본, '4.3과 친구들 영화제' 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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