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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선 수많은 범죄가 일어난다. 지나치게 세간을 떠들썩하게 해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 있는 강력범죄가 하나쯤 있을 것이다. 범죄가 잔혹하면 할수록 언론을 비롯한 사람들의 관심은 범죄자에게 쏠린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렇게 범죄자에게 관심이 집중될수록 그 반대편에 있는 피해자는 범죄의 잔혹성을 이해하기 위한 수단으로 소비된다는 점이다. 대다수의 강력범죄 사건에서 피해자에 대한 공감과 이해는 생략되거나, 범죄의 그림자에 가려 빠르게 잊힌다.

강력범죄트라우마 전문통합지원기관인 서울동부스마일센터 센터장으로 재직 중인 김태경 우석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2000년대 초반부터 범죄 피해자와 유족들의 삶에 주목해 왔다. 성폭력이 '그리 무거운 범죄'가 아니라고 치부되고, 성범죄 피해 아동들에 대한 제대로 된 조사 방법은 물론 지원 시스템도 부재했던 시절이었다.

김태경은 고군분투하면서 시스템을 만들었고, 이론과 실제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공부했고, 범죄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의 일상 회복을 도왔다. 피해자를 만나는 것은 고된 일이었고, 자신을 소진하는 일이었다. 김태경은 종종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끝내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최근 김태경은 잔혹한 범죄 뒤에 남겨졌지만, 그 잔혹성에 가려 잊힌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책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출간했다. 이 책은 김태경이 범죄 피해자들과 함께 보낸 20년간의 기록인 동시에, 범죄 피해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하는 '선량한 시민'들을 위한 섬세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관련하여 지난 1월 25일 김태경 교수를 만났다. 그동안 범죄 피해자를 대하는 세상의 인식과 시스템은 얼마나 나아졌을까?
 
김태경 교수 프로필 사진
 김태경 교수 프로필 사진
ⓒ 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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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해자를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이 심정적으로 굉장히 힘든 일일 뿐 아니라 교수님의 삶에 미치는 영향도 굉장할 것 같다.
"성폭력 피해 아동을 상담하는 해바라기 센터에 있었을 때는 소진이 심했다. 소진이란 소위 진 빠지는 경험을 말한다. 보통 피해 아동의 경우 그 부모나 가족도 트라우마가 생기기 마련이라 부모에 대한 케어도 굉장히 중요하다. 그래야 그들이 아이를 잘 돌보기 때문이다. 투 트랙으로 진행하는 만큼 환경이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론 아이들은 보호 시스템을 잘 구축하면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소진은 되지만 대리 외상은 없었다. 대리 외상이란 이 세상이 안전하고, 살 만한 곳이라는 감각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서울동부스마일센터로 옮겨와 범죄 피해 성인들을 만나면서 세상에 정말 너무나 악의적인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됐다.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일종의 대리 외상에 시달렸다.

지나칠 정도로 문단속을 하고, 절대 늦게 돌아다니지 않고. 새벽에 밖에 나가지 못했다. 칼로 배를 찔리는 악몽도 굉장히 많이 꾸면서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놀라운 건 트라우마 후 성장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대리 외상 후 성장이라는 것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대리 외상 후 성장을 하게 됐다. 지금도 여전히 조심하고 주의하는 것은 많지만 일상생활이 불편할 정도는 아니다."

- 대리 외상 후 성장은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는지, 혹은 어떤 노력이 있었던 건지 궁금하다. 또 이렇게 생활이 어려울 만큼 힘들었음에도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가?
"자연스러운 과정은 아니었다. 대리 외상 후 성장을 촉진하는 요소가 있다. 보통 피해자를 주로 만나는 경찰이나 초기 지원만 하는 분들은 대리 외상 후 성장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런데 내 경험상 감사하게도 피해자들이 점점 회복하는 걸 본다. 그걸 옆에서 몇 년 이상 지켜보면 인간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고통스럽고 끔찍한 경험을 이기고 일상을 회복하려는 힘과 노력을 보고 있으면 어떤 경외심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게 컸던 것 같다. 그분들을 통해 결국 나도 성장하고, 내가 가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됐다. 그것이 내가 여전히 이 일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자, 대리 외상을 이기고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닐까 싶다."

- 최근 도서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출간했다. 어떤 책인지 작가가 직접 소개한다면?
"세상에 너무 범죄와 범죄자 얘기만 넘쳐난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에게 범죄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세상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지각하게 한다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피해자들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낮춘다. 내가 무서우면 남이 무서운 것을 공감하지 못한다.

미디어는 범죄의 잔혹함만을 조명하고, 피해자들은 그 잔혹함을 부각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뤄지면서 결국 2차 가해의 표적이 되거나 잊힌다. 사람들은 범죄 피해자들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괴롭고, 고통스럽고, 비참하다고만 생각한다. 물론 처음엔 그럴 수 있겠지만 그들은 삶을 재건하기 위해 누구보다 노력한다.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통해 범죄 피해자들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가 얼마나 심한지, 당사자들이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그들을 보호하는 시스템에 대한 실정은 어떤지, 주위 사람의 배려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려주고 싶었다. 그들을 건강하게 지지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도서 <용서하지 않을 권리>
 도서 <용서하지 않을 권리>
ⓒ 박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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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부터는 <용서하지 않을 권리>의 문장들로 질문을 이어가 보겠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피해자는 경찰서에서 피의자가 조사받는 곳과 같은 장소에서 조사를 받으며, 피의자와 동시에 조사받기도 한다. 조사 중에 지나가던 경찰관이 불쑥 끼어들어 훈수를 두거나 피해자의 행실을 비난하기도 한다."

