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역사에서 동서양의 충돌은 수차례 반복되어 왔다. 현재의 미국-중국 대립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동서양 충돌은 바로 그리스와 페르시아 전쟁을 꼽을 수 있다. 이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 < 300 >은 세계적으로 큰 화제를 모으며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다.
 
6월 14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에서는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중심으로 돌아본 동서양간 대립의 역사를 조명했다. 서양 고전학 전문가인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강연자로 나섰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 300 >에서 페르시아는 이른바 야만적인 침략자로서 악역으로 묘사된다. 하지만 이는 서양인의 시각에서 만들어낸 편견에 가깝다.
 
페르시아는 지금의 이란 남부 지역에 건국되어 초기에는 작은 세력이었으나, 키로스 2세에서 다레이오스(다리우스) 1세 시대를 거치며 꾸준히 영토를 확장하면서 기원전 500년경에는 서아시아를 통합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일부 지역까지 아우르는 대제국으로 올라섰다.
 
다레이오스 1세는 넓어진 제국의 원활한 통치와 정보망 구축을 위하여 기원전 6세기에 벌써 '왕의 길'로 불리우는 약 2700km에 이르는 도로망을 건설했다. 그리고 각지에 측근들을 파견하여 왕은 궁 안에서도 각 지역의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하고 확보할 수 있게 되어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가능해졌다.
 
또한 페르시아는 당대로서는 상당히 발전한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황금으로 만든 술잔과 그릇에서 볼 수 있듯 황금 순도 95%를 넘길 만큼 뛰어난 금주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고, 또한 금으로 만든 화폐를 중심으로 화폐제도가 운영되기도 했다. 당시 페르시아가 영화 속 왜곡된 이미지같은 야만인은 커녕, 경제-문화-문명 등에서 당대 서구권보다 훨씬 더 발달한 대제국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장면들이다.
 
이처럼 거대한 통일왕국이었던 페르시아에 비하여 동시대의 그리스는 무려 1000여개의 독립된 폴리스(도시)로 나뉘어진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당대의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처럼 통일왕국을 세우겠다는 생각도, 독립적인 정치체제를 갖춰서 공동체의식도 거의 없었다.
 
서쪽으로 점점 팽창하는 페르시아와 그리스는 필연적으로 충돌이 불가피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은 처음에는 페르시아에 조공을 바치며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다.

기원전 499년,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운명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페르시아의 영향력에 있던 밀레토스가 반란을 일으켜 그리스 폴리스들에 지원을 요청한다.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페르시아 반란세력에 동참하여 사르디스를 점령하고 불태웠다.
 
분노한 페르시아는 복수를 다짐한다. 기원전 492년 다레이오스 1세가 파견한 첫 원정함대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침몰했지만, 페르시아의 침공에 겁을 먹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에게 협상 사절을 보내서 항복을 의미하는 '물과 흙'을 바치도록 요구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페르시아의 요구를 수락했지만 유이하게 거절한 것이 바로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두 나라는 페르시아 사절단을 전원 처형해버렸다. 이에 격분한 다레이오스는 대규모 함대를 보내 두 번째로 그리스를 침공한다. 바로 제 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다.

페르시아는 아테네가 주도한 그리스 연합군과 기원전 490년 마라톤 평원에서 드디어 정면으로 충돌한다. 2만 5천에 이르는 페르시아군에 맞서 1만의 그리스 연합군을 이끈 명장 밀티아네스는 양익 포위 전술을 통하여 페르시아군을 대파한다.

병력을 균일하게 배치한 페르시아군과 달리, 그리스 연합군는 중앙은 가볍게 좌우는 두텁게 방진을 구성했다. 아테네군은 빠른 기동력으로 페르시아 궁수들의 화살 공격을 무력화시킨 후 두텁게 배치한 좌우에서부터 페르시아군을 밀어붙였다. 얇게 배치한 중앙으로 깊숙이 들어왔던 페르시아군은 좌우에서 승기를 잡고 돌아온 그리스 연합군에게 사방이 포위되는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의 사상자는 약 200여 명에 불과했지만 페르시아는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 패색이 짙던 전쟁에서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고 그리스군의 전령이 아테네로 돌아와 승전보를 전한 에피소드에서 올림픽 정식종목인 마라톤이 탄생했다.

