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공식 포스터.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공식 포스터. ⓒ 영화사 조아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처음 선보인 영화가 등장한 후 상당수 문학작품이 영화로 제작된다. 기록에 따르면 지금까지 만들어진 영화의 30% 정도가 문학, 특히 소설에 뿌리를 두고 있다. 예술적으로 혹은 상업적으로 성공한 소설의 80%가 영화화되었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62회 영화로 제작되어 이 부문 신기록을 가지고 있다.
 
지난 세기말부터 지금까지 한국 독자를 매료하는 대표적인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일 것이다. 1987년 일본에서 출간된 <상실의 시대: 노르웨이의 숲>은 1990년대 후반 한국의 청년들을 격동시킨 대표작이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2014년 출간된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단편소설 각색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2021년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받았고, 뉴욕의 '고담 어워즈'에서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흥미로운 점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각본을 쓰고,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연출한 <스파이의 아내>가 2020년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하마구치 감독의 글쓰기가 출중하다는 확실한 증거다.
 
상실에 관하여 - 가후쿠
 
연극배우이자 연출가로 명성이 높은 가후쿠(家福)는 아내 오토(音)를 끔찍이 사랑한다. 그들의 육체는 곧잘 향연에 빠져들고, 절정의 시간에 오토는 기막힌 드라마 대사를 쏟아낸다. 교미가 끝난 암버마재비가 수컷을 잡아먹고 번식률을 끌어올리는 양상과 흡사하다. 그런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상황과 장소에서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다.
 
당신 같으면 어떻게 하겠는가?! 가후쿠의 선택은 뜻밖이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장면과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은 순탄하고 여일(餘日)하게 굴러간다. 문득 오토가 진지한 얼굴로 '이따가 얘기 좀 하자'는 말을 건넨다. 가후쿠는 일부러 아주 늦은 시각에 귀가한다. 쓰러져 있는 오토를 흔들어 깨우며 구급차를 부르는 가후쿠.
 
세월이 흐르고 가후쿠는 히로시마 연극제에 초빙되어 안톤 체호프의 희곡 <바냐 외삼촌> 연출을 맡는다. 두 달의 시간을 허여받은 가후쿠는 서둘지 않고 배역을 위한 오디션을 진행한다. 거기서 아내의 드라마에 출연한 다카츠키를 만나는 가후쿠. 그는 전도유망한 배우로 아스트로프 배역을 희망한다. 가후쿠는 그에게 바냐 배역을 맡긴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가후쿠의 '바냐' 배역 낭송과 오토의 여타 배역 낭송이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오면서 진행된다. 25년 세월 세레브랴코프 교수에게 바쳐진 바냐의 허망한 세월의 상실과 엘레나를 꿈꾸는 불가능한 사랑의 미련. 기실 그 배역은 언제나 가후쿠의 몫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가후쿠는 바냐 배역을 소화할 자신이 전혀 없다.
 
또 다른 상실 - 미사키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관련 이미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관련 이미지. ⓒ 영화사 조아

 
가후쿠는 15년 된 사브 승용차를 몰고 다닌다. 히로시마 연극제 당국은 연출가에게 전속 기사를 배정하는 관례가 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표정한 얼굴에 운동화 차림의 젊은 여성 미사키가 가후쿠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말수 적은 미사키가 능숙하게 차를 운전한다. 차를 탈 때마다 <바냐 외삼촌> 카세트테이프를 켜달라는 가후쿠.
 
미사키도 상실의 고통을 삭이고 있다. 북해도 고향마을에 일어난 사고로 엄마를 잃은 미사키. 그런 내색을 하지 않던 그녀가 가후쿠에게 마음을 열어가는 까닭은 <바냐 외삼촌> 대본 때문이다. 이루지 못할 사랑에 속을 태우다 끝내 절망하는 24살의 소냐가 47살의 중년 외삼촌을 위로한다. 죽음 이후의 평안과 휴식을 말하며 바냐를 위로하는 소냐.
 
