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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4%. 지난 20대 대선에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심상정 후보, 진보정당 후보들이 받은 득표율을 합한 수치다. 여전히 '개혁'과 '진보 정치'를 소망하는 과반 이상의 국민들이 지향하고 추구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를 모색해본다.[편집자말]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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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사회학과 82학번, 직선에 의한 첫 총여학생회장, 학생운동으로 구속, 여공으로 위장취업. 1980년대 이진순씨는 '운동권'의 중심에 서 있었다. 전형적인 586. 현재 그와 학생운동을 함께하던 동지들은 이미 사회 각 분야에서 중추다. 특히 촛불이 탄생시킨 문재인 정부는 '586의 시간'을 만들어줬다. 

그러나 이씨의 행보는 여타 586과는 달랐다. 방송작가로 일하다가 마흔에 돌연 유학을 떠났다. 미국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고 교수로 시민 저널리즘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2013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80년대 운동은 왜 더 이상 계승되지 못할까'라는 화두를 품고.

그는 정치를 시작하거나, 강단에 서지 않았다. 줄곧 '아래로부터의 목소리'를 전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힘이 분배되어야 한다고 믿어서였다. 수많은 화제의 당사자들을 인터뷰한 <이진순의 열림>을 쓴 저널리스트로, 또 풀뿌리 정치 실험실 '와글'을 설립한 시민운동가로서 산 것은 그 때문이다. 지키거나 빼앗는 것이 그가 생각하는 정치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 역시 대선 후유증에 시달렸다. '한동안은 생체시계가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평가는 냉정했다. 대선이 끝난 뒤 3월 16일 자 <한겨레>에 '누가 국민을 패배로 만들었나'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개혁을 바라는 대다수 국민이 패배자가 되었음을 솔직히 인정하자. 그래야 다시 일어설 수 있다....울며 겨자 먹기로 투표에 임하는, 소위 '겨자밥'을 그만 먹기 위해서라도 개혁과 상생을 위한 시민연대가 필요하다.

그가 제시하는 구체적인 대안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와글' 이사장과 민주언론시민연합 상임대표를 맡고 있는 이진순씨를 13일 오후에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만났다. 마침 전날 민주당이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을 당론으로 채택했지만, 인터뷰 시작 전 윤석열 당선인이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을 법무부장관 후보자로 임명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아무래도 '겨자밥'을 계속 먹을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 속에서, 그에게 '개혁'의 길을 물었다.

"졌잘싸 아니다... 민주당, 국민들과 '개혁 우선순위' 달라"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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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당은 왜 졌을까요.

"국민의힘이 잘해서가 아니라 민주당이 못해서 진 선거였어요. 촛불 정부를 자임하는 문재인 정부와 180석의 거대 여당이 된 민주당이면 굉장히 많은 난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해방 후 민주당 정부로서는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시기였다고 할 수 있어요. 민주당은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고 누구를 위해 '개혁'을 하느냐는 생각이 들게 만들면서 국민들 가슴에 '대못'을 쳤고, 그것이 지난 서울시장과 부산시장 재·보궐 선거 결과에서 분명히 나타났어요. 대선을 앞두고 오만, 독선, 나태함에 대한 지적이 나와도 태도가 변한 게 없어요. 그러니까 실제로 선거에서 남는 것도 없게 됐습니다. 한 번의 대선을 경유할 때마다 시대적 화두를 중심으로 온 국민이 한 번쯤 생각을 해보게 되기도 하는데, 그런 게 없었죠."

-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났다고 보시는지요.

"진보를 자처하는 민주당이 부동산과 관련해서 집 가진 사람들에 대해 좀 더 유리한 방향으로 부담을 경감시켜준다거나 재개발 요건을 완화시키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하면 강남 3구에서 민주당 지지율이 오를까요? 누구를 바라보고 그렇게 원칙 없는 '매표 행위'를 하는 걸까요?

그런 방향이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이미 민주당의 주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사람들의 눈높이와 생활 조건, 그 주변의 인간관계가 기층 서민에 뿌리박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죠. 그런 의미에서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에 대단히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개혁하면 사실 '검찰개혁' 이외에는 떠오르지 않습니다. 노동, 기후위기 문제, 차별금지법 등의 진보적 의제에는 소홀했다고 보는데요.

"검찰개혁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절차나 방법상으로 문제없이 국민들의 적극적 지지와 공감을 얻을 수 있게끔 진행이 되어야 하는데, 아시다시피 검찰개혁이라는 게 '조국 대 윤석열' 그리고 '추미애 대 윤석열'로 간 거잖아요. 조국 지지층, 윤석열 지지층의 목소리가 과잉 대표되고 정치권조차도 과잉 대표된 국민들과 결합해서  강대강 대치로 갔고요.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시민들은 검찰개혁이라는 화두 자체에 대해서 신물이 났고, 지겨워졌고, 시급성을 못 느끼게 됐어요. 실제 자신이 그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고요. 그러면서 주변에서는 무슨 사상 검증하듯이 '너는 어떤 편이야' 물어보고, 말 하나 잘못하면 '너 우리 편 아니다'라는 소리 듣는 분위기가 된 거예요. 이러면 공론장 자체가 작동할 수가 없게 돼요.

