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민주당 인권위원회 위원장)이 1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열린 ‘성소수자 혐오 차별 근절과 인권 보장을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민주당 인권위원회 위원장)이 18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이룸센터에서 열린 ‘성소수자 혐오 차별 근절과 인권 보장을 위한 긴급토론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 박정훈
 
지난 18일 권인숙 의원 페이스북 라이브로 진행한 '성소수자 혐오차별과 ·인권 보장을 위한 긴급토론회'를 봤다. 보다가, 이전에도 느꼈던 점에 대해 남긴다.

우리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절차로서 토론회나 간담회를 진행한다. 해당 문제와 관련된 여러 이해관계자, 당사자들을 불러서 관련된 정보와 통계, 현장의 이야기를 공유한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 문제를 공적 언어로 정제하며 공론장에서 (반드시) 논의해야 하는 의제로 끌어올린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보이는 각 발언자들의 공통된 태도가 흥미롭고, 사실은 마음이 아프다.

전문가와 당사자가 참가하는 토론회의 차이 

주제를 막론하고 발언자의 유형별로 공통적인 태도가 있는데, 연구자나 활동가/정치가 등의 관계자들은 도입부부터 문제를 정확히 짚는다.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로 이야기한다. 그들의 그런 태도와 분위기는 '현실의 어떤 부조리를 문제로 지목하여 토론회/간담회까지 열었는데, 저런 태도와 분위기로 말할 만한 일이지 암', 이런 식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당사자 정체성으로 토론회/간담회 등의 공론장에 선 사람들은 완전히 다르다. 부드러운, 또는 밝은 '도입부'가 있다. 심각한 현장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한 표현으로 밝게 전달한다. 시종일관, 심각하지 '않다'. 사실은 심각하기 어렵다. 심각해지면, 듣는 이들의 귀가 닫힐 수 있기 때문이다. 결정권자이자 청중인 그들의 귀와 마음은, 열기엔 너무나 어렵고 닫히기는 참 쉽다.

한국의 정치 현장에선 (다소 웃긴) 편견이 있었고 지금도 일부 남아있는데, '문제의 당사자들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일 것'이란 고정관념이다. 문제에 직접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굉장히 이기적일 것이고, 혹여라도 공론장에서 마이크를 쥐게 된다면 폭주할 것이라는 편견. 때문에 당사자들은 거의 배제되어 왔고 그들을 대신해 소위 '전문가'라고 불리는 어떤 사람들, '객관적'일 것이라 '기대'되고 '예상'되는 어떤 사람들에게 마이크가 돌아갔다. 당사자들의 언어는 충분히 '정제되지 않았고, 그래서 공론장에 적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공론장에 간혹 등장하는 당사자들을 보면 그렇지 않다. 발달장애인의 가족이자 돌봄노동자 당사자인 장혜영 의원, 해고노동자이자 여성 당사자인 류호정 의원, 성소수자 문제를 이야기하는 비온뒤무지개재단의 상임이사 한채윤, 청년으로서 청년 주거문제와 비영리 주거모델을 이야기하는 민달팽이주택협동조합의 이사 이한솔, 오픈 퀴어로서 1인 가구와 여성, 성소수자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차해영 등 공론장에서 통계와 정보를 근거로 객관적으로 발언하는 당사자들은 너무 많아서 모두 나열할 수도 없다. 나열할 수 없을 만큼 많은데, '당사자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다'라는 명제는 과연 참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그러나 틀린 명제, 고쳐져야 할 편견임과 별개로 그것들은 당사자들에 영향을 준다.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편견이기 때문에, 그 편견에 의한 공기 중의 바이러스같은 기대가 당사자들에게 영향을 준다. 당사자들은 나와 우리의 문제를 공론장에 나가 말할 기회를 얻게 되면, 그것은 다시 안 올 수도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 때문에 듣는 이들의 귀에 '들리게끔' 해야 한다는 절박함과 사명감을 갖게 된다. 남의 귀에 들리는 언어란 밝고 부드러운 언어다. "그렇게 울고 화내면서 얘기하면 누가 들어주냐"라는 메세지를 언어적/비언어적으로 숱하게 접했기 때문이다.

오늘 한채윤 상임이사는 토론회의 소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다른 주제로 토론하고 싶습니다. 차별금지, 인권 보장 이런 거 말고 다른 주제."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 '사람을 차별하지 말라'는 주제는 몇 번이 아니고 몇 십년을 말해온 주제다. 똑같은 주제로 공론장을 열 때마다 "천천히", "알아 듣게", "(기억이 안 나는데) 뭐라고 했지?"와 같은 반응을 보고 들어왔다. 그럴 때마다 화가 나지만, 그래도 결정권자는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므로 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다 되가던 일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으므로 참으면서 부드럽게 때로는 밝게 그리고 객관적으로 '다시' 얘기하는 거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자동적으로 그렇게 하게 된다. 이 문제에 절박한 건 나와 우리 뿐이니까. 자동적으로, 밝은 태도를 유지하며 어떻게든 들리게 하려 노력하게 된다.

"울면 안 돼, 언성을 높이면 안 돼, 비이성적으로 보이거나 소위 떼를 쓰는 것처럼 보이면 안 돼."

'상식'적인 수준에서 이것이 문제라는 것을 명백히 증명해내야만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스로를 검열한다. 이 문제가, 이 현실이 저들의 귀에 가닿지 못 한다면 그것은 결론적으로 내 탓, 우리 탓이 되기 때문에. 내가 스스로의 모습 그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싶다는 나와 우리의 소박하고 일반적인 희망사항이 계속 희망사항으로만 남아버릴 수도 있기 때문에. 이미 살고 싶은 곳에서 살고 있지 않냐고 묻는다면, 안철수 국민의당 서울시장 후보가 "퀴어특구를 지정(하여 퀴어 퍼레이드를 그곳에서) 하자. 즐기고 싶은 분들은 그곳으로 가시라"라고 말했던 것을 대답으로 대신 한다.

모든 공론장에는 사전 기획회의가 있다. 그 회의에서 각각의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드러내기로 약속하는 정보와 언어들을 정한다. 이 과정에서 당사자들의 언어와 태도는 심각하지 않고 지나치게 무겁지 않은 기조를 유지하기로, 소위 그것을 '전략'이라 생각하면서 논의할 수 있다. 하지만, 친구가 그랬다. 그건 전략이 아니라 '생존'이라고. 현실을 생생하게 전하면서 들리지 않는 외침으로 남는 것보다는 정제된 현실이나마 전하여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이후의 일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에.

덧붙이는 글 | 개인블로그에도 게재되었습니다.


#성소수자#차별금지법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