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스포츠 선수들은 더 이상 자신을 불러주는 팀이 없거나 활동할 수 있는 무대가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은퇴를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은퇴시기를 미리 정해놓고 그 시기가 됐을 때 팬들의 박수를 받으며 현역 생활을 마감하는 선수는 그 종목에서 탁월한 성과를 올렸던 일부 스타 선수들 밖에 없다. 그들 중에서도 우승이나 1등 같은 최고의 자리에 오르며 은퇴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이승엽은 '국민타자'라는 명성답게 KBO리그 최초로 은퇴투어까지 하며 누구보다 화려하게 은퇴시즌을 보냈지만 그가 은퇴한 2017년 삼성 라이온즈는 10개 구단 중 9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LG 트윈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박용택은 2019 시즌을 앞두고 LG와 2년 계약을 체결하면서 마지막 2년 동안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하지만 LG는 그 2년 동안 우승은커녕 한국시리즈 무대조차 밟지 못했다.

이처럼 아무리 대단한 스타라도 우승이라는 최고의 자리에서 선수생활을 마감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번 시즌 여자프로농구에서는 팀의 핵심선수로 활약하며 챔피언 결정전 우승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미련 없이 유니폼을 벗은 선수가 나왔다. 챔프전 활약상만 보면 은퇴 결정이 지나치게 이른 것처럼 보이는 삼성생명 블루밍스의 맏언니 김보미가 그 주인공이다.

'유망주' 김보미 앞을 번번이 가로 막은 무릎 부상
 
 김보미는 17시즌 동안 활약하면서 신한은행을 제외한 5개 팀에서 활약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김보미는 17시즌 동안 활약하면서 신한은행을 제외한 5개 팀에서 활약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 한국여자농구연맹

 
수피아여고 출신의 김보미는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우리은행 한새(현 우리은행 위비)에 지명돼 프로에 입단하자마자 세 시즌 동안 두 번이나 챔프전 우승을 경험했다. 프로 초년생이었던 김보미의 활약은 미미했지만 당시 우리은행에는 김영옥, 이종애, 김계령, 김은혜 등 전·현직 국가대표 선수들이 즐비했다(2006년 겨울리그에는 WKBL 역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로 꼽히는 타미카 캐칭도 있었다).

2007년 겨울리그까지 주전과 식스맨을 오가며 우리은행에서 순조롭게 성장하던 김보미는 2007-2008 시즌을 앞두고 트레이드를 통해 금호생명 레드윙스로 이적했다. 매 시즌 우승을 다투던 강호 우리은행에서 뛰던 김보미는 상대적으로 성적에 대한 부담이 적은 금호생명에서 많은 출전시간을 얻었다. 특히 주전으로 도약한 2009-2010 시즌에는 10.8득점 3.97리바운드 2.3어시스트로 데뷔 후 최고의 성적을 올리기도 했다.

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대표팀에 선발될 정도로 빠른 성장세를 보이던 김보미는 2010-2011 시즌 무릎 부상을 당하며 시즌 절반을 걸렀고 이에 따라 성장 속도도 눈에 띄게 둔화되고 말았다. 해마다 성적이 떨어지던 김보미는 2013-2014 시즌을 앞두고 FA 자격을 얻어 KEB하나은행(현 하이원큐)으로 이적하며 재도약을 노렸다. 하지만 이적 첫 시즌 왼쪽 무릎 십자인대 부상으로 수술을 받으면서 김보미는 다시 한 번 좌절했다.

한창 좋았던 시절 30분 가까운 출전시간을 기록하며 평균 10득점 이상을 책임지던 김보미는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에 경기당 15분 출전도 쉽지 않은 평범한 식스맨으로 전락했다. 김보미는 2014년 하나은행으로 이적한 정선화의 보상 선수로 KB스타즈 유니폼을 입었다. 프로 데뷔 후 9년 동안 세 번의 이적을 통해 네 번째 팀을 맞은 김보미는 어느덧 WKBL을 대표하는 저니맨이 됐다.