정작 어제(12일) 민주당 의원총회에서 검찰개혁과 언론개혁을 당론으로 채택했는데, 오히려 그 이전에 하겠다던 정치개혁에 대해선 거대 여당으로서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정치 생태계나 정당 환경을 바꿔야 한다는 책임감이 없어 보여요. 즉, 민주당이 생각하는 개혁의 우선순위와 국민들에게 필요하고 국민들이 기대했던 개혁의 우선순위가 일치하지 못하고 있는 거지요. '개혁'이라는 용어가 바겐세일 되고 있다고 봐요. 자기 마음에 안 들어서 바꾸는 것을 다 개혁이라고 하고, 새 정부도 그렇게 되겠죠." 

- 일반 시민들 의견이 묵살되게 만드는 소위 '강성 지지자' 영향력이 너무 센 것도 문제로 보입니다. 

 "배타성이 문제예요. 당내에서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문자폭탄을 받고 탈당 안 하냐는 소리를 듣는 게 현실이죠. 저는 당이나 정부에서 적절한 거리 두기를 명시적으로 했었어야 한다고 봐요. 결국 극렬주의를 토대로 권력을 행사하려는 사람들이 있고, 정치인들이 그들과 일종의 결탁을 하게 되는 데까지 온 것이고요. 지금껏 너무 안일했어요. 팬덤에 이끌려 다니거나 유착한 이들이 만드는 '선악게임' 구도에서 벗어나서 시민을 직접 만나고, 무엇이 개혁 우선순위고 시민들이 바라는 변화인지 제대로 방향을 잡아야 해요."

"민주화운동 유효기간 끝났다"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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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눈에 띄는 이력 중 하나가 '와글' 설립입니다. 시민들의 정치 의사 과정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다양한 실험을 진행하는 동시에, 청년 정치인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데요. 이곳을 만든 이유가 궁금합니다. 

"노동운동 한다고 구로공단에 있다가 취업할 시기를 놓치고 30대에는 방송 작가를 했어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소위 386이라는 데 자부심이 있었어요. '못 살면 어때, 떳떳하게 살았잖아'라고 생각했는데, 40살 유학 갈 무렵에 보니까, 자괴감이 들었어요. 저를 포함해서 우리가 '이것밖에 안 되나' 하는 생각. 너무나 쉽게 기득권층으로 편입되어 갔고, 정치권에도 많이 들어갔는데 왜 이런 결과밖에 못 내고 있나 싶었죠.

유학을 가서도 마음 속 화두는 하나였던 것 같아요. 80년대 운동은 왜 더 이상은 계승되지 못할까. 80년대 운동은 왜 그걸로 끝났을까. 그래서 논문을 시민운동의 변화에 대해서 썼어요. 계속 공부를 하다 보니까 제 나름 내린 결론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초보적인 발대기일 수는 있으나, 2000년 이후에도 사회 변화의 동력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 오히려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거였어요. 

이제 의사소통 방식이 달라졌잖아요. 중앙집권이 아니라 시민들의 자발성에 입각한 네트워크 형태로, 탈중심적이고 다양성을 최대한 키우면서 여기저기서 변화를 위한 운동들이 벌어지는 게 진보를 위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국에 와서 그런 방식의 시민운동을 하고 싶었는데, 과거 동지들을 찾아갔더니 너무 대화가 안 됐어요. 제가 하는 얘기랑 너무 동떨어져 있고, 제 이야기를 듣고 '네가 정치를 몰라서 그래'라고 답하더라고요. 그래서 당시에 쓴 책 제목을 그렇게 (<듣도 보도 못한 정치>) 단 거예요. 이제 같이 일할 수 있는 또래 친구들을 만나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싶었고, 젊은 친구들이 새로운 변화의 동력에 대한 감수성이 뛰어난 것 같아서 그 친구들을 밀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거죠."

- 와글 출신 청년 정치인은 누가 있나요.

"장혜영 의원도 와글 사무국장 출신이고, 박성민 청와대 청년비서관도 저희가 진행한 디지털 연수 과정에서 선발되어 국회 인턴십을 시킨 케이스지요. 권지웅 민주당 비대위원도 와글의 대표이사고요. 그 밖에도 와글을 거쳐서 민주당, 정의당, 미래당, 녹색당에서 지방의원을 하거나 당직을 맡고 있는 분들이 꽤 있죠."

- 그런데 청년 정치인들에게 의구심을 품는 시선은 여전합니다. 