마라톤 전투의 역사적 배경 때문에 이란은 한때 올림픽 마라톤에 참가하지 않는다는 루머가 퍼지기도 했다. 이란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마라톤을 정식종목에서 제외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는 마라톤에 참가할 선수가 없었던 이란의 내부 사정 때문이었고 현재는 모든 스포츠 이벤트마다 마라톤에 정식으로 참가하고 있다고.
 
다레이오스는 참담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지만 갑작스럽게 사망하게 되면서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뒤를 이어 즉위한다. 바로 < 300 >에서 "나는 관대하다"는 명대사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바로 그 인물이다. 영화에서 아프리카인이나 사이비이비 교주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묘사로 인하여 왜곡이 가장 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마라톤 전투로부터 10년 후, 아버지의 유지를 이은 크세르크세스는 본인이 대군을 이끌고 직접 그리스 원정에 나선다.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크세르크세스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스파르타였다.
 
아테네가 항복을 요구하는 페르시아 사절단을 재판을 통하여 처형했다면 스파르타는 "물과 흙을 원한다면 마음껏 가져가라"며 우물속에 던져버렸다고. 영화 < 300 >에서는 레오니다스가 스파르타 사신을 발로 걷어차며 "This is sparta. (여기는 스파르타다)"라고 포효하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스파르타는 시민(전사)-평민(페리오이코이)-노예(헤일로타이) 계급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6%에 불과한 소수의 상류층이 이끌어가는 폐쇄적인 사회 구조였다. 헤라클레스의 후손을 자처한 스파르타인들은 용맹함과 강인함을 중시했고 사회적으로 훌륭한 전사가 되는 것을 추구했다. 태어날 때부터 전사로 키우기에 병약하다고 여겨지는 병악한 아이들을 가차없이 죽이는 유아 살해 관습이 존재할 정도였다. 늑대들로 가득한 절벽 아래 아이를 버리는 곳을 '아포테타이(버려두는 곳)'라고 불렀다.
 
또한 신생아 검사를 통과한 남자아이들은 7세부터 20세까지 아고게라고 하는 혹독한 군사훈련 교육과정을 매일 10시간씩 거쳤다. 여기에서 혹독한 훈련이나 교육을 의미하는 '스파르타식'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정작 현지인 그리스에서는 오늘날 스파르타하면 '대단한 군인'이라는 이미지 정도를 연상한다고.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페르시아와의 결전을 앞두고 아폴론 신전을 찾아 파티야 여사제로부터 예언을 듣는다. 전쟁에 나서지 않으면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할 것이고, 전쟁을 선택하면 레오니다스는 전사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오니다스는 전투에 나서서 스파르타와 그리스를 지키는 길을 선택한다.
 
레오니다스는 자신이 죽어도 대를 이을 아들이 있는 300인의 전사들로 결사대를 구성한다. 스파르타군은 육로로 북쪽에서 침공해오는 페르시아군을 상대하기에 지형적으로 유리한 테르모퓔라이를 전장으로 선택했다. 좌측의 가파른 산과 우측의 해안 사이에서 둘러싸인 좁은 지형은 소수 병력의 방어에 최적화된 곳이었다.
 
영화와 대중매체는 양군의 전력차가 300대 100만으로 알려졌지만, 역사가들은 실제 페르시아군의 전력을 약 20만~25만, 스파르타는 그리스 연합군을 포함하여 7천명 정도의 병력으로 추정하고 있다. 

크세르크세스의 항복제안을 거절한 레오니다스는 방패와 창을 든 병사들을 밀집대형으로 배치하는 '팔랑크스' 전술로 두터운 방패벽을 형성한다. 페르시아는 '불사부대'로 불리우던 최정예병력인 이모탈까지 투입했으나 그리스 연합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넓은 지형에서의 전투에만 익숙했던 페르시아군은 익숙하지 않은 좁은 지역에서의 근접전에 고전을 면치 못한 것.
 