KB에는 김보미와 같은 포지션에 강아정이라는 젊고 유능한 포워드가 있었다. 김보미는 KB 이적 후 세 시즌 동안 식스맨 및 백업슈터로 활약했지만 크게 돋보이는 성적을 올리진 못했다. 그나마 고무적인 부분은 한 때 18.5%까지 떨어졌던 3점슛 성공률을 다시 30% 수준으로 끌어 올리며 무릎부상 후유증을 털어내고 '3&D자원(3점슛과 수비를 전문적으로 하는 선수)'으로서 경쟁력을 찾았다는 점이다. 

은퇴 시즌, 챔프전 우승 차지하며 '유종의 미'
 
 김보미는 모든 스포츠 선수들이 꿈꾸는 장면을 만들어 내며 기분 좋게 코트를 떠났다.

김보미는 모든 스포츠 선수들이 꿈꾸는 장면을 만들어 내며 기분 좋게 코트를 떠났다. ⓒ 한국여자농구연맹

 
2016-2017 시즌이 끝난 후 고려대 코치였던 배경한(현 무룡고 코치)과 백년가약을 맺은 김보미는 2017-2018 시즌 6.85득점 3.62리바운드 3점슛 성공률 35%를 기록하며 KB의 챔프전 진출에 기여했다. 하지만 김보미는 2018년4월 보상선수 지명에 이은 트레이드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친 끝에 5번째 팀 삼성생명으로 이적했다. 이렇게 김보미는 여자부 6개구단 중 신한은행 에스버드를 제외한 모든 팀의 유니폼을 수집했다.

삼성생명은 김보미 이적 첫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우리은행을 꺾고 챔프전에 진출했지만 공교롭게도 챔프전에서 만난 상대가 직전 시즌까지 김보미가 활약했던 KB였다. 삼성생명은 박지수와 카일라 쏜튼을 앞세운 KB에게 3경기 평균 득실점 마진 -17.67점을 기록하며 3연패로 우승도전에 실패했다. 그리고 삼성생명은 코로나19로 조기 종료된 2019-2020 시즌 9승 18패로 최하위에 머물고 말았다.

이번 시즌을 앞두고 삼성생명과 1년 재계약을 맺은 김보미는 시즌 종료 후 은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동료 선수들은 맏언니 김보미에게 은퇴선물로 우승반지를 안겨주자고 의기투합했지만 삼성생명은 정규리그 4위로 간신히 플레이오프행 티켓을 따냈다. 많은 농구팬들이 우리은행과의 플레이오프가 김보미의 은퇴무대가 될 거라 예상했지만 삼성생명은 1패 후 연승을 거두며 김보미의 은퇴 무대를 챔프전으로 미뤘다.

정규리그 통산 6.04득점 2.75리바운드를 기록했던 김보미는 챔프전 5경기에서 12득점 4.6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기록지에 나타난 성적도 준수했지만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와 숨이 턱 끝까지 차 올라도 다시 숨을 가다듬고 코트를 뛰어다닌 투혼은 동료들에게 큰 힘이 됐다.  특히 5차전 4쿼터 중반 약 1분 30초 동안 홀로 7득점을 몰아 넣는 김보미의 원맨쇼는 챔프전 활약의 백미였다.

지난 1999년 선동열이 28세이브를 올리고 은퇴를 선언했을 때 한신 타이거즈를 이끌던 고 노무라 카츠야 감독은 "세상에 시속 150km를 던지는 투수가 은퇴하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한탄했다. 삼성생명의 임근배 감독과 구단 관계자, 그리고 농구팬들 역시 챔프전에서 평균 12득점을 올린 김보미의 은퇴가 매우 안타까울 것이다. 하지만 김보미는 "이제 농구는 쳐다보기도 싫다"는 말을 남기고 웃으며 쿨하게 코트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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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농구 2020-2021 여자프로농구 삼성생명 블루밍스 김보미 은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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