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종성은 세종의 4군6진책으로 확보한 지역으로 우리나라 최북단 지역이다. 미암 유희춘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 19년가량의 유배생활을 해야했다. (출처 서울대 규장각)
▲ 함경도 남북관도 고지도 종성은 세종의 4군6진책으로 확보한 지역으로 우리나라 최북단 지역이다. 미암 유희춘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가 19년가량의 유배생활을 해야했다. (출처 서울대 규장각)

관련사진보기

 
16세기 사림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로 이어지는 4대 사화는 정치, 사회적으로 중요한 배경이 된다. 네 번의 사화를 겪으면서 사림들이 당했던 정치적 타격은 거의 궤멸 수준에 가까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이 시대 사림들은 어떻게 이를 극복하며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일까?

미암 유희춘은 4대 사화를 놓고 보면 을사사화 시기인 1547년 정치적 탄압을 받고 그의 나이 34세에 유배 길에 오른다. 그리고 1567년 54세까지 무려 19년의 유배생활을 견뎌야 했다. 그것도 우리나라 최북단 함경도 종성에서 대부분의 유배생활을 했으니 자신의 일생을 놓고 볼 때 인생의 가장 황금기를 유배지에서 보낸 셈이다.

16세기는 사화의 시대이기도 하였다. 이 시기 중앙의 정치무대로 진출하려던 사림들은 사화로 인해 막대한 타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림들은 이를 통해 다음 세대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 시기 일어난 사화는 기득권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훈구파와 이에 도전하는 신진세력인 사림파와의 갈등과 싸움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그런데 이 시기의 사화가 단순히 정권을 잡기 위한 두 당파간의 정권 다툼 같은 것이었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을사사화와 양재역 벽서사건

1544년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였다. 그러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 11살의 명종이 즉위하였는데 어린 명종을 대신해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문정왕후는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윤임, 유관, 유인숙 등 대윤 일파를 제거하라고 지시한다. 이 밀지를 받은 이기·임백령·정순붕·허자는 문정왕후에게 변고를 알렸는데 그것은 윤임 등이 다른 왕자를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에 대해 유희춘·백인걸·김난상 등은 그 부당함을 지적하였는데 그것은 죄목이 분명하지 않고 밀지에 의해 처리할 사항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에 문정왕후는 크게 노하여 곧바로 유희춘·백인걸 등 대간 9명을 파직하고 윤임 등은 대역죄로 능지처사 된다.

이로부터 2년 후인 1547년 9월 양재역에서 벽서사건이 일어난다. 서울의 관문인 경기도 과천에 있었던 양재역은 공무를 수행하는 자가 말을 갈아타던 곳으로 그곳에 문정왕후와 그 일파를 비난하는 벽서가 나붙은 것이다. 윤원형 일파는 이 벽서사건을 이용하여 윤임의 잔당 세력과 정적들을 일제히 제거하게 되는데 유희춘은 이언적, 노수신 등과 함께 유배형을 받게 된다.

함경도 종성 유배생활

유희춘은 처음에 제주도로 유배 갔으나 제주도가 고향인 해남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지가 바뀌게 된다. 고향 해남과는 극과 극의 가장 먼 유배지였다.

미암은 함경도 종성에서 대부분의 유배 생활을 보낸다. 함경도 종성은 두만강에 접한 외진 곳으로 옛날에는 여진족의 땅이었으나 세종의 4군 6진 정책으로 설치한 6진중 하나인 최북단의 가장 오지였다.

유희춘에게 이곳의 생활은 외롭고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미암이 유배지에서 고통의 세월을 이겨 낼 수 있었던 힘은 '학문'이었다. 유희춘은 「주자대전」과 「주자어류」를 읽고 또 읽으며 교정하고 주해하였고 「자치통감」도 읽었다. 옛날부터 종성은 풍속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숭상하고 글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고을 사람들에게 미암은 공부를 가르쳤다. 1612년 종성에서 귀양살이를 한 김시양이 편찬한 「부계기문」에는 미암이 이곳에서 오직 학문에 열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미암은 155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지만 가볼 수도 없는 가혹한 시간을 견디어야 했다. 그는 유배지에서 여막을 치고 상을 치렀다. 미암의 어머니상은 부인 송덕봉이 홀로 치러야 했다. 2년 후에는 절친한 친구이자 사돈인 김인후마저 세상으로 떠나는 등 유배지에서 가혹한 운명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유배의 시간이 한 사람에게는 현실로부터의 격리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학문적으로 온전히 자신의 시간에 몰입할 수 있어 큰 성과를 내기도 한다. 미암 역시 인고의 시간이라 할 수 있는 유배기간을 통해 자신의 학문을 성숙시킬 수 있었고 해배 후 관직에 복귀하였을 때 경연관으로서 그의 학문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된다.

사림들이 사화의 시기에 유배지나 지방에서 성리학의 학문 보급을 통해 지방의 학문성장에 도움을 주고 문풍을 주도하며 새로운 주도 세력으로 발전한 것은 이처럼 처절하게 부딪혀 싸워야 했던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림들이 꿈꾸는 세상은?
 
성리학을 창시한 주희을 글을 모은 책으로 유희춘은 유배시에 주자대전을 주해하였고 1575년(선조8)에는 조헌등과 함께 문집과 어류로 나누어 간행하기도 하였다. (출처 고산유물전시관)
▲ 주자대전 성리학을 창시한 주희을 글을 모은 책으로 유희춘은 유배시에 주자대전을 주해하였고 1575년(선조8)에는 조헌등과 함께 문집과 어류로 나누어 간행하기도 하였다. (출처 고산유물전시관)

관련사진보기

 
16세기 사림들의 성리학적 군주관은 군주가 진정한 정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신하와 마찬가지로 '치인(治人)'을 위한 '수기(修己)'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들은 군주제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절대권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후 조선의 정치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들 사림들이 추구하는 세상은 그동안의 절대왕권에 새로운 변화를 꿈꾼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 개국초기 정도전이 실현하려 했던 왕권과 신권의 조화로운 사회 구현이 사림들을 통해 좀더 구체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림들은 사화라는 정치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학문을 심화시키며 성리학적 이상 사회 실현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당시 사림들이 주도하는 새로운 세상은 도치주의(道治主義)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삶을 위한 실천적인 성리학의 실현이었다.

사림들은 사화를 통해 그들이 추구하는 시대적 이념을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를 통해 사림들이 추구하는 시대정신을 찾아본다면 그것은 불의에 굴복하지 않는 선비정신이다. 사림들이 추구하는 이념이 물론 절대 선은 아니었을 것이다. 쓸데없는 명분론에 집착하여 당쟁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주장을 끝까지 지켜내려 한 그 절의의 정신은 선비정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었다 생각된다.

사림들이 향촌 자치질서를 통해 백성(민본)을 위한 사회질서 구현을 추구하려 했던 것도 의미있게 살펴볼 부분이다. 이러한 향촌질서가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어쨌든 향촌자치적 질서 추구는 왕(중앙) 중심의 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질서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훈구파와 같은 기존 세력과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패권정치의 모습으로 전락하지 않았다면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통해 민(백성)을 위한 정치를 실현하려 했던 사림들의 목표는 평가받을 수 있지 않았을까?

태그:#을사사화, #종성유배, #4대사화, #사림, #성리학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