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일링 포인트> 포스터

영화 <보일링 포인트> 포스터 ⓒ (주)이놀미디어


1_'셰프'와 '맛집' 열풍의 명과 암
 
영상미디어의 범람과 함께 사회적 현상으로 '먹방'-'맛집'-'셰프'의 르네상스가 일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식업 붐이 발생했고 현재까지도 그 여파는 지속되는 중이다. 따스한 밥 한 끼 먹기에는 물가가 올라서 지갑사정을 걱정해야 하고, 밥 같이 먹을 동료가 없어 혼밥이 대세가 되어가는데다, 방송만 봐도 지극히 순화된 수준이지만 주방일과 요식업이 난이도 만만찮다는 게 빤히 드러나는데도 그렇다.
 
특히 셰프라는 직업은 그 속사정은 어떻든 간에 방송의 주목과 함께 사회적 지위가 괄목상대라 할 만큼 당당한 전문직으로 승격된 상황이다. 스타가 연이어 탄생하고 기존의 답답한 조직사회에서 자기 개성을 죽이지 않고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는 꿈의 직업처럼 비춰질 정도로. 이런 경향은 반가운 점도 분명히 있다. 모두가 '사'짜 돌림이나 공무원에만 올인 하는 것보다야 다양한 분야별 전문가, 현대판 '장인'들이 우대받는 건 바람직한 측면이다.
 
하지만 지나치게 미디어에 의존하는 측면과 함께 현재 한국사회의 고질적 문제인 과정은 무시한 채 결과, 즉 부와 명성에 편중되는 평가기준은 셰프란 직업군에도 그늘을 드리운다. 그들이 치러야 하는 장기간의 도제 수련과 고충은 간과되고 부각되기 좋은 지점만 콕 짚어내어 팔리기 좋게 포장되는 일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맛집 프로그램들이 밟았던 문제점의 전철은 큰 차이 없이 그대로 다시 반복되는 셈이다.
 
2_금요일 밤의 열기 속으로, 가마솥이 끓는다!
 
여기에 현실의 셰프와 그들의 전쟁터인 주방을 리얼리티 다큐 쇼 프로그램 방식을 도입해 픽션으로 실제 현실을 모사, 아니 하이퍼텍스트로 모사하려는 야심 충만한 시도가 등장했다. 배우로 꾸준히 활동해 온 필립 바랜티니 감독이 자신의 동명 제목 단편을 확장해 선보인 <보일링 포인트>다. 제목은 바로 직역하면 '끓는 점', 99°에서 100°로 넘어가기 딱 직전의 상태를 지칭한다. 아주 정직한 제목이다. 그리고 영화는 제목 그대로 예정된 비등점을 향해 논스톱으로 일 방향 외길 직진한다. 브레이크도 휴식도 일절 없다. 정말 끝까지 영화는 뒤도 안돌아보고 내내 달린다.
 
영화의 시작은 불금 저녁이자 크리스마스 전야. 레스토랑은 바쁘게 오픈 준비 중이다. 그냥 평소처럼이라도 분주하기 짝이 없을 게 빤한 설정이다.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좀 더 예민하게 다가온다. 주방에 공무원이 출동했다. 위생관리관이다. 게다가 위생상태 평점을 5점 만점에서 3점 처리하겠다고 한다. 만회하려면 3개월 후 재점검을 받아야만 한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처럼 재앙이 날아든 셈이다.
 
게다가 수석셰프인 앤디는 이미 가족과 통화하며 출근하는 길에 시달려온 상태다. 식당 분위기는 어수선하고 위생 점검 때문에 들쑤셔놔서 당최 정리가 안 되는 상황. 하지만 앤디가 추스를 틈도 없이 위생관리관과의 면담, 스태프들과의 체크, 거기에다 전 직원이 참여하는 회의, 마지막으로 인스타그램 게시용 단체 샷. 그야말로 매일 그랬듯이 정해진 일정대로 어김없이 꼬박꼬박 진도는 나가야 한다. 그리고 모두가 예상한 바대로 금요일 밤의 광란이 펼쳐진다.
 
