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엔 초등학교에도 과목별 선생님이 있고 체벌도 사라졌지만 과거엔 담임 선생님 한 명이 국어부터 체육까지 전 과목을 다 가르쳤고 '사랑의 매'라 불리던 체벌도 엄연히 존재했다. 물론 교육계의 아픈 현실이었던 '촌지문화'도 암암리에 퍼져 있었다.

아이가 새 학년으로 올라가면 부모들은 돌아가면서 학교에서 '학부모 면담'을 했다. 부모들은 1년 동안 아이를 가르칠 담임 교사의 교육방침을 듣고 선생님 역시 부모로부터 아이들의 특징이나 주의사항 등을 듣는다. 하지만 학부모 면담 시즌이 되면 학부모들은 다른 의미로 긴장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사의 성향에 따라 과연 봉투나 선물을 준비해야 하는지, 준비한다면 어느 정도의 성의(?)를 보여야 하는지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차승원의 첫 단독주연 영화 <선생 김봉두>(2003)는 촌지 유무에 따라 아이들을 노골적으로 차별하던 비리교사 김봉두가 시골 분교로 파견가면서 순박한 시골마을 아이들에게 교화되는 과정을 그린 휴먼 코미디다.
 
 <선생 김봉두>는 대종상 시나리오상과 함께 전국 24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선생 김봉두>는 대종상 시나리오상과 함께 전국 240만 관객을 모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 시네마 서비스

 
모델 출신 배우 최초의 성공 신화 차승원

배우 강동원, 김영광, 이수혁, 김우빈은 모델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모델들은 기본적으로 뛰어난 피지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배우가 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런 이유로 모델 출신 배우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는데 모델 출신 배우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차승원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모델로 활동한 차승원은 10년 가까이 톱모델로 활동하다가 1997년 배우로 전향했다.

초기에는 188cm의 우월한 기럭지를 바탕으로 <해가 서쪽에서 뜬다면>, <자귀모>, <세기말> 등에서 주로 엘리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차승원이 배우로 인정받기 시작한 작품들은 <신라의 달밤>,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특사>로 대표되는 코미디 영화들이었다. 훤칠한 미남이 몸을 던지는 코미디 연기를 하면서 관객들은 차승원을 모델이 아닌 배우로 보기 시작했고 그는 <광복절특사>로 2003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남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주연배우로 올라선 후에도 이성재, 김승우, 설경구 같은 선배 배우들과 함께 했던 차승원은 2003년 <선생 김봉두>를 통해 처음으로 단독주연에 도전했다. 장규성 감독의 두 번째 장편 영화였던 이 작품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차승원을 비롯해 시골 아이들을 연기한 아역배우들의 열연에 힘입어 전국 240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특히 장규성 감독은 <선생 김봉두>로 2003년 대종상 영화제 시나리오상을 수상했다.

<신라의 달밤>부터 <선생 김봉두>까지 4편의 영화를 연속으로 히트시킨 차승원은 다양한 장르의 영화에 출연하며 연기영역을 넓혔다. 범죄사극 스릴러 <혈의 누>와 미스터리 코미디 <박수칠 때 떠나라>, 탈북 멜로(?) <국경의 남쪽>, 휴먼 드라마 <아들> 등이 대표적이었다. 특히 2010년에는 드라마 <최고의 사랑>의 톱스타 독고진 역을 통해 '인생작'이라 불러도 좋을 만큼 어울리는 명연기를 펼쳤다.

차승원은 2013년 장진 감독과 재회한 <하이힐>과 강우석 감독의 <고산자, 대동여지도>가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서 슬럼프에 빠지는 듯했다. 하지만 2015년부터 5개의 시즌에 걸쳐 제작된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을 통해 차장금, 차줌마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2019년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리> 이후 연기 활동이 뜸했던 차승원은 지난 4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된 영화 <낙원의 밤>에서 북성파 2인자 마상길 이사를 연기하며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시골 아이들의 순박함에 교화된 비리교사
 
 아이들과 친해지고 난 후 김봉두를 연기한 차승원은 눈빛부터 변한다.

아이들과 친해지고 난 후 김봉두를 연기한 차승원은 눈빛부터 변한다. ⓒ 시네마서비스

 
학부모들로부터 무분별하게 촌지를 받고 아이들을 차별하던 비리교사 김봉두(차승원 분)는 학부모의 항의 방문을 계기로 전교생이 5명뿐인 시골 분교로 파견을 간다. 마을 사람들은 훤칠한 젊은 선생님 김봉두를 환영하지만 정작 김봉두는 열악한 환경의 새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독수리 오형제를 연상시키는 5명의 아이들은 반장, 부반장, 미화반장, 청소반장, 청소 부반장으로 직책을 정해주자 마치 국회의원에라도 당선된 것처럼 좋아한다.