어린 미사키를 학대하고, 다시 어루만지며 미사키를 달랬던 이중인격적인 모순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던 엄마를 향한 복합감정 병존. 하나의 목소리는 엄마를 구해야 해, 다른 목소리는 그냥 놔둬! 엄마의 분열된 인격처럼 미사키의 내부세계 또한 쪼개져서 싸웠던 시절. 그런 고향과 상실의 시간과 작별하고 히로시마에서 쓸쓸히 살아가는 미사키.
 
"난 엄마를 살릴 수도 있었어요. 어쩌면 내가 엄마를 죽인 건지도 몰라요!"
"넌 엄마를 죽이지도 않았지만, 살리지도 않았어."
"아내가 다른 남자들의 사랑을 갈구한 분이었다는 걸 인정하면 안 되나요?"
"난 아내를 잃고 싶지 않았어. 두려웠던 거지."

 
연극과 영화 - 기다림에 관하여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무대가 영화의 객석에 펼쳐진다. 우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기다리는 고도(Godot)의 실체를 알지 못한다. 왜 그들이 고도를 기다리는지, 언제 고도가 올 것인지, 진짜로 고도가 올 것인지조차 모른다. 그저 우리도 그들처럼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절실해진다.
 
부조리극의 대명사로 불리는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은 지식인을 위한 연극이 아니다. 식자들은 하나같이 베케트가 전하고자 했던 주제 의식을 이해하지 못했다. 지식분자들이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서사연극 <억척 어멈과 그 자식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것과 같다. 부조리극이든 서사연극이든 핵심은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문제는 지식인들이 얄팍한 인간 이성의 잣대로 작가의 문제 제기를 가늠하고 이해하려 했던 어리석은 자세다. 등장인물들의 상실과 기다림은 지식인 관객의 차가운 심금이나 명료한 의식을 일깨우지 못했다고 전한다. 반면에 감옥이나 수용소의 무식하고 허랑방탕한 관객은 '고도'에 열광하고, 서사연극의 본질을 어렵지 않게 통찰했다 한다.
 
가후쿠와 미사키는 끈질기게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들을 괴롭히는 수수께끼가 해명될 때까지 최대한 인내한다. 누구도 해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상실의 봉인을 서로가 조금씩 뜯어내면서 각자의 상처를 드러내고 위로하면서 기나긴 여정에 오른다. 히로시마에서 북해도에 이르는 일본 열도를 관통하면서 흐느끼듯 길을 달리는 사브 자동차.
 
독특한 서사형식의 영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관련 이미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관련 이미지. ⓒ 영화사 조아

 
더러는 연극무대 같은 장면이, 더러는 생동감 넘치는 영화 장르의 속성이, 때로는 심리 소설의 깊은 통찰을 담은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그래서일까. 179분의 상영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스릴러나 기막힌 반전이나 거대한 전환이나 놀라운 장면 하나 없이 3시간을 이어가는 강력한 서사의 힘이 느껴지는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바냐 외삼촌> 공연은 일본 현대연극의 진척 양상 가운데 일부를 영화로 보여준다. 일본과 한국, 대만의 배우들뿐 아니라, 수어(手語)로 의사를 전달해야 하는 장애인 배우까지 등장하는 <바냐 외삼촌>. 일본어, 한국어, 중국어, 영어, 수어가 동원되는 다국적 언어와 의사소통은 21세기 세계의 좁지만 복잡다단한 양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하지만 <바냐 외삼촌>에서 체호프가 전달하는 본령은 의사소통의 불가능성이나 인간적인 유대의 지속적인 단절과 그것의 불가능한 결합이다. 그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길을 떠나 유령처럼 길을 떠돈다. 가후쿠가 바냐 배역을 못 맡겠다는 대목은 인상적이다.
 
"바냐를 연기하면 내 안에 자리하고 있는 바냐가 자꾸만 끌려 나와!"
 
쓰라린 상실과 돌이킬 수 없는 인연과 관계, 소멸한 시간과 청춘, 영원히 사라진 꿈으로 무너져버린 인간 바냐의 자화상이 가후쿠 자신과 겹치는 것이다. 그런 바냐(가후쿠)를 장애인 연기자가 수어로 위로하고 천상의 구원을 설파하는 장면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다채로운 서사 형식으로 21세기 대중을 위로하는 영화다.
드라이브 마이 카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하마구치 류스케 바냐 외삼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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