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10대들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서태지와 아이들

1990년대 '10대들의 대통령'이라 불렸던 서태지와 아이들. ⓒ 서태지닷컴

 
2022년 3월 23일은 가수 서태지의 데뷔 30주년이다. 여기저기서 서태지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 서태지는 1990년대의 역사를 바꾼 슈퍼스타다.  랩이 낯설던 1990년대 초반, 랩의 대중화를 주도했고, 퍼포먼스 중심의 음악으로 케이팝의 기틀을 닦았다. 서태지와 아이들 시절 그가 뿌려 놓았던 씨앗은 오늘날의 케이팝 제국으로 자라났다. 

그는 방송국에 종속되다시피 했던 가수의 존재를 재고했고, 불공정한 수익 분배, 사전심의제 등의 구시대성과도 맞서 싸웠다. 솔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로는 대중성을 포기하고 앨범마다 다른 음악적 실험을 이어가는 록 음악가로 자리잡았다. 2014년 9집 < Quiet Night > 이후 8년 가까이 신보에 대한 소식은 없지만, 그는 여전히 문화 대통령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기억된다.

서태지가 한국 대중문화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만큼, 그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노래도 많이 있었다. 싸이는 '77학개론'에서 서태지를 통해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고, MAMA에서 서태지와 합동 공연을 펼친 지코는 이후 'VENI VIDI VICI'에서 '서태지의 부름받아'라며 자신의 성공을 입증하기도 했다.

'나는 서태지'라 외치는 래퍼가 있다
 
 창모가 2021년 발표한 정규 앨범 'UNDERGROUND ROCKSTAR'

창모가 2021년 발표한 정규 앨범 'UNDERGROUND ROCKSTAR' ⓒ Ambition Musik

 
지난 3월 14일 입대한 래퍼 창모가 서태지를 언급하는 방식은 이전과 조금 차별화된다. < UNDERGROUND ROCKSTAR >(2021)의 타이틀곡인 'TAIJI'는 제목 그대로, 서태지에게 영감을 받아 탄생한 곡이다. 단순히 이름만 빌리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을 샘플링했다. 서태지의 허락을 받아, 작사 작곡진에 창모와 서태지의 이름이 나란히 오르게 되었다.

창모는 학창 시절 밴드부 활동을 하면서 서태지의 음악에 푹 빠졌다. 그리고 서태지의 록 음악은 그에게 새로운 영감을 제시했다. 단순히 힙합에 국한되지 않고 록과 팝을 오가는 그의 유연성은 서태지에게도 빚을 졌다.

칸예 웨스트(Kanye West)의 웅장한 프로덕션을 연상시키는 트랩 비트, 그리고 "난 내 삶의 끝을 본 적이 있어 내 가슴 속은 답답해졌어 내 삶을 막은 것은 나의 내일에 대한 두려움"이라는 'Come Back Home'의 가사와 함께 노래가 시작된다. 창모는 서태지에 대한 동경을 품고, 서태지 못지 않은 자수성가 신화를 이뤄내겠다고 말한다. 주문처럼 반복되는 '수십억 집 한 채가'는 이 곡을 꿰뚫는 정신이다.
 
 가수 서태지

가수 서태지 ⓒ 서태지컴퍼니

 
평범한 고등학교 중퇴생이었던 서태지는 문화의 역사를 바꾼 슈퍼스타가 되었고, 부촌인 평창동에 집을 마련했다. 남양주 덕소리 출신으로서, 언제나 '리가 낳은 놈'을 자처했던 그는 이제 서태지의 길을 바라본다. 창모의 첫 집 역시 서태지가 살았던 부촌 평창동에 마련했다. 장르도, 시대도 다르지만, 서태지의 성공과 창모의 성공이 'TAIJI'에서 중첩되고 있다.
 
"내 노래 가지고 히트 쳐 사고만다 첫 번째 집 그 위친 서태지 살던 그 산에"
"내 첫 시작 때 내 리 놈들한테 말했어 '나는 서태지' 이젠 그 동네가 이놈의 새 리"
- 'TAIJI(창모)' 중

여성이 소모적으로 활용되는 가사가 아쉬움을 남기지만, 욕망과 자부심을 한껏 드러내는 태도만큼은 매력적이다. 성공 신화를 그리는 힙합은 차고 넘쳤지만, 비유의 방식이 새롭다. 이토록 뻔뻔할 만큼 서태지를 세속적인 신화에 활용했던 경우는 없다. 창모의 서태지 활용법은 결코 무례하게 들리지 않는다. 그는 힙합적인 문법으로, 과감하게 존경심을 표하고 있으니까.
창모 TAIJI 서태지 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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