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남자축구 대표팀이 최근 아시아 최초로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이라는 대업을 달성한 가운데, 여자축구도 새로운 역사를 수립했다. 콜린 벨 감독이 이끄는 여자축구 대표팀(FIFA랭킹 18위)은 3일 오후 인도 푸네의 시리 시브 차트라파티 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필리핀과의 2022 아시아축구연맹(AFC)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2대 0으로 승리했다.

한국은 FIFA 랭킹 64위의 약체 필리핀을 초반부터 강하게 몰아붙였다. 전반 4분 만에 코너킥 상황에서 김혜리가 올린 크로스를 조소현이 헤더로 마무리하며 기분좋은 선제골을 터트렸다. 34분엔 추효주가 개인기로 왼쪽 측면에서 수비수를 제치고 박스 안까지 돌파해들어가서 연결해준 땅볼 크로스를 문전으로 쇄도한 손화연이 가볍게 마무리하며 추가골을 터뜨렸다.
 
필리핀은 후반 시작과 동시에 3명을 교체하며 분위기 반전을 노렸으나 후반에도 한국이 높은 볼점유율에 이은 강한 전방 압박으로 필리핀의 빌드업을 저지하며 오히려 더 많은 찬스를 만들어냈다. 한국은 후반 19분과 21분 손화연과 추효주의 슈팅이 각각 골키퍼 선방과 수비벽에 맞고 나왔다.
 
필리핀은 기회가 날 때마다 적극적인 중거리 슈팅으로 골문을 노렸으나 대체로 정확성이 떨어졌다. 프리킥 찬스에서 수비 뒷공간을 노리는 침투 플레이를 시도했으나 골대 옆을 살짝 지나간 것이 가장 위협적인 장면이었다. 벨 감독은 후반 중반 이후에는 여민지와 이민아를 투입하며 라인을 내리고 무리한 공격보다 수비에 더 무게를 두면서 안정적으로 경기를 마무리했다. 한국은 이로서 필리핀과의 역대 A매치 전적 3전 전승, 11득점 무실점이라는 압도적 우위를 이어갔다.
 
한국 여자축구가 아시안컵 결승에 진출한 것은 사상 처음이다. 1975년 창설된 아시안컵에서 한국은 1991년 대회부터 출전하기 시작했고, 무려 13번째 도전만에 드디어 결승 무대를 밟아보는 쾌거를 이뤄냈다. 종전 최고성적은 2003년 태국 대회에서 기록한 3위였고, 4강에 오른 것도 네 차례(1995, 2001, 2003, 2014)에 불과했다. 첫 아시안컵 출전 당시만 해도 조별리그 상대였던 중국, 대만, 태국에게 단 한 골도 넣지못하고 '0득점 22실점'이라는 굴욕을 당했던 한국 여자축구가 무려 31년의 세월을 넘어 눈부시게 성장했다는 것을 증명한 순간이다.
 
당초 대표팀의 1차 목표는 3회 연속 월드컵 본선출전과 아시안컵 4강진출이었다. 한국은 지난 1월 30일 열린 8강전에서 지소연의 결승골로 강호 호주를 1-0으로 제압한 바 있다. 2010년 이후 무려 12년 만에 호주에 승리한 한국은 이미 아시안컵 5위까지 주어지는 2023 호주-뉴질랜드 FIFA 월드컵 본선 출전권을 획득해놓은 상태였다. 상승세를 탄 한국은 필리핀마저 꺾고 결승진출을 달성하면서 이미 역대 최고성적을 경신했고, 이제는 내친김에 우승까지 노리게 됐다.
 
또한 호주전에서 한국축구의 전설 차범근-홍명보를 뛰어넘어 한국 선수 역대 A매치 최다 출전 기록(137경기)을 세웠던 조소현은 필리핀과의 준결승에 이어 결승전까지 출장한다면 자신의 신기록을 139경기까지 늘리게 된다. 하필이면 신기록을 세운 호주전에서 페널티킥 실축으로 아찔한 순간을 맞이하기도 했던 조소현은, 필리핀전에서는 당당히 결승골을 터뜨리며 지난 경기의 아쉬움을 스스로 만회했다.

첫 우승 도전에 나서는 한국 여자축구대표팀의 최종 상대는 중국으로 결정됐다. 중국은 일본과의 준결승에서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4-3으로 승리를 거두며 결승에 올랐다. 양팀은 정규시간 동안 1-1로 승부를 가리지 못했고 연장전에서 일본이 먼저 골을 넣으며 승기를 잡는 듯했으나 종료 1분을 남기고 중국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지며 경기를 승부차기까지 몰아간 끝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대회 3연패에 도전하던 일본은 이날 볼점유율이 67%에 이르렀고 두 번이나 먼저 리드를 잡으며 경기력에서 중국을 압도하고도 어이없게 승리를 놓치며 대망의 '결승 한일전 리턴매치'는 아쉽게 무산됐다. 중국전 패배는 마치 자국 남자대표팀의 1993년 미국월드컵 예선 '도하의 비극'을 연상시킬 만큼 뼈아픈 탈락이었다. 일본은 한국과의 조별리그 경기에서도 후반 40분에 동점골을 허용하며 1-1로 비긴 바 있어서 끝까지 뒷심 부족에 발목을 잡혔다. 반면 한국은 일본에 이어 조 2위를 차지하고도 오히려 준결승까지 부담스러운 중국을 피한 게 오히려 호재가 됐다.
 
한국 여자축구는 어차피 중국에 갚아야 할 빚이 있다. 한국은 일본과의 상대전적에서도 4승 11무 17패로 열세지만 중국을 상대로는 4승 7무 28패에 그치며 더 고전했다. 지난해 열린 도쿄 올림픽 여자 축구 아시아 최종예선 플레이오프(PO)에서도 1무1패로 1, 2차전 합계 3-4로 밀리며 본선진출 티켓을 놓쳤다.

특히 한국은 원정에서 먼저 2골을 앞서나가며 유리한 고지를 점했지만, 후반과 연장에 각각 한 골씩을 내주며 손에 거의 들어온 올림픽 티켓을 내줘야했던 아픈 기억이 있다. 하지만 이제 중국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고 대등한 경기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 게 위안이었다.
 
중국은 아시안컵 8회 우승으로 대회 최다우승국이지만 마지막 우승은 2006년으로 무려 16년 전이다. 남자축구가 최근 또다시 월드컵 본선에 탈락하며 축구굴기의 체면을 구긴 중국으로서는 그나마 여자축구에 희망을 걸고 있다.
 
아시아 최강이자 월드컵 단골손님인 한국 남자축구도 아시안컵에서는 1960년 마지막 우승을 끝으로 반세기가 넘도록 우승과 인연을 맺지못하고 있다. 뒤늦게 시작하여 불모지로 꼽히던 여자축구가 숙적 중국을 넘어 사상 첫 우승까지 차지한다면, 남자축구의 10회 연속 월드컵 본선진출에 못지않은 뜻깊은 위업으로 역사에 남을 것이다.

어느덧 황혼을 향해가는 여자축구 황금세대와 콜린 벨 감독에게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 여자축구의 위대한 도전은 오는 6일 오후 8시에 열리는 결승 무대를 통하여 이제 우승까지 한걸음만을 남겨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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