영화는 놀라운 수준으로 런던의 예약제 고급 레스토랑 풍경을 재연해낸다. 리얼리티 프로에 도전하려는 듯 극 사실주의로 펼쳐 보이는 레스토랑의 구석구석 풍경을 통해 정교한 기계의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과정이 마치 파도가 연쇄적으로 몰아치듯 펼쳐지기에 관객은 실제 자신이 탐방기를 작성하는 기분으로 견학 체험하듯 영화와 직면하는 셈이다. 스포츠 시합에서 혹독한 훈련과 팀워크 조화의 결과로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패스와 수비 플레이를 목격하는 기분이 절로 들 것이다. 대체 연기자와 스태프들을 얼마나 숙련시켰기에 가능한 것일까 궁금해 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어떤 제작과정을 거쳐 온 걸까?
 
3_일찍 나는 새가 벌레를 잡는다! 장난 아닌 준비과정
 
 영화 <보일링 포인트> 스틸

영화 <보일링 포인트> 스틸 ⓒ (주)이놀미디어

 
우선 감독이 셰프 경력이 있다. 배우 경력으로도 사반세기가 넘는 경력자이지만 오랜 세월 조‧단역을 거쳤기에 생계를 위해서 배우활동과 겸업해 여러 식당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미슐랭 가이드에 등재된 유명 레스토랑에서도 일했고 자신이 셰프로 요리를 책임질 정도의 업계 사람인 셈이다. 그리고 촬영장 역시 실제 감독의 지인이 운영하는 식당을 활용했다고 한다. 자기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주제가 자전적 경험에 의거한 것이기에 재현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배우들도 실제 여러 셰프와 관련분야 전문가들의 지도로 배역을 소화하기 위한 준비를 착실히 수행했다.
 
그런 충분한 숙지과정을 거친 후 신뢰를 바탕으로 감독은 지나치게 꽉 짜인 시나리오 대신 장면별 기본 설정만 지정한 후 상당부분 자유연기로 대부분을 처리했다고 한다. 역할 롤을 주지한 뒤에는 롤을 소화하는 건 재량껏 맡기는 임무형 준비태세를 실행한 셈이다. 그리고 영화의 치열한 분위기와 스릴감을 획득하기 위한 마지막 카드가 남았다. 원테이크 촬영이다. 즉 이 영화는 딱 한 번에 전체 장면이 이어지게 촬영한 결과물이다. 중간에 작은 미스라도 발생하면 모든 게 원점으로 돌아가야 하는 도박에 가까운 승부수를 1시간반짜리 장편에 도입한 것이다. 예술영화 거장이라 인정받는 이들이 거대한 야심을 갖고 평생 한번 도전할까 말까 하는 모험을 아직 신예에 속하는 경력 짧은 감독이 도전한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분명히 레스토랑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구석구석까지 다룬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 원테이크 촬영을 게다가 핸드 헬드 기법으로 감행해버린 것이다. 삼가 촬영 팀에 애도를... 두 시간 가까이 카메라 스태프는 장거리 전력 질주하듯 어깨에 카메라를 맨 채 끊임없이 뛰어다녀야 했던 것이다.
 
그런 처절한 수난 덕분에 <보일링 포인트>는 놀라운 현장감으로 마치 시사고발이나 현장추적 뉴스영상을 보는 듯 감각으로 영화 내내 긴장과 초조를 유지시킨다. 관객은 속속 바통 터치하듯 등짝에서 등짝으로 이어지는 등장인물들 각자의 행적을 놓치지 않고 추적해야 한다. 어느새 배우와 스태프와 관객 삼자가 집중력 대결을 벌이는 기분이다. 스크린 안팎은 어느 순간부터 과연 누가 먼저 쓰러지거나 길을 잃어버리느냐를 둔 결투의 현장, 콜로세움 투기장으로 변신한다.
 
4_'키친 서스펜스'라는 장르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게
 
그런 단호한 각오와 결사의 준비태세로 완성된 영화가 관객 앞에 거를 타자 한명 없이 속속 전개된다. 필수재료는 떨어지고 스태프는 지각하거나 일이 서툴다. 접객 팀은 예약을 초과 접수해놓고 중요한 공지사항은 빼먹고 알려주지 않는다. 직원들은 예민해져 있고 이럴 때일수록 묵혀왔던 감정이 끓어올라 분출하기 딱 좋은 상황이 조성된다. 베테랑 스태프들은 능란하게 일을 처리하며 평상심을 유지하지만 신참과 말단들은 취약성을 노출시키기 일쑤다.
 
