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청산 흐름에 역행하는 시도가 경남 진주에서 일어나고 있다. 친일파 남인수를 기념하는 제1회 남인수 가요제가 진주연예협회(지부장 진창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
 
1991년 6월 30일자 <경향신문> 9면 우상단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해 6월 29일의 제1회 남인수 가요제는 '고(故)남인수 선생 추모사업회' 주최로 서울에서 열렸다. 같은 이름의 가요제가 진주에서 열린 것은 1996년 한글날부터였다. 그해 8월 23일자 <한겨레> 13면 좌하단은 "제1회 남인수 가요제가 오는 10월 9일 그의 고향인 진주의 국립진주박물관 앞 야외 공연장에서 열린다"고 보도했다.
 
이때부터 진주에서 열린 남인수 가요제에는 진주시의 재정 지원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친일 행적이 논란이 되면서 2008년에 이 가요제는 폐지됐다. 그랬던 것을 '대한민국 가요 100년사 황제의 귀환'이라는 타이틀과 함께 부활시키려는 움직임이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관련 기사 : 친일가수 '남인수 가요제' 부활에 사회단체 "개탄", http://omn.kr/20ilq)
 
"충성을 맹서짓는 기미토보쿠"... 남인수가 일제시대에 한 일

 
 진주연예협회는 "남인수 가요제"를 부활하겠다며 거리에 펼침막을 내걸었다.

진주연예협회는 "남인수 가요제"를 부활하겠다며 거리에 펼침막을 내걸었다. ⓒ 윤성효

 
1962년에 사망한 남인수는 3·1운동 5개월 전인 1918년 10월 18일 태어나 강문수라는 호적 이름을 갖게 됐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은 "원래 최씨 집안에서 태어나 처음 이름도 최창수였는데, 어머니가 강씨 집안으로 개가하면서 강문수로 호적에 올랐다고 한다"고 설명한다. 남인수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은 가요계에 데뷔한 지 10개월 뒤인 1936년 12월부터였다.
 
'이별의 부산정거장', '가거라 삼팔선' 등의 히트곡과 함께 '가요 황제'라는 별명을 연상시키는 남인수는 친일 음악 분야에서도 상당한 발자취를 남겼다. 일본제국주의의 세계 침략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에 일제 군국가요를 대중의 귀에 넣어주는 것이 그의 역할이었다.
 
그가 부른 군국가요에는 '혈서 지원', '병원선', '이천오백만 감격', '낭자일기', '강남의 나팔수', '그대와 나'가 있다. '그대와 나'는 제목만 봐서는 흔한 사랑 노래일 것 같지만, 사실은 일제 식민통치 이념을 선전하는 작품이다. 일본과 식민지 조선은 하나라는 내선일체 이념을 주입시키는 노래다.
 
일본어 제목이 '기미토보쿠(ぎみとぼく)'인 '그대와 나'에는 두 주인공이 등장한다. '반도 남아'와 '야마토사쿠라(일본 벚꽃)'가 그들이다. '사랑의 시'를 가리키는 아이노우타(あいのうた)란 단어가 나오는 이 노래 가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그대는 반도 남아
이내 몸은 야마토사쿠라
건설의 햇발 솟는 지평선에서
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
노래를 부릅시다 아이노우타
 
여기는 아세아다
우리들의 희망은 빛난다
따뜻이 손을 잡고 깃발 아래서
충성을 맹서 짓는 기미토보쿠
충성을 맹서 짓는 기미토보쿠
 
일본의 세계침략에 한국 남자 청년들을 참여시키고자 만든 노래였다. 일본을 여성으로 묘사하면서 한국 청년들의 지원병 참여를 유도하는 작품이었다.
 
이런 노래가 남인수의 입을 통해 대중의 귀에 흘러들어갔다. 독자층이 제한된 이광수 등의 친일 논설 혹은 작품과 비교할 때, 이런 친일 대중가요는 파급력이 훨씬 클 수밖에 없었다. 친일 문제에서 대중예술인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는 이유다.
 
남인수 가요제를 부활시키려는 측은 그가 생계형 친일파였다고 주장한다. 진주연예협회 측은 "일제의 총칼 앞에서 어쩔 수 없이 노래를 불렀을 것"이라며 "예술인들의 친일은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강제징용(강제동원)이나 위안부 피해자들을 친일파라 부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인수나 이광수 등은 친일파라 부른다. 일본에 이용당했다는 점에서는 양쪽 다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한쪽은 피해자라 부르고 한쪽은 친일파라 부른다.
 
