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오리지널 <패싱> 스틸

넷플릭스 오리지널 <패싱> 스틸 ⓒ Netflix

 
*주의! 이 기사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1920년대 뉴욕, 남달리 밝은 피부색을 가진 '아이린(테사 톰슨)'은 이를 활용해 백인 전용 호텔이나 헤어숍을 드나드는 패싱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더위에 지쳐 들어선 한 호텔에서 어린 시절 친구였던 '클레어(루스 네가)'를 만난다. 자신처럼 밝은 피부색을 지녔고 이를 이용해 백인 남편 '존(알렉산더 스카스가드)'과 결혼한 후 흑인이지만 백인으로 살아가며 경제적으로도 어린 시절의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한 삶을 누리고 있었던 클레어. 그런 클레어를 보면서 아이린은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클레어 역시 아이린을 보면서 마음만큼은 편했던 흑인으로서의 활기찬 삶을 그리워하기 시작하며 두 여인의 삶은 송두리째 흔들리기 시작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인 <패싱>은 1929년에 발간된 넬라 라슨의 소설 <패싱>을 영상화한 작품이다. <아이언맨3> <트랜센던스> <고질라 VS. 콩> 등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 레베카 홀의 연출 데뷔작이기도 한 <패싱>은 선댄스 영화제에서 큰 화제를 모았고,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도 초청받은 바 있다. 이처럼 <패싱>이 많은 주목을 받은 것은 아무래도 제목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충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흔히 '패싱'(passing)은 흑인이 자신의 인종적 정체성을 숨기고 백인 행세를 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패싱을 원래 자신의 소속과 다른 사회집단의 구성원인 양 행동하는 일이라는 보다 넓은 의미로 이해하며, 정체성을 구분하는 경계들과 그 경계를 넘어설 때 발생하는 불안감을 차분하게 펼쳐 보인다.

실제로 영화는 크게 인종, 성별, 그리고 계급이라는 세 가지 경계를 오가는 패싱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포스터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흑인과 백인의 인종적 경계를 넘어서는 패싱이다. 작중 흑인에서 백인으로의 자아 변화를 경험하는 인물, 곧 백인으로 패싱 가능한 중산층 흑인 여성의 이미지를 재현하는 인물은 아이린과 클레어 두 명뿐이다. 흥미롭게도 <패싱>은 단 둘 밖에 없는 여성을 여러 측면에서 대조하며, 그것만으로도 98분 동안 극을 전개할 원동력을 이끌어낸다.

우선 아이린을 보자. 중산층의 흑인 남편과 결혼한 아이린은 시내에 나갈 때처럼 필요한 경우에는 백인으로 패싱하지만, 흑인의 정체성을 스스로 받아들인다. 그러면서도 완전히 백인으로 행세하는 클레어 같은 이들이 자신들의 출신과 인종에 대한 자부심이 없다고 비판하는 기만적인 이중성을 보여준다. 이는 그녀가 패싱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됨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인종의 구분과 차별을 내면화하고, 그 틀 내에서 안정된 삶을 누리려는 보수적인 인물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아이들의 선물을 사러 간 서점이나 더위 때문에 잠시 들린 호텔 카페, 심지어 길가에서까지 항상 자신이 사실 백인이 아닌 흑인임을 들킬까 전전긍긍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반면에 남편과 함께 있거나 무도회에서 춤출 때 성적인 매력을 숨길 생각이 없고, 금주법이 있는 시대에 술을 언제 어디든 갖고 다니는 클레어는 아이린과 정반대인 이국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또한 그녀는 과거사를 꾸며내고 모든 사람과의 인연을 절단한 후 백인으로 살아왔지만, 공허한 삶에 지쳐 다시 흑인 사회에 편입되려는 욕망을 거침없이 드러내면서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하기도 한다. 즉, 본인도 패싱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백인과 흑인의 이분법적 구분을 떨치지 못한 아이린과 달리 클레어는 정해진 인종이라는 틀에 스스로를 국한시키지 않으며 그 틀까지도 극복하려 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패싱> 스틸

넷플릭스 오리지널 <패싱> 스틸 ⓒ Netflix

 
그러다 보니 아이린에게 자신을 감싸고 있는 사회적 기준을 전복하고 교란될 수 있는 클레어의 유동적인 정체성은 다양한 감정 안에서 인식된다. 분명 클레어는 호텔 카페와 스위트 룸, 그리고 아이린이 주최한 무도회 등에서 주변인의 정체성을 위협하고 그들의 삶을 혼란에 빠뜨리는 위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아이린은 같은 조건 속에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사는 클레어를 보면서 부러움과 질투심, 또 앞서 본 것처럼 경멸감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감정에 사로잡히고 불편해진다. 영화는 이처럼 패싱을 두고 비슷한 듯 서로 전혀 다른 삶의 방식과 태도를 보이는 이들의 차이로부터 부각되는  미묘한 긴장감과 감정선을 다양한 형태로 변화시키면서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이에 더해 아이린의 복합적인 감정선은 성적인 기제와 계급적인 차원이라는 두 가지 방향으로 뻗어나가면서 이야기를 층층이 쌓는다. 클레어와 아이린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서는 동성애적 감정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남편인 '브라이언(안드레 홀란드)'에게 클레어를 설명할 때 아이린은 그녀와의 관계를 모호하게 얼버무리며, 남편이 그녀를 멀리 하라고 눈치를 줘도  식사나 무도회에 계속해서 초대며 클레어의 존재를 쉽사리 삶의 울타리 밖으로 내치지 못한다. 남편이 클레어와 친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 가정부와 클레어가 따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자 굳이 가정부를 다시 일하도록 시키는 것 역시 클레어에 대한 애정이 단순한 우정 이상의 성적 매료 내지는 욕망으로 읽힐 수 있다. 클레어도 마찬가지다. 아이린에게 보낸 연애편지에 가까운 내용으로 가득한 편지를 보내거나, 그 편지에 답장하지 않는  아이린을 갑자기 방문해 속상한 마음을 토로하는데 이 대목 역시 상당한 성적인 긴장감을 유발한다.

