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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자 또는 피보험자가 (중략) 청약일 이전에 암 또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감염의 진단 확정을 받은 후 이를 숨기고 가입하는 등의 뚜렷한 사기 의사에 의하여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회사가 증명하는 경우에는 보장 개시일부터 5년 이내(사기 사실을 안 날부터는 1개월 이내)에 계약을 취소할 수 있습니다."

금융감독원(이하 금감원)이 만든 보험사 표준약관 중 '사기에 의한 계약' 조항이다. 별다른 이상이 없어 보이는 약관 조항이지만, 문제는 간편 심사 보험에도 이 조항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간편 심사 보험은 말 그대로 일반 보험에 비해 심사 조건을 완화한 보험으로, 통상적으로 '3·2·5' 고지 항목에만 해당하지 않는다면 가입할 수 있다.

'3·2·5' 고지 항목은 3개월 이내 입원·수술 및 추가검사 필요 소견, 2년 내 입원·수술 이력, 5년 내 암 진단·입원·수술 이력 등이다. 에이즈는 이 고지 항목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HIV 감염인은 간편 심사 보험 가입 시 에이즈 병력 사실을 고지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모순적이게도 약관에는 에이즈 병력 미고지 시 회사가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는 내용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는 각 보험사가 보험 상품 약관을 만들 때 표준약관을 준용해 만들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일반 보험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표준약관 문구를 간편 심사 보험 약관에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상충된 내용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금감원 관계자 A씨는 "(보험사가) 표준약관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며 "가입 시 보험사가 물어보지 않았다면 그 내용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보험을 취소시킬 수 없다"고 설명했다. 애초에 '사기에 의한 계약 조항'은 "단순 고지의무 위반이 아니라 보험사를 적극적으로 속일 의도가 있는지를 보는 것"이기에 이 경우에는 법적인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소비자 권리 침해 및 차별... 문제투성이 보험 약관

그러나 법적인 효력이 없다 해도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보험에 대한 지식을 갖춘 전문가가 아닌 일반 소비자는 이 조항을 보고 간편 심사 보험 가입 시에도 에이즈 병력을 고지해야 한다고 혼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약관은 소비자의 보험 선택에 있어 필수적인 자료고, 정확한 내용이 기재돼야 한다는 점에서 해당 조항은 보험 소비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금감원 관계자 B씨는 "약관에 계약 전 알릴 의무 조항이 따로 있기 때문에 '사기에 의한 계약'에 있는 문구로 인해 HIV 감염인이 (자신의 에이즈 병력을) 반드시 고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을 것 같다"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는 답변만을 반복했다. 애초에 "소비자가 약관을 찾고 이 조항을 찾아낼 것 같지는 않다"며 소비자의 권리 침해에 대한 우려를 일축했다.

한편, 해당 조항을 보험 회사가 이용할 여지도 있다. 만약 보험사에서 이 조항을 근거로 HIV 감염인의 계약을 취소한다면, 아무리 법적인 효력이 없는 조항이라 한들 약관에 제시돼있는 이상 일반 소비자는 문제를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HIV 감염인 단체 활동가 C씨는 "보험사가 이 조항을 근거로 계약을 취소할 때 보험사에 다시 문제를 제기하거나 따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금감원은 각 보험사에 약관 개정 요구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금감원 관계자 A씨는 "보험사에서 HIV 감염 사실을 물어보지 않았는데 가입 취소를 하는 등의 사례가 많이 발생하고, 민원이 여러 건 제기된다면 권고할 수는 있다. 그때 판단할 사항이다"라고 말하며 당장은 개정 요구를 할 수 없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금감원은 실손보험 표준약관에 대해서도 동일한 입장을 취했다. 현재 실손보험 표준약관에는 HIV 감염으로 인한 치료비가 보험사에서 보상하지 않는 항목으로 들어가 있다. 단, 의료법에서 정한 의료인의 진료상 또는 치료 중 혈액에 의한 HIV 감염은 진료기록을 통해 객관적으로 확인되는 경우는 보상한다.

성 접촉으로 인한 감염과 의료 감염으로 인한 감염을 다르게 취급한다는 점에서 위 조항이 에이즈에 대한 차별적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금감원 관계자 B씨는 성접촉으로 인한 HIV 감염과 달리 의료행위로 인한 HIV 감염은 본인 부주의라고 볼 수 없기에 이에 한정해 보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같은 맥락에서 '본인 부주의'라고 볼 수 있는 다른 성병은 표준약관에서 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설명은 설득력을 잃는다. HIV 감염인 단체 활동가 A씨 역시 "다른 성병과 비교했을 때 차이가 있다는 것이 차별적으로 느껴진다"고 비판했다.

사실 HIV 감염으로 인한 치료비는 국가에서 전부 부담하고 있기 때문에 이 비용을 실손보험에서도 보장한다고 해서 개인이 얻을 수 있는 실익은 크지 않다. 금감원 관계자 B씨는 해당 조항은 "만약 보장 받지 못하는 의료비가 있다면 (의료 감염에 한해) 보장"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보험사가 부담하는 금액이 적다면 굳이 HIV 감염으로 인한 치료비를 보상에서 제외할 이유가 없어 보이나 금감원 관계자 B씨는 "(HIV 감염 비용을) 다 풀기는 어렵다는 논의가 있었던 것 같다"며 무리라는 입장을 보였다.

사회적 약자에게 문제 제기 책임 떠미는 금감원

약관 수정이 어려운 이유로는 아직까지 관련 민원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 또한 꼽혔다. 민원이 들어와야 문제 개선이 가능하다는 것이지만, 이는 HIV 감염인들의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처사로 보인다.

HIV 감염인 단체 활동가 A씨는 "개인이 민원을 제기하려면 보험과 관련된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자료를 수집해야 해 나서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국 청소년‧청년 감염인 커뮤니티 '알' 소성욱 활동가는 민원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감염 사실이 노출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주변에 (에이즈 병력이) 알려지게 됐을 때 실제로 관계가 끊어진다거나 하는 불이익이 있다"며 HIV 감염인들이 직접 민원을 제기하기는 매우 어렵다고 답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했을 때 금감원에서는 민원이 없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취를 취하지 않기보다 차별적인 보험 약관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인 대처를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소성욱 활동가는 "준공기업이 문제를 알고 있음에도 바꾸지 않고 도리어 사회에서 목소리 내기 힘든 사람에게 '네가 먼저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식의 태도를 보이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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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에이즈, #보험, #H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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