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0년대 군사정권 시절에는 어린이 및 학생들의 반공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나라에서 적극적으로 '웅변'을 장려했다. 이 때문에 전국 곳곳에서는 '반공'을 주제로 한 웅변대회들이 수시로 개최됐고 꽤 많은 학생들이 웅변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남북관계가 화해무드로 바뀌면서 웅변학원은 점점 줄어 들었고 몇몇 웅변학원들은 현재 '스피치 학원'으로 이름을 바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반공의식고취'라는 목적을 한 꺼풀 벗겨내면 웅변은 자라나는 학생들이 배워두면 그리 나쁠 게 없는 과목(?)이다. 어린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확한 발성과 발음, 그리고 확실한 논리와 풍부한 감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을 연습해두면 대학진학 후 조별과제 발표나 사회에 나나서 사업계획서를 발표할 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다 못해 회식자리에서 건배사를 제안할 때도 웅변 경험은 충분히 빛을 발할 수 있다.

특히 대중 앞에서 긴 시간 말을 해야 할 일이 많은 정치인들에게 연설은 필수적으로 익혀야 할 항목이다. 취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대한민국의 대통령 당선인도 하루에 꽤 많은 시간을 들여 연설 전문가들로부터 취임사 개인교습을 받을 것이다. 지난 2011년에 개봉해 그 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주요 4개 부문을 휩쓴 영화 <킹스 스피치>는 말을 더듬는 약점을 극복하고 대중 연설에 성공한 영국 국왕 조지6세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1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킹스 스피치>는 무려 제작비의 28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1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진 <킹스 스피치>는 무려 제작비의 28배가 넘는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 (주)화앤담이엔티

 
영국을 대표하는 점잖은 신사배우

영국과 이탈리아 국적을 모두 가지고 있는 배우 콜린 퍼스는 1984년 동성애를 다룬 영화 <어나더 컨트리>로 데뷔해 호평을 받았고 영화와 드라마,연극을 넘나들며 활동했다. 그러던 1995년 퍼스는 TV드라마 <오만과 편견>에서 미스터 다아시를 연기하며 영국의 인기배우로 급부상했고 1996년 <잉글리쉬 페이션트>, 1998년 <셰익스피어 인 러브>에 출연하며 착실하게 필모그라피를 쌓아 나갔다.

퍼스가 세계 관객들에게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 작품은 역시 2001년 르네 젤위거,휴 그랜트와 함께 했던 <브리짓 존스의 일기>였다(퍼스는 2016년 3편까지 이어진 <브리짓 존스> 시리즈에 모두 개근했다). 이후 <러브 액츄얼리>,<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브리짓 존스의 일기-열정과 애정>에 출연한 퍼스는 '로맨스 전문배우'로 이미지가 굳어지는 것을 경계해 스릴러와 코미디,판타지 액션 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했다.

그렇게 영국을 대표하는 신사배우로 활약하던 퍼스는 2010년 톰 후퍼 감독의 <킹스 스피치>에서 말을 더듬는 콤플렉스를 가진 영국의 조지 6세 국왕을 연기했다. 조지 6세가 라이오넬 로그(제프리 러쉬 분)라는 언어치료사를 만나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멋진 연설을 하는 영화 <킹스 스피치>는 1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만들어져 세계적으로 4억2700만 달러의 놀라운 흥행성적을 기록했다(박스오피스 모조 기준).

<킹스 스피치>는 201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무려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돼 작품상과 남우주연상,감독상,각본상 등 주요 4개 부문을 쓸어 담았다. 물론 <킹스 스피치>는 <소셜 네트워크>와 <파이터>,<블랙스완> 같은 쟁쟁한 작품들을 제치고 작품상을 수상해 논란도 적지 않았지만 콜린 퍼스의 남우주연상 수상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영국이 자랑하는 연기파 배우가 아카데미에서도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아카데미를 차지한 후에도 여러 작품에 출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던 콜린 퍼스는 2015년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에 출연했다. 콜린 퍼스가 전설의 특수요원 해리 하트를 연기한 <킹스맨>은 다시 한 번 4억 달러가 넘는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큰 사랑을 받았다. 2019년 샘 멘데스 감독의 <1917>에 출연했던 퍼스는 지난 2월부터 멘데스 감독의 차기작 <빛의 제국>을 촬영하고 있다.

말더듬이 왕과 무허가 언어 치료사의 우정
 
 조지6세는 실제로도 모든 전시연설을 라이오넬과 함께 했다.

조지6세는 실제로도 모든 전시연설을 라이오넬과 함께 했다. ⓒ (주)화앤담이엔티

 
영국 조지5세의 둘째 아들로 왕위계승서열 2위의 조지 6세 왕자는 말을 더듬는 약점 때문에 대중연설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아내 엘리자베스(헬레나 본햄 카터 분)는 소개를 통해 알게 된 언어치료사 라이오넬 로그에게 남편의 치료를 맡긴다. 조지는 자신을 애칭인 버티라고 부르며 자꾸 사생활을 캐묻는 라이오넬을 싫어하지만 음악을 크게 틀고 소리를 냈던 자신이 전혀 더듬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다시 라이오넬을 찾는다.