<선생 김봉두>의 초·중반은 시골 학교로 온 김봉두가 학교와 마을 사람들에게 적응하면서 겪는 에피소드들을 위주로 관객들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특히 김봉두가 인터넷은커녕 담배 한 갑조차 구하기 힘든 외진 시골 마을에서 혼자 고스톱을 치며 원맨쇼를 펼치는 장면은 <선생 김봉두> 최고의 웃음포인트로 꼽힌다. 2003년 당시 전국 PC방을 강타했던 고스톱 게임의 효과음을 따라 하는 차승원의 개인기는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냈다.

아이들에게 촌지를 걷는 것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한 김봉두는 분교를 폐교시키는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 하지만 김봉두의 감언이설에 흔들리는 부모들과는 달리 아이들은 학교를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똘똘 뭉치고 김봉두도 조금씩 아이들의 순수함에 교화된다. 학교 부지를 매입해 서바이벌 게임장으로 만들겠다는 사업가에게 받은 촌지로 아이들의 선물을 사는 모습은 김봉두의 달라진 면모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다.

코미디 배우의 이미지가 강하던 차승원이 배우로서 한 단계 도약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장면은 바로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이다. 김봉두가 다니던 초등학교 소사였던 아버지는 병상에 누워서도 김봉두에게 제자를 보여 달라고 했고 김봉두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제자들을 보여줄 수 있었다. 최노인(변희봉 분)을 비롯한 제자들과 맞절을 하다가 일어나지 못하고 오랜 시간 엎드려 흐느끼는 장면에서는 차승원의 진정성 있는 연기가 돋보였다.

<선생 김봉두>는 코미디 영화로는 이례적으로 OST도 많은 화제가 됐다. 특히 자전거 탄 풍경이 부른 <보물>은 노래 제목은 잘 몰라도 "술래잡기 고무줄 놀이 말뚝박기 망까기 말타기"라는 도입부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엔딩곡으로 쓰인 양희은의 <내 어린 날의 학교> 역시 영화의 여운을 더욱 오래 느끼게 해주는 명곡이다. 이 외에도 더 클래식 출신의 박용준과 기타리스트 함춘호 등도 <선생 김봉두> OST에 참여했다.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가 인정한 아역배우
 
 이재응은 200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역배우 중 한 명이었다.

이재응은 200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아역배우 중 한 명이었다. ⓒ 시네마서비스

 
경험이 부족한 신예 배우들이 대선배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것 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일이다. <선생 김봉두>에서 김치 없이도 라면을 맛있게 먹는 연기로 김봉두와 우정을 쌓았던 양소석 역의 이재응은 훗날 한국 최고의 감독과 배우가 되는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로부터 이미 그 떡잎을 인정 받았다(이재응의 '김치 없이 라면 맛있게 먹는 연기'는 최민식과 함께 출연한 2004년작 <꽃피는 봄이 오면>에서 또 한 번 빛을 발한다).

순박한 미소 속에 감춰진 쓸쓸한 눈으로 나이답지 않은 오묘한 분위기를 풍기던 아역배우 이재응은 <선생 김봉두>에 이어 <살인의 추억>에서도 오프닝 꼬마 역을 야무지게 소화했다.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는 <살인의 추억> DVD 코멘터리에서 이재응의 영민한 연기를 칭찬하며 훗날 큰 배우로 성장할 가능성을 언급했다. 특히 봉준호 감독은 이재응에게서 국민배우 안성기의 아역시절이 보인다고 극찬하기도 했다. 

2003년을 두 편의 영화로 화려하게 수 놓은 이재응은 <효자동 이발사>에서 송강호의 아들, <꽃 피는 봄이 오면>에서 최민식의 제자, <사랑해, 말순씨>에서 문소리의 아들로 출연하며 순조롭게 성장했다. 특히 2006년에는 <사랑해 말순씨>를 통해 춘사영화제 아역상과 아시아 태평양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06년 <괴물>에서 한강 노숙자 소년을 연기한 이재응은 2009년 <국가대표>에서도 스키점프 대표팀 막내 봉구 역으로 열연했다.

하지만 이재응의 승승장구는 2010년대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국가대표> 이후 4년의 공백기를 가진 이재응은 2014년 < 18 : 우리들의 성장 느와르 >에서 주인공 동도를 연기하며 복귀했지만 전국 15개 관에서 1124명의 관객밖에 모으지 못했고 다시 활동을 중단했다. 어느덧 한국 나이로 31세가 된 이재응은 2019년과 올해 두 시즌에 걸쳐 제작된 넷플릭스 드라마 <좋아하면 울리는>에서 좋알람 개발자 천덕구를 연기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선생 김봉두 차승원 이재응 변희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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