이 부분은 좀 충격적이었는데... 과연 이게 2022년에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일이 맞나 싶다. 좀 구체적으로 얘기해 준다면? 덧붙여 피해자 보호는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야 할까?

"누군가가 피해자 신분으로 가면 최종적으로 결과가 나기 전까지 보호를 해줘야 한다. 그런데 수사기관에서는 그전에 '진짜 피해자가 맞아?'를 밝혀내고 싶은 거다.

보통 대질 신문할 때 방에서는 따로 앉는데, 조사받기 전에 같은 공간에서 대기하는 일이 왕왕 있다. 심지어 신문을 마치고 피의자와 피해자가 같이 나가기도 한다. 정말 끔찍한 일 아닌가? 당연히 피해자를 먼저 보내야 한다. 요즘에는 이런 가이드라인도 있고, 많이 나아진 측면이 있긴 하지만, 완전히 지켜지지 않고 있다.

초기에 형사사법 절차에서 피해자의 경험은 굉장히 중요하다. 이때 어떤 경험을 했냐에 따라 피해자의 트라우마 정도나 이후 심리지원을 받을 때도 영향을 미친다. 피해자가 통과해야 하는 첫 번째 문에서부터 섬세하게 대하고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 물론 세상엔 좋은 경찰분들이 훨씬 많다. 나는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지 않다. 다만 이런 시스템은 분명 문제가 있고, 바꿀 필요가 있다는 사실만큼은 이야기하고 싶다."

- "누군가 범죄의 표적이 되었다는 것은 그가 그날 그 시각 그 장소에서 지독히도 운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아직 범죄 피해자가 되지 않은 것은 내가 그날 그 시각 그 장소에 있었던 피해자보다 좀 더 운이 좋았기 때문이다. 범죄는 피해자가 빌미를 제공했기 때문이 아니라 범인이 범행하기로 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어떤 범죄는 피해자가 부주의했기 때문에 벌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 또한 2차 가해의 일종일 수 있을 것 같은데, 2차 가해가 피해자에게 미치는 영향에는 무엇이 있을까?

"보통 범죄 피해자가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 사람들은 그 범죄가 너무 끔찍하고 고통스러워서라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2차 가해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정도로 2차 가해는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범죄를 겪은 피해자는 살아보려고 애쓴다. 도움도 청하고, 의지를 갖고 이겨내려고 하는데 2차 가해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가 많다. 보통 학폭이나 학대 같은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범죄는 일회성이고, 범인도 한 명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2차 가해는 대개 여러 명으로부터, 지속적으로 당한다. 어쩌면 평생이 될 수도 있다. 피해자 입장에선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거다. 범죄가 생기는 결정적인 원인은 피해자가 빌미를 제공해서가 아니라 그저 '그놈'이 '그 짓'을 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유를 찾으려고 한다. 피해자의 잘못을 찾아야 내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괜찮겠다는 믿음이 생기면서 나의 안전감을 빨리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는 원시 시대라면 생존을 위한 좋은 수단이 될 수도 있었을 거다. 그런데 우리는 원시인이 아니지 않나. 문명화된 사회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고 있지 않나. 본능대로만 말하고 행동해서는 안 된다. 그런 분들은 우리끼리 하는 말로 제발 전두엽을 좀 쓰시라. (웃음)"

- "상실을 받아들여야지만 애도가 시작될 수 있고 애도가 시작되어야 삶의 재건이 가능해진다."

범죄로 인해 누군가를 떠나보낸다는 건 상상조차 무서운 일이다. 하지만 남은 사람들은 또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주위에선 어떤 말을 어떻게 해주는 것이 좋을까?

"오늘 상담 오신 분께서 사망한 가족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길을 걷다 어떤 풍경을 보고 있으니 돌아가신 분이 생각나서 많이 슬프다는 얘기였는데, 누구는 이 이야기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다. 그분이 이 이야기를 꺼내기까지 3년 반이 걸렸다. 상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건 팩트고 진리이지만 나는 절대 유가족에게 이 말을 하지 않는다.

살인을 받아들이는 건, 범인을 용서하라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결국 수용하고 애도한다. 중요한 것은 그게 우리의 방식과 속도와는 다르게 흐른다는 거다. 그렇게 되기까지 10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다. 그분은 그걸 10년 동안 준비한 거다. 그들에게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코치하는 게 아니라 기다려 주는 것이다."

-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라는 믿음"

수많은 범죄와, 범죄 피해자들을 접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 교수님은 과연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하다. 여전히 인간을 긍정하고, 그래도 살 만한 세상'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사실 범죄자를 많이 만나는 분 중에서 '나는 세상 안 믿는다'고 말하는 분도 계신다.(웃음) 그런데 나는 직업상 범죄자보다 피해자를 훨씬 더 많이 만난다. 그렇게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성장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간은 결국 선하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물론 세상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사람도 있다. 예를 들면 아직도 몇십 년 전 유영철 자료를 들여다본다. 그런 사람들조차도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우리는 선하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웃음)"

-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주위의 범죄 피해자를 돕고 싶은데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다는 질문을 정말 많이 받았다. 돕고 싶은 마음에 무심코 했던 말이 2차 가해가 되는 경우도 꽤 있고. 책을 통해 궁극적으로 그런 매뉴얼을 제공하고 싶었다. 그래서 <용서하지 않을 권리>의 하이라이트는 5장이다. 5장을 꼭 읽어주셨으면 좋겠다. 다른 부분은 안 보셔도 괜찮다.(웃음)

범죄 피해자들이 범죄로 인해 큰 충격을 받은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삶이 망가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혜롭게 나름의 방식으로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선량한 우리의 역할이 정말 중요하다. 그 사실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태그:#용서하지않을권리, #김태경, #범죄심리학, #범조피해자,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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