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_20세기 '구보':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1934년, 25살의 젊은 작가 박태원은 단편소설집을 출간한다. 표제작은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일제의 침탈이 20여 년 째 지속되던 당대 조선 땅에서 문단에 충격을 던지던 카프 그룹의 경향문학과는 한참 동떨어져 있었다. 참여문학과 상반된 모더니즘 계열로 분류된 본 작품은 일본 유학을 다녀온 26살 지식청년 '구보'의 하루 일상을 독백과 함께 이어나간 작품이다. 그 후 몇 년 후부터 박태원은 대표적 친일작가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기구한 행보는 이걸로 끝이 아니다. 그는 경향문학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해방 이후 한국전쟁 당시 가족을 모두 버리고 단신으로 월북한다. 그 결과 전후 한국에선 친북작가로 이중낙인이 찍힌다. 그리고 북한에서도 우여곡절을 겪으며 말년엔 건강을 크게 해쳐 굴곡 많은 생을 보내야 했다. 그 자신은 순수문학을 추구했으되, 그의 생애는 지독히 정치적인 문제로 표류를 거듭한 셈이다.
 
기구한 운명의 작가가 쓴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정작 읽은 이는 적은 편이지만 제목만은 하나의 아이콘 화되었다고 볼 정도로 유명세를 얻었다. 그런데 이 단편의 제목에서 영감을 얻은 한편의 영화가 소설 공개 후 87년 만에 등장한다. 제목조차 <소설가 구보의 하루>다.
 
21세기의 구보는 20세기 전반기, 식민지 치하에서 방황하던 구보처럼 작가로 성공하길 꿈꾸지만 영 풀리지 않는 신세를 공유한다. 20세기 구보가 일본제국의 식민경영으로 인한 왜곡된 당대 조선의 사회체제로 인해 좌절을 거듭한다면, 21세기 구보는 문화예술이 철저히 자본주의 시장질서 내에 종속된 구조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소설가 박태원이 순수문학을 추구하던 당시, 자신의 자전적인 캐릭터로 구보를 창조했지만, 그 또한 당대의 시대상황에 종속되고 그 영향 아래 있을 수밖에 없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21세기의 구보 또한 한 세기를 경과했지만 여전히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실의와 방황을 거듭하는 중이다. 등단은 했지만 이후 제대로 세상에 알려질 행보를 이어가진 못하면서 점점 위축되고 신경질적이 되어간다. 시대와 불화한 '레디메이드 인생'은 배경은 변했지만 여전하다.
 
2_한 세기를 뛰어넘는 '구보'의 캐릭터 묘사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는 아침에 눈을 뜬 구보가 밤늦은 시각 귀가하는 순간까지 소설의 주인공 구보의 하루 일상을 현대적으로 재현하려는 분위기로 가득하다. 흑백으로 필터링 된 화면과 의도된 구도심 풍경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초반에 구보가 들르는 동네에 마지막 남은 흑백전문 현상소처럼) 한 세기의 시차 간극을 좁히면서 원작에서 구보의 행보를 연상하게 한다.
 
① 20세기의 구보와 21세기의 구보
 
1934년의 구보 : 직업과 아내를 갖지 않은 26살, 20세기의 구보가 식민지 경제구조 하에서 지식청년을 수용할 일자리 부족 상황에 처해 있다.

2021년의 구보 : 직업도 없고 애인과도 헤어진 30살 전후, 취업절벽으로 비명을 지르는 세태에서 홀로 동떨어진 존재로 그려진다. 순수문학을 추구하지만 문단은 상업성을 좇기 급급한 상태라 몇 년째 그의 원고들은 출판될 기미가 없다. 그래서 사실상 은둔에 가까운 생활을 이어가는 상태다.
 
② 열등감과 욕망을 공유하는 구보, 첫 번째
 
1934년의 구보 : 고독을 피하려 경성역 삼등대합실에 가지만, 거기서 만난 중학 시절 열등생이 예쁜 여자와 동행인 것을 보고 물질에 약한 여자의 허영심을 생각한다.

2021년의 구보 : 서울극장 앞에서 혼자 호떡을 먹던 중 몇 년 전 이웃이던 남자가 애인과 함께 가다 자신을 알아보고 청첩장을 주자 성공도 사랑도 얻지 못한 자신에게 자격지심을 느낀 나머지 청첩장을 버리고 사라진다.
 
③ 열등감과 욕망을 공유하는 구보
 
1934년의 구보 : 다방에서 만난 시인이며 사회부 기자인 친구가 돈 때문에 매일 살인강도와 방화범인의 기사를 써야 한다는 사실을 애달파 하고, 즐겁게 차를 마시는 연인들을 바라보면서 질투와 고독을 동시에 느낀다.

2021년의 구보 : 출판사 편집장인 선배가 경영자 방침 때문에 자신의 원고를 책으로 펴내기 어렵다고 전하면서 대신 돈벌이를 위해 자서전 작업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제안하자 담배만 피워댄다. 우연히 동석하게 된 출판사 사장에게 자신의 다른 원고를 보여줄 기회를 노려볼까 궁리하지만 성공한 다른 작가가 자리에 오자 열패감에 자리를 뜬다.
 
④ 외로움을 숨기지만 참을 수 없는 구보  

1934년의 구보 : 구보는 옛사랑을 추억하며 자신의 용기 없는 약한 기질로 인해 여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을 느낀다. 전보배달 자동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오랜 벗에게서 한 장의 편지를 받고 싶다는 생각에 젖는다.

2021년의 구보 : 구보는 헤어진 애인에게 실수인 척 전화를 걸어보거나, 그녀가 보고 싶다며 약속을 정하자 냉큼 달려간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전 애인과 약속장소를 떠나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친구와 오랜만에 연락하고 함께 술을 마신다.
 