파트별 책임자들은 투덜거리면서도 제 몫을 해낸다. 하지만 서비스업계 저임금 문제가 글로벌한 공통사항이라 그런지 뺀들거리는 스태프들이 자연스러운 순환을 가로막고 동맥경화를 초래한다. 여기에 진상 손님들도 속속 출현한다. 직원을 아랫사람 부리듯 하대하거나 알량한 팔로워 숫자로 공짜 서비스를 요구하거나 노골적으로 외모차별을 일삼는 풍경이 이어진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영국이나 한국이나 SNS 병폐는 다 똑같이 겪고 있구나 하고 쓴웃음 지을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앤디와 칼리는 스태프들 지휘하랴 다툼 일어나면 말리랴 난제가 터지면 수습하랴 동분서주해야 한다. 그래도 제법 이골이 난 주방인지라 어찌어찌 처치하는 것 같다. 그런 사건해결의 순간순간이 이 레스토랑 시스템의 탄력성을 증명하는 듯 펼쳐지면서 관객은 어느 순간부터는 영화 속 시점인 크리스마스에 어울리게 훈훈한 결말이 오기를 기대하며 살짝 방심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결국 위기는 주인공 앤디의 내면에 어둠의 씨앗을 심어두고 있던 곳에서 발화한다.
 
앤디는 썩 풀리지 않는 가정사와 과도한 업무로 인해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다. 수셰프 칼리가 그의 상태를 파악하고 도우려 애쓰지만 수석셰프라는 자리가 앤디에게 주는 중압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우리가 연상하는 스타 셰프의 전형적 이미지처럼 그도 한 성깔 한 입담 하지만 언어폭력의 경계선을 넘나드는 모모 셰프들에 비하면 앤디는 마음이 꽤나 여린 편이다. 타인에게 전가하기보다는 스스로 감당하려는 기본태도는 더 큰 스트레스를 그에게 안긴다.
 
5_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
 
 영화 <보일링 포인트> 스틸

영화 <보일링 포인트> 스틸 ⓒ (주)이놀미디어

 
그런 그에게 불청객처럼 과거 동업자인 유명 셰프가 요리평론가를 대동하고 등장한다. 앤디는 많은 게 걸린 레스토랑 운영 때문에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개인적인 자존심도 걸린 문제다. 그의 긴장도는 99.9°는 이미 도달한 듯 보인다. 그리고 한번 끓어오르기 시작하면 왜 증기기관이 발명되었는지 이해하게 될 만큼 아무리 덮으려 해도 불가능할 정도로 넘쳐흐르는 증기의 기세처럼 앤디에게 비등점이 가까워진다.
 
앤디는 서서히 펀치 드렁크 증상처럼 상황에 무감각해져간다. 몇 달 전부터 거듭된 과로와 주변 신상 문제로 그가 술에 의지해 왔다는 암시가 영화에서 줄곧 등장했던 게 점점 실감나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사람에겐 누구나 심리적 한계선이 존재하게 마련. 앤디는 내우외환에 직면하며 모든 걸 다 부여잡고 버텨 보려다 그로기 상태에 몰린다. 팽팽하던 매듭이 갑자기 느슨해지기 시작한다. 그에게 벗어날 수 없어 보이는 위기가 찾아온다. 과연 앤디와 레스토랑의 운명은 어떤 결말을 맞이할 것인가?

그렇게 모든 상황이 종결되고 엔딩 크레디트가 천천히 흐른다. 많은 이들이 결말을 확인하고 객석을 떠날 시점.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극소수의,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관객들을 위한 감독의 마지막 인사가 등장할 차례다. 한컷의 사진이 오른다. 많은 걸 생각나게 하는 대목이다. 명과 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최선의 의도와 그에 반드시 상응하지 않는 결말의 우연성까지 순식간에 영화 전체가 떠올랐다 사라지는 순간이다. 
 
갑자기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에게는 땅이 얼마나 필요한가?'가 떠올랐다. 물론 앤디가 남들이 보기에 감당 못할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는다. 다만 그는 성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무리하게 과로하는 평범한 자영업자일 뿐이다. 그가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한, 우리 주변에서 목격하기 어렵지 않은 존재이기에 앤디가 겪는 고초는 안쓰러움으로 관객에게 전이된다. 저렇게 과로하면 못 견딜 텐데. 좀 쉬어야 할 텐데. 그런 관객의 불안과 연민이 소스 드레싱처럼 범벅되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셰프 열풍의 금박장식처럼 빛나는 이면에 가득할 '달의 어두운 면'을 제대로 체감하게 해주는 '안티테제' 격의 작품이다.
보일링 포인트 필립 바랜티니 감독 스티븐 그래이엄 비넷 로빈슨 키친 서스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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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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