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리에는 격동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탐구하는 중이다. 의사가 되고자 의대에 진학했지만 생각해보니 심리학이 더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다시 또 생각하니 사진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게 20대 중반이 지난 상황. 서점에서 파트타이머로 알바를 하며 사진을 배운다. 자유로이 자신의 길을 찾는 가운데 율리에는 차례로 두 명의 남자와 연애와 이별을 경험한다.
 
1_원문 제목과 한국어 제목의 좀 다른 질감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딱 전형적인 20대 요즘 여성들의 자아 찾기 로맨스가 될 테다. 적당히 사랑에 의지하고 때론 갈구하지만, 또한 온전히 거기에만 종속되고 싶지는 않은 그런 기조가 확실하다. 요즘 드물지 않게 대중문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21세기 여성 연애사. 딱 그런 전형처럼 다가온다. 영화 제목만 봐도 느낌이 팍 오지 않는가.
 
하지만 이 스토리 짐작 가능한 제목은 실은 한국어 의역에 가깝다. 노르웨이어와 영어 원제목을 직역해 보면 '세계 최악의 사람'이란 뜻에 더 가깝다. 그렇게 두 제목은 미묘하게 결이 다른데 한국어 제목이 통속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변형에 보다 가까운 느낌이라면, 원문 제목은 주인공 율리에의 자아를 찾는 과정에 확실하게 초점이 맞춰지기 때문이다. 남녀 간 연애에 종속되느냐, 그저 그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자아를 찾는 과정에 필요한 성찰을 쌓느냐, 둘 중 본 명백히 본 작품은 후자를 지향하고 있다.
 
물론 영화는 율리에의 방황을 무조건 긍정하지는 않는다. 현실 율리에의 상대방이 된다면 어떤 이로선 정말 힘들고 괴로워할 상황들이 영화 속에서 속출한다. 제멋대로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심한 말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율리에는 강렬히 뭔가를 원하지만 자신의 안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자신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현실에 정체되는 안주가 싫을 뿐이다. 그렇게 자신을 불살라 가면서 율리에는 모험을 이어간다. 그 여정에서 새로운 사람과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고 상처받고 상처 입힌다.
 
그런 일련의 사건사고들은 영화를 보는 개개인의 주관적 경험에 따라 즉자적으로는 호불호가 심하게 갈릴 수 있겠지만, 차분하게 관객 각자가 자신의 지난 기억을 되짚어가며 돌아보게 된다면 씁쓸한 웃음과 함께 자기 연애를 반추하게 만드는 마력으로 변신할 듯하다. 그만큼 이 영화 속 주인공이 겪는 시간은 비슷한 시기를 보낸 이들에겐 각자의 현실을 투영하는 거울처럼 반응한다.
 
2_율리에와 주변인물들이 펼치는 12개의 단막극 에피소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감독은 마치 장편소설 구성처럼 영화를 프롤로그와 1부터 12까지의 개별 장, 그리고 에필로그로 전체 14등분을 시켜놓는다. 영화는 두 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만만하지 않은 분량이지만 그런 세분화된 분할 덕분에 10분 전후의 단막극을 연극 공연이 이뤄지는 극장에서 관람하는 기분으로 다가올 테다.

또한 매 장마다 해당 에피소드의 주제를 압축한 소제목이 붙어 있기에 마치 감독이 친절한 가이드가 된 것처럼 관객은 율리에의 모험을 따라갈 수 있다. 눈썰미 빠른 이들이라면 소제목의 조합만으로도 줄거리의 향방을 절반 이상은 간파할 수 있을 만큼, 배배꼬이지 않는 담백한 구성이다.
 
프롤로그
제1장. 다른 사람들
제2장. 바람피우기
제3장. #미투 시대 속 오럴섹스
제4장. 우리만의 가족
제5장. 타이밍이 나빴다
제6장. 핀마르크 고원
제7장. 새로운 단계
제8장. 율리에의 자아도취적 곡예
제9장. 크리스마스를 망친 밥캣
제10장. 일인칭 단수
제11장. 양성 반응
제12장. 모든 것엔 끝이 있다
에필로그
 
또한 에피소드의 일부는 주인공 율리에가 아닌 악셀이나 에이빈드, 그리고 그들 주변 지인들이 중심이 되어 풀어내준다. 그런 변주를 통해 로맨스의 기본 얼개를 가진 영화임에도 이야기 속에서 상당히 다양한 사회적 주제와 쟁점들이 언급되고 다뤄진다. 특히나 세대 간 단절, 페미니즘과 젠더 관련 갈등이 영화 내내 담론으로 연속되면서 주인공의 연애와 화학적 결합을 구현한다. 환경생태 문제와 PC주의, 예술 표현과 검열에 관한 쟁점도 등장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공과 사의 영역을 교차시켜 이야기를 무척이나 풍성하게 확장해낸다. 자연스럽게 21세기 여성의 연애사와 현대사회 현안들이 교차해가며 연결된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서서히 사회적으로 담론화되고 있는 쟁점들, 하지만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에선 주요한 정치적 담론으로 논쟁되는 이슈들이 특정 에피소드들에서 풍부하게 등장한다. 심각한 정치사회 드라마의 방식과는 다르게 풍자성이 강하지만 저 동네에선 연애하면서 저런 게 문제가 되는구나 싶은 지점들이 적지 않다. 일방이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며 살다보니 그에 맞춰 자신의 취향을 바꾼 상대가 파트너와 이별한 뒤에도 관성적으로 여전히 바뀐 취향을 지속한다거나, 그로 인해 현재의 파트너와 언쟁하게 되는 과정은 지극히 현실적인 연애 다툼으로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반면에 주인공이 겪는 2세 출산에 대한 고민은 어딜 가나 문제로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오게 만드는 쟁점이다. 임신과 자녀에 대한 입장에서 율리에가 만난 두 남자가 서로 다른 세대와 조건 때문에 상반되는 태도를 취하는 지점은 근래 한국사회에서도 거론되는 주제이므로 퍽 호환성이 높다. 40대가 넘어 성공한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능력을 갖춘 '구세대' 악셀은 더 늦기 전에 2세를 얻고 싶지만 율리에와 또래인 20대 후반의 비정규직 에이빈드는 자녀에 대한 생각이 없다. 예전 파트너의 급진주의 환경운동에 영향을 받기도 했고 경제적 조건도 문제가 된다. 자연스럽게 세대 차이를 통한 시대상의 변화를 드러내는 아이템이다.
 