"먼저 앞으로 그들은 살 날이 훨씬 더 많은 지구의 세입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 다가올 혹은 천천히 다가올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서 나이 든 사람들보다 훨씬 예민하고 진지해요. 오히려 저 같은 연배의 사람들은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선) 그 친구들에게 계속 묻고 들어야 해요.

국회의원이 '입법 노동자'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그것을 넘어서 공공이 함께 소중하게 여겨야 할 우선적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그 가치를 구현해내기 위한 최상의 방법을 찾아가는 사상적 퍼실리테이터(촉진자) 같은 역할을 정치인이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미래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시대적 가치'를 더 많이 고민하는 청년 정치인들이 전면에 나서는 게 우리 사회의 큰 활력소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 청년 정치인이 드물기도 할 뿐더러, 그들이 새로운 정치 세력을 만드는 데는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키우지 않고 지속 가능한 조직이 있나요? 기업도 발 빠르게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니까 계속 사람을 키워내고 리더십을 교체해요. 그런데 정당은 인적 자원을 키우는 일을 거의 안 해요. 잠재력이 있는 젊은 정당인, 정치인이 있으면 더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하는데 자꾸 '들러리', '구색 맞추기'로 소비해 버려요. 개인이 성장하기보다는 단물만 빨리고 버려지는 구조인 거죠. 

'정당 개혁'이 안 되는 상황에서 청년 정치인들도 더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수평적 연대', 그러니까 정당이 다른 정치인들끼리 다이나믹한 연대를 가질 필요가 있어요. 함께 싸울 때는 싸우고, 이견이 있는 정치적 쟁점에서는 품격 있게 논쟁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우리의 정치는 다르다'라는 것을 국민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봐요."

"586, 주도자 아닌 조력자로 물러설 수 있어야"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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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권력을 꽉 잡고 있는 주변의 586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으실 것 같습니다.

"제 또래 친구들, 특히 정치권에 있는 분들에게는 '이제 많이 했어, 그만해도 돼, 충분히 잘 해냈어, 훌륭해 끝'이라고 이야기를 해요. 그런데 저도 나이가 들어보니까... 이제 한국 나이로 60인데요. 사람이 초조해져요. '내가 이걸로 그냥 끝인가? 제대로 마무리 지은 것이 있나?' 이런 고민을 하게 돼요.

그러니까 평생 나는 인권과 민주주의 등 우리 사회를 위해 살았는데 (사회가) 이렇게 망가지는 걸 보면서 그냥 손을 놓는 것은 비겁한 게 아닌가. 최선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뭔가를 더 해서 뒤집어놓고, 마무리를 잘 짓고 피날레를 장식해야 된다는 생각을 한다는 거죠. 그래서 저도 스스로 경계해요. 당대에서 결과를 내고 뭘 이뤄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자꾸 오버하게 되거든요. 그건 비현실적이고 가능하지도 않고, 오히려 마무리를 망칠 수도 있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요.

지금 50~60대들은 20~30대에 우리 사회의 거대한 변곡점을 만들거나 그걸 목격한 사람들이고 그것에 대한 어마어마한 자긍심이 있어요. 문제는 시대가 바뀌고 점점 늙어가고 정보를 접하는 속도도 더디어지는데, 계속 자신이 가장 성공했던 방식을 적용하면 현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다는 거죠.

그러니까 자신이 잘 모르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폄하하게 돼요. 기후위기, 여성주의,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제에 대해서 본인들이 그만큼 중요하게 생각 안 하니까, 그 문제 자체가 아예 사소한 문제라고 착각을 하는 거예요. 새로운 방식으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는 시도에 대해서도, '나처럼 해결해야 된다'면서 자기중심주의를 드러낼 때도 있고요. 그게 변화와 개혁을 바라는 다양한 세대와 다양한 계층과 결합하는 데 걸림돌이라고 생각해요." 

- 미련을 버리라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걸었어요. 그 다음은 후대에게 걸으라고 해야 해요. 하지만 내가 생각하고 온 방향하고 다른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고요. 앞으로의 방향이나 가는 방법을 결정하는 것은 기존의 사회에 가장 불만이 많은, 그래서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젊은 사람들이잖아요. 주도자가 아닌 조력자로 인생을 멋지고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새로운 변화의 주체를 열심히 응원하고 격려하고 지원하고, 또 거기서 배우는 일을 하고 싶고, 그것과 별개로는 5060 시니어 그룹의 고유한 에너지를 이렇게 모아낼 수 있는 새로운 네트워크 운동, 일종의 당사자 운동을 하고 싶어요. 지난해 출범한 '60+ 기후행동'처럼 새로운 시대적 화두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되, 시니어들이 할 수 있는 역할과 특성을 가지고 하는 새로운 운동, 나이 든 사람들끼리 '뭘 해봅시다' 이런 게 좋아 보여요."

태그:#이진순, #와글, #586, #민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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