영국의 왕위계승 1위인 조지의 형 에드워드 8세(가이 피어스 분)는 미국인 유부녀와 사랑에 빠졌지만 영국 국왕인 조지 5세가 서거하면서 얼떨결에 왕위를 물려 받았다. 하지만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에드워드는 통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대신들은 에드워드가 영국을 통치할 자격이 없다고 입을 모은다. 결국 에드워드가 사랑을 위해 미련 없이 왕위를 내려 놓으면서 조지는 영국의 새로운 국왕에 등극했다.

조지가 원치 않았던 왕위를 떠맡아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독일의 독재자 히틀러는 전쟁을 선언했다. 조지는 자신의 언어치료사였던 라이오넬이 자격증도 없는 배우지망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자신의 소리를 정성스럽게 들어주며 교감을 나눈 인물은 역시 라이오넬 뿐이었다. 결국 조지는 라이오넬의 지휘 속에 마치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듯 영국 국민들에게 멋진 라디오 연설을 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광장에 나온 국민들의 환호에 화답한다.

<킹스 스피치>는 최고의 권력과 권위를 가진 일국의 왕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누구나 할 수 있는 고민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또한 국왕 또는 왕자라는 자리에서는 거의 만날 일이 없는 배우지망생이 정체인 가짜 언어치료사와의 만남과 교감을 통해 새로운 우정과 인간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킹스 스피치>를 만든 톰 후퍼 감독은 2005년 <엘리자베스 1세>,2008년 <존 애덤스> 등 드라마를 연출해 호평을 받았고 2011년 <킹스 스피치>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2012년 뮤지컬 영화의 새 역사를 쓴 <레미제라블>을 연출한 후퍼 감독은 2019년 유명 뮤지컬 <캣츠>를 영화화했지만 흥행과 비평에서 모두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해리포터> 배우들, <킹스 스피치>로 집합(?)
 
 독특한 캐릭터 전문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는 <킹스 스피치>에서 특이하게도(?) 기품 있는 여왕을 연기했다.

독특한 캐릭터 전문배우 헬레나 본햄 카터는 <킹스 스피치>에서 특이하게도(?) 기품 있는 여왕을 연기했다. ⓒ (주)화앤담이엔티

 
<해리포터> 시리즈를 재미 있게 본 관객이라면 <킹스 스피치>를 보는 즐거움이 더했을 것이다. 두 영화에 출연한 배우가 제법 겹치기 때문이다. 조지 6세의 아버지인 조지5세를 연기한 마이클 갬본은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교장이자 해리포터의 스승인 알버스 덤블도어 교수를 연기했다. 연극배우로 오래 활동한 갬블은 영국의 토니상으로 불리는 로렌스 올리비에 상을 4번이나 수상했고 1998년에는 영국의 기사 작위를 받았다.

영국의 61, 63대 총리를 지낸 고 윈스턴 처칠 역은 티모시 스폴이 연기했는데 콜린 퍼스와 함께 <킹스 스피치> 최고의 캐스팅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처칠은 연설을 앞두고 잔뜩 긴장한 조지에게 "사실 저도 언어장애가 있습니다. 유전적으로 혀가 짧아요"라고 농담을 던지며 긴장을 풀어줬다. <해리포터>시리즈에서 피터 페티그루를 연기했던 스폴은 2014년 <미스터 터너>에서의 열연을 통해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해리포터>에서 벨라트릭스 레스트레인지 역을 맡았던 헬레나 본햄 카터는 <킹스 스피치>에서 조지 6세의 아내 엘리자베스 여왕을 연기했다. 교양과 품위를 겸비하면서도 남편에게는 헌신적인 지극히 정상적인(?) 여왕이었다. 특히 엘리자베스는 왕위의 무게에 눌려 괴로워하는 조지에게 "내가 당신 청혼을 두 번이나 거절한 것 기억나요? 그런데 당신이 말을 멋지게 더듬길래 결혼했지"라고 말하며 두려움에 떠는 남편을 위트 있게 위로했다.

이혼 경력이 있는 미국 여자와 사랑에 빠진 조지의 형 에드워드 8세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데뷔작 <메멘토>에서 레너드 셸비를 연기하며 주목 받았던 가이 피어스가 연기했다. <킹스 스피치>에서 에드워드 8세는 여자에게 빠져 자신에게 주어진 왕이라는 운명를 걷어찰 정도로 무책임한 인물처럼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으로 보면 에드워드는 사랑을 위해 자신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할 줄 아는 순정남이기도 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킹스 스피치 톰 후퍼 감독 콜린 퍼스 제프리 러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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