3_주인공이 연애를 통해 도달하게 된 자리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그린나래미디어㈜

 
율리에는 다방면에 재능이 있고 매력이 넘치지만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과 방향을 정하지 못한 채 부유하는 존재다. 그녀는 이상적인 상대를 만나 연애하는 것으로 안전판을 구하지만 끝내 거기에 안주하지는 못한다. 첫 번째 연인 악셀은 나이차가 많은 성숙하고 지적인 사람이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작가인 그와 함께하는 동안 율리에는 안정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그녀가 접하지 못했던 세계와 접촉한다.

하지만 한 세대 위인 악셀은 그녀에게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자고 권유하고, 여러 면에서 완성형의 우월한 조건을 가진 악셀과의 관계에서 율리에는 늘 자신이 조연이자 객체라는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녀가 끊임없이 조건을 파괴하고 추구하려는 무엇인가 마음속의 불씨와 악셀과의 동거는 서로 공존할 수 없다.
 
그런 와중에 율리에는 또래의 에이빈드와 우연히 만난다. 둘은 '바람' 아닌 '바람'을 공유하며 인상을 남기고 훗날 재회하게 된다. 에이빈드는 악셀과 다정함은 공유하지만, 평범한 카페 점원이라는 차이점은 율리에가 악셀에게 느끼던 열등감을 잊게 해주고 좀 더 편안한 관계를 제공한다. 하지만 그녀는 에이빈드와의 연애 중에도 종종 악셀과의 추억을 떠올린다. 그런 정신적 방황과 때로는 바람이 이어지지만 율리에에게 그런 순간들은 쾌락을 쫓기보단 자신을 완성시킬 퍼즐을 맞추는 과정에 가깝다.
 
과연 영화 속에서 몇 년 간 등장하는 율리에의 궤적은 과연 어떤 마무리를 맺을까? 답은 극장에서 직접 찾아보길 권한다. 혼자 생각에 잠겨가며 봐도 괜찮겠지만, 기왕이면 서로 온갖 것 다 꺼내놓고 공유하는 또래 친구들과 함께 보면 감흥이 두배 세배로 뛰어오를 영화다. 극장문을 나선 뒤 일행이 함께 커피 한잔 또는 맥주 한 캔 나누며 작품 본 소감을 토론한다면 이 영화를 누리기 위한 최적의 환경이 될 테다.
 
'달콤 쌉싸름한' 어른의 연애역사 이야기이지만 마술적인 효과가 탄성을 지르게 만들 장면들이 몇 차례 등장한다. 판타지풍 이미지들의 향연이지만 마술적 리얼리즘에 가까운 연출들이다. 이 몇몇 순간들은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그저 눈요기가 아니라 주인공의 감정이 향하는 결정적 전환점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힘으로 작동한다. 그런 지점에서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들과는 다른 각도로 무척이나 '시네마틱'한 체험을 안겨준다. 뻔해 보이는 소재들만 갖고 단맛 짠맛 쓴맛 골고루 절묘하게 조합해 맛깔나게 완성하는 솜씨가 대단하다. 로맨스 드라마라고 얕보다간 큰코다칠 다크호스 같은 영화다.
 
<작품정보>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The Worst Person in the World, Verdens verste menneske
2021|노르웨이,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코미디/드라마
2022.08.25. 개봉|128분|15세 관람가
감독 요아킴 트리에
주연 레나테 레인스베(율리에 역)
출연 앤더스 다니엘슨 리(악셀 역), 헤르베르트 노르드룸(에이빈드 역),
마리아 그라지아 디 메오(수니바 역), 한스 올라브 브레너(올레 마그너스 역)
수입 그린나래미디어㈜
배급 그린나래미디어㈜
공동배급 하이, 스트레인저
제공 하이, 스트레인저
 
2021 칸영화제 여우주연상(레나테 레인스베)
2021 시카고국제영화제 실버휴고 촬영상-국제경쟁(캐스퍼 툭센)
2021 뉴욕비평가협회상 외국어영화상
2021 미국비평가협회상 외국어영화 톱5
2021 포틀랜드비평가협회상 외국어영화상
2021 보스턴온라인비평가협회상 국제장편영화상
2022 벤쿠버비평가협회상 외국어영화상
2022 뤼미에르영화제 국제공동제작상
2022 전미비평가협회상 남우조연상(앤더스 다니엘슨 리)
2022 아만다어워즈(노르웨이 아카데미상) 작품상,
      각본상(요아킴 트리에&에스킬 보그트),
     여우주연상(레나테 레인스베), 남우조연상(안데스 다니엘슨 리), 관객상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요아킴 트리에 레나테 레인스베 앤더스 다니엘슨 리 헤르베르트 노르드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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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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