⑤ 그래도 내일을 기약하는 구보
 
1934년의 구보 : 구보는 새벽 종로 네거리에서 이제는 생활도 갖고 창작도 하리라 다짐하며 집으로 향한다.

2021년의 구보 : 구보는 마로니에 공원에서 편집장인 선배가 제안했던 자서전 대필을 해보겠다는 연락을 한 뒤 전철 막차를 타러 역으로 향한다.
 
이렇게 영화는 원작과의 시차를 뛰어넘어 20세기의 구보와 21세기의 구보 간의 연속성을 촘촘하게 설정해놓는다.
 
3_구보의 하루에 '홍상수 적인 것'을 첨가하다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는 원작의 기본 뼈대에다 오늘날 우리가 '홍상수적'이라 쉽게 언급하는 몇 가지 양식미적 특징을 결합시켰다. 대부분의 장면이 롱 테이크 기법을 구사해 촬영되었고, 홍상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특정 유형의 캐릭터들이 겹쳐 봬는 연상 효과도 상당하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익숙한 공간 배경들에서도 '홍상수'라는 이름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법하다. 흑백 화면이 홍상수 영화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그 영향 아래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당연하다. 이런 유사성은 이 영화에 관한 평가에서 양날의 칼로 작용할 법하다.
 
<소설가 구보의 하루>는 하지만 세상이 좋아질 것이란 기대는 체념한 채 냉소와 위악을 탑재한 '홍상수 유니버스'의 등장인물들과 다소 다른 결말을 취한다. 
 
흑백의 정제된 이미지와 치밀하게 계산된 컷 촬영은 정지화면이나 스틸 이미지로 보면 더 근사해 보일 듯하다. 마음에 드는 몇 장면은 액자로 걸어두고 싶을 정도다. 이는 장면 자체의 완성도 외에도 작품의 성격을 규정하는데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홍상수 영화가 당일날 기본 설정과 구도 외에는 즉흥연기를 유도해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데 반해 <소설가 구보의 하루>는 엇비슷해 보여도 철저히 계산된 구도와 시나리오 아래 이뤄진 작업임을 금방 간파할 수 있다. 비슷하게 느껴지는 화면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실제 그 장면에 도달하는 과정은 정반대에 가까운 셈이다. 
 
4_21세기 판 TV 문학관 체험처럼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소설가 구보의 하루"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필름다빈

 
영화는 원작의 문장과 묘사가 전해주는 질감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려는 욕망을 종종 드러낸다. 심지어 몇몇 장면은 시간의 벽을 넘어 20세기와 21세기의 구보가 만나는 것 같은 기시감을 조성하기도 한다. 구보는 소설가 김훈처럼 여전히 원고지에 직접 원고를 필사하고, 아날로그 카메라를 사용한다(하지만 그렇게 정성들인 원고는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카메라는 결국 처분하게 된다). 구보의 아날로그적 면모와 취향은 정신없이 돌아가는 현대 사회의 흐름을 부정하고 자신만의 미의식 세계에 갇혀 있는 정신구조를 은유하는 장치로도 활용된다.

하지만 원작의 구보가 심드렁하고 충동적인 속물성과 질투, 자괴감 같은 사적 감정들을 문학에서 허용된 독백 형태로 독자에게 실시간 공유해주는데 비해 영화 속 구보는 가시적 이미지로는 확인되면서도 주인공의 속내를 온전히 관객이 파악할 순 없다. 
 
원작과 영화, 20세기와 21세기의 구보 둘 다 제대로 자신을 증명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욕구불만에 가득 찬 남성 지식인 군상 극이란 접점은 공유되고 있다. 하루 동안의 방황 끝에 어떻게 보면 타협으로 보일 수 있는 도전을 결심하고, 그 길에 나설 결심을 다짐하는 결말 또한 그렇다. 술자리에 합석한 친구 이몽의 극단 후배 지유가 구보에게 그의 첫 단편집(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출판된 그의 글이기도 한)에서 기억하던 구절을 들려주는 순간은 결말에 대한 복선이자 구보가 생각을 다소나마 바꾸게 하는 막대 구부리기의 추 역할을 해준다.
 
"익숙하지 않은 것이 설렘과 기대를 준다. 이미 익숙해졌다면, 그 익숙함을 지우려 노력해야 한다."
 
자신도 어느새 기억하지 못하던 처음 작품 구절을 듣고 난 구보는 하루 내내 방황하며 갈팡질팡하던 번뇌의 무게를 다소나마 덜어낸 것처럼 보인다. 물론 자신만의 고집을 아직 꺾을 생각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이제 구보는 자신의 그 굳은 고집을 부드러운 직선으로 변형시켜 장기전에 돌입할 태세를 갖추려는 듯 보인다.

독립영화계에서 변화무쌍한 연기력을 선보이고 있는 박종환 배우가 인상적으로 소화한 21세기의 구보는 12월 겨울 초입에 아직 길을 찾지 못한 이들에게 어설픈 위로보다는 공감을 준다.
 
<작품정보>
 
소설가 구보의 하루 Sisyphus's vacation
2020|한국|드라마
2021.12.09. 개봉|73분|12세 관람가
감독 임현묵
주연 박종환(구보 역)
출연 김새벽(지유 역), 기주봉(서대표 역), 문창길(동교수 역), 류제승(이몽 역),
김경익(기영 역), 정민결(수연 역)
제작 영화사 다동극장
배급 필름다빈
소설가 구보의 하루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소설가 박태원 임현묵 감독 박종환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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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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