피해자로 분류되는 쪽은 일반 대중이고, 친일파로 분류되는 쪽은 대중과 일제의 중간자들이다. 후자는 식민지 대중에 대해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기업인·대지주·관료·학자·문인뿐 아니라 대중예술인도 그런 위치에 있었다. 일제가 친일파로 끌어들이거나 자발적으로 친일파가 된 사람들은 대개 다 그런 사람들이었다.
 
일제는 한국 대중에 대해서는 위압적 태도를 보인 데 반해, 대중적 영향력을 가진 집단에 대해서는 우호적 태도를 취했다. 전쟁을 통해 한국의 시스템을 파괴한 뒤에 한국을 강점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일본은 이들의 협력 없이는 한국을 지배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이 집단을 우호세력 내지 친일세력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이들의 재산과 지위를 보장해주는 전략을 구사했다.
 
그렇기 때문에 친일파들이 일제의 총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반민족행위를 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어느 정도 압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이들은 상당 정도의 자율성을 갖고 친일행위에 가담했다. 남인수 같은 대중예술인도 다르지 않다.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 자율성 갖고 친일행위에 가담
 
 1939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남인수와 조선악극단 관련 기사.

1939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남인수와 조선악극단 관련 기사. ⓒ 동아일보 /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그 같은 자율성은 남인수와 소속사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남인수의 소속사는 오케레코드사와 조선악극단이엇다. 둘 다 친일파 이철이 운영하는 단체였다. 이 단체에 속했을 때 일어난 일을 보면, 남인수가 상당한 자율성을 누리며 활동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남인수는 위에 언급된 군국가요 음반들을 자비로 제작하지 않았다. 음반의 제작 주체는 소속사인 오케레코드사였다. 그렇기 때문에 소속사와의 관계는 남인수의 친일이 어떤 구도로 전개됐는지를 보여주는 지표가 된다.
 
남인수는 조선악극단과의 계약관계 하에서 만주나 일본 공연을 다녔다. 1939년 5월 13일자 <동아일보> 5면 좌중단은 "조선악극단은 그동안 만주 등지를 순회하고 일본 길본(吉本)흥행회사와 제휴해서 동경 공연을 하였는데"라고 한 뒤 김정구·이난영 등과 함께 남인수를 단원으로 거론했다.
 
그런데 오케레코드사 및 조선악극단은 남인수와 한솥밥을 먹은 지 3년이 되는 1940년에 그를 상대로 법적 조치에 착수했다. 그해 2월 17일자 <조선일보> 2면 중간에 따르면, 두 소속사는 남인수 등에게 내용증명 우편물을 발송했다. 남인수 등이 일본 공연과 서울 부민관 공연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게 이유였다. 일본 공연 도중에 잠적한 일과 서울 공연 때 아예 나타나지 않은 점을 문제삼았다.
 
3년 전에 한 식구가 된 사람을 상대로 법적 절차에 착수한 것은 실제로 손해배상을 받아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소속사 대표 이철은 "가수들에게 도의 관념을 너허주기 위해서"라고 법적 조치의 배경을 밝혔다. 남인수 등을 다잡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했던 것이다.
 
계약한 지 3년이나 되는 시점에 그런 조치를 취했다. 하다 하다 안 되니까 법적 절차로라도 가수들을 길들이기 위해 그렇게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전에도 이철이 남인수 등을 이끄는 일이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소속사 대표가 다루기 힘든 가수였다는 점은 남인수의 가요 활동이 상당부분은 그 자신의 자율성에 기초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소속사를 통해 이뤄진 친일 음반 발매도 그런 양상 속에서 이뤄졌으리라는 판단을 갖게 만든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이후 상황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남인수는 한 단체에 오래 전속하기보다는 특별출연 형식으로 여러 무대에 섰는데"라고 서술한다. 남인수가 소속사에 대해 고분고분한 가수가 아니었다는 느낌을 갖게 할 만한 서술이다.
 
그에 더해, 남인수의 건강 문제도 빼놓을 수 없다. 일제 침략전쟁이 절정에 달한 시점에 그는 심각한 건강 문제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일제라고 해도 무턱대고 친일을 요구하기는 힘들었다. "1940년부터 지병인 폐결핵으로 무대에서 쓰러지는 일까지 있었기 때문에 이 무렵부터 활동과 요양을 반복하는 일이 잦았다"고 위 사전은 말한다.
 
일제가 그런 환자를 억지로 세워놓고 친일 노래를 시켰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남인수가 아니더라도 자신들에게 협력하는 가수들이 많은 상황에서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을 느끼지는 못했을 것이다.
 
강요에 의해 억지 친일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내세우며 남인수 가요제 부활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그의 실제 행적과 괴리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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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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