하지만 그리스의 배신자 에피알테스가 크세르크세스가 테르모퓔라이를 우회할 수 있는 다른 공격로를 누설했고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군에게 앞뒤로 포위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다. 에피알테스의 이름은 이후 그리스에서 '악몽'이라는 단어의 유래가 되었다고.
 
위기에 몰린 레오니다스의 마지막 결단은 후방을 지키는 것도 후퇴하는 것도 아닌, 바로 그 자리에서의 옥쇄였다. 어차피 페르시아 대군을 상대로 넓은 지형에서의 싸움은 더 이상 방어의 이점이 없었고, 도망치더라도 전멸 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하에, 차라리 전멸 당하더라도 싸우다 죽는 길을 선택한 것. "방패를 들고 오든가(이겨서 오거나), 방패에 실려서 오든가(명예롭게 죽거나)"라는 스파르타의 노래처럼 명예를 중시한 스파르타인다운 선택이었다.
 
레오니다스는 자신과 친위대 300명만 협곡에 남기고 그리스 연합군을 후퇴시킨다. 결국 레오니다스와 전사들은 모두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쟁에 나서기 전 아폴론 신전에서 들었던 예언들이 그대로 현실이 됐다. 쉽게 승리할 것이라고 예상했던 크세르크세스는 승리에도 분노를 참지 못했다고. 레오니다스는 오늘날에도 그리스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최후는 그리스 연합군의 항전 의지를 더욱 공고하게 다지는 계기가 됐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tvN

 
페르시아군은 승전의 여세를 몰아 아테네로 진군했으나 아테네인들은 이미 도시를 비우고 인근의 살라미스 섬으로 모두 피신한 상태였다.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육지에서는 페르시아군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고 해전으로 끌어내는 승부수를 던진다.

테미스토클레스는 크세르크세스에 거짓 항복으로 충성을 맹세하고 방심한 페르시아 대함대를 살라미스의 해협으로 불러들인다. 이 전투가 인류 최초의 해전이자 지금도 세계 3대 해전으로 불리우는 살라미스 해전이다.
 
그리스군은 지형과 함선의 이점을 활용하여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해협으로 유도하여 청동 충각을 앞세운 돌격전으로 페르시아의 배들을 격파한다. 앞으로는 그리스 함대에 공격을 당하고 뒤에서는 공을 세우기 위해 몰려든 페르시아 함대끼리 연쇄적으로 충돌하여 진퇴양난에 빠진다.

결국 페르시아는 압도적인 전력의 우위에도 참담하게 패배하고 만다. 그리스는 "아테네의 국가적 영웅 테세우스의 혼령이 그리스를 가호했다"며 인간의 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기적적인 승리를 자축했다.
 
크세르크세스는 결국 철군을 결정하며 그리스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강성했던 페르시아 제국도 조금씩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그리스는 점차 확장을 거듭하게 되고 이후 등장하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시대에는 통일왕국을 건설하며 오히려 페르시아를 정복하기에 이른다. 세계문명의 주도권이 동양에서 서양으로 넘어오는 결정적 계기가 된 장면이다.
 
이때부터 현재까지 세계의 주도권은 서구권이 잡고있는 상태다. 현재의 우리가 세계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서양의 관점에서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영화 < 300 >에서 페르시아나 동양에 대해서 미개하거나 기괴하게 묘사된 편항적인 이미지를 덧씌운 것도, 서구 중심의 오리엔탈리즘과 무관하지 않다.

역사의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하지만 세계화된 현대에서는, 더이상 승자와 패자의 구분없이 모두의 시각에서 역사를 균형있게 바라보는 것이 가능해졌다. 다양한 시각에서 서로를 좀더 이해하고 협력하는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역사가 주는 교훈을 얻고 진정한 평화에도 한걸음 더 다가설수 있지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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