또한 영화는 계급적 차원에서의 패싱도 간과하지 않으며 특히 계급 이동의 열망이 인종적, 성적 정체성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예를 들어 마을의 한 흑인이 백인들에게 맞아 죽었고 시체가 훼손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브라이언은 아이들에게 흑인으로서 1920년대 미국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려 한다. 반면에 아이린은 철저히 그 현실을 아이들로부터 감추고자 한다. 흑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듯 보이면서도 필요에 따라 백인이 될 수 있기에 그녀에게는 흑백의 구분보다도 안정된 중산층으로서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더 시급한 것이다. 본인이 비난하던 클레어조차 흑인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상황에서 흑인으로서의 정신적 유산을 상실한 아이린의 이러한 패싱은 이 작품이 단순히 피부색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덕분에 자칫 100여 년 전을 살았던 두 여성의 이야기에 그칠 뻔했던 영화는 더욱 현대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작중 삼중의 패싱은 인종 정체성의 경계를 허물고, 기존의 성과 계층적 정체성의 구분을 가로지르면서 아이린과 클레어가 확신하고 있던 자아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든다. 곧 스스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존재의 정의를 의심하게 만들고, 그 정의와 정체성을 결정해 온 기존의 사고방식에까지 의문을 던진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패싱> 스틸

넷플릭스 오리지널 <패싱> 스틸 ⓒ Netflix

 
특히 영화의 결말은 그 질문을 형상화한 듯 보인다. 클레어를 향한 아이린의 감정이 어떤 의미로든 나날이 강렬해지고 격화되는 가운데, 영화는 끝내 흑인 사회로 편입되지 못한 채 끝나버린 클레어의 비극이 누구의 탓인지 명확히 보여주지 않는다. 클레어에 대한 어떤 진실도 명료히 규명하지 않는다. 대신 그저 추측만 가능하도록 심증이 될 법한 장면들을 열거하고, 하얀 눈이 내리는 뉴욕이 내려다 보이는 가운데 눈송이가 화면을 가득 채워 온전히 하얗게 만들면서 끝난다. 마치 인종, 젠더, 계급과 그 외의 경계선이 없는 완전히 새로운 도화지에서 개인의 온전하고 진정한 정체성을 그려보라는 듯이.

따라서 영화 <패싱>은 사회적 차원에서 정의된 획일적이고 안정된 자아개념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해방되고, 더 나아가 고정되지 않은 유동적인 다중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시도하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나날이 한 개인을 규정하고 그에게 덧입혀지는 정체성이 계속해서 늘어난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문제제기와 메시지는 꼭 흑인이나 여성이 아니더라도 <패싱>을 곱씹어 볼만한 이유가 된다.

<패싱>의 이야기는 이 작품이 그 미묘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방식 덕분에 더욱 인상적으로 느껴진다. 우선 일반적인 상업영화에서 잘 사용되지 않는 1.33:1 비율을 선택한 것이 눈에 띈다. 이 화면 비율은 배우들의 얼굴과 표정을 오롯이, 또 집중적으로 가득 담아내면서 그들의 내적 혼란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다. 또한 테사 톰슨과 루스 네가의 절제되어 있지만 깊이 있는 퍼포먼스가 유달리 빛나는 배경도 되어준다.

흑과 백을 외에 그 어떤 색채도 더하지 않은 연출도 1920년대 미국을 살아가는 흑인의 삶을 효과적으로 환기시킨다. 조명의 위치와 광원의 종류에 따라 필요한 순간마다 두 여성의 피부색을 조정하면서 패싱이라는 행위가 한 명의 개인에게나 사회적 차원에서 갖는 의미를 시각적으로 표현해낸다. 단순히 피부색을 조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극명히 대비되는 명암의 효과를 활용해 아이린과 클레어의 빛과 그림자로 가득한 심정을 끄집어 내 보여주기까지 한다.

사실 <패싱>을 오락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재밌다고 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위대한 개츠비>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와 경제 대공황 사이의 미국 역사, 사회, 경제에 대해 알아야 하듯이, <패싱> 역시도 대략적인 사전 정보를 요구하기에 다소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드라마틱한 전개 대신 일상의 모습을 담는 구성도 한몫하며, 설명보다는 관조가 주를 이루는 화법은 영화를 루즈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한 영화 기법이 주는 인상과 영향에 시선을 맡기다 보면 <패싱>의 매력에 빠져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두 여성의 일상을 자연스럽게 따라가며 그들의 급변하는 심정을 고스란히 느끼고 공감하면서 스스로의 모습까지 돌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원종빈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potter1113)와 블로그(https://blog.naver.com/potter1113)에 게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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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읽는 하루, KinoDAY의 공간입니다. 서울대학교에서 종교학과 정치경제철학을 공부했고, 지금은 영화와 드라마를 보고, 읽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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