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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관을 기울이자 맑은 초록빛이 흐른다. 부리로 흘러내린 찻물이 숙우의 품에 차오른다. 뚜껑의 손잡이를 검지로 살포시 눌러주며 다관을 수직에 가깝게 기울인다. 다관이 찻물을 완전히 비워낸다.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다관이 빈 몸으로 받침대 위에 내려앉는다.

다도를 배워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저절로 동작이 느려지고 신중해졌다. 물욕을 흔들어 깨우는 다이아몬드의 반짝임도 없고, 영혼을 현혹시키는 금붙이의 요란함도 없는데, 투박한 흰 도자기가 세상 소중한 것인 양 나는 애지중지 다루고 있다. 낮은 몸체와 쭉 뻗은 손잡이,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 겸손한 희읍스름한 빛깔, 짤룩한 주둥이, 풍만한 가슴에 솟은 젖꼭지처럼 앙증맞은 방울을 단 뚜껑. 다관은 제 모양의 앉음새만으로도 주위 공기를 정갈하게 다듬었다.

요즘엔 가만히 있는 것을 볼 기회가 없다. 세상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고 나도 수시로 움직여야 한다. 그래서일까. 한 치의 들썩임도 허용치 않겠다는 다관의 묵직함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 무게중심이 확실하다는 게 이토록 평화롭다는 걸 이제 알겠다.

이상하게 집에 들어가기 싫었다. 그게 그렇게 서글프고 화가 났다. 온통 두렵고 싫은 것투성이인 세상에 유일하게 내가 맘 편히 머물 수 있는 곳이 좁고 낡은 집뿐인데, 그곳에 가기가 싫다니. 그래서 평소 가지 않던 길로 무작정 걸었고 거기서 한적하고 널찍한 찻집을 발견했다. 너무 지쳐서, 어디라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고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왜 집이 싫었을까. 그렇다고 밖이 좋은 것도 아닌데. 나는 오롯이 앉아 다관을 들여다본다. 어느 순간 그것이 하나의 건물로 보인다. 저 안에 들어가면 얼마나 아늑할까. 어느 방향으로든 찌를 수밖에 없는 직선은 손톱만큼도 존재하지 않는, 저 고즈넉한 곡선의 세계 속에 내 몸을 동그랗게 말아 숨길 수 있다면, 그 포근함은 얼마나 진할 것인가.

숙우의 찻물을 찻잔으로 옮긴다. 또 한 번의 기울기가 필요하다. 숙우가 몸을 굽힌다. 나는 옆에서 손잡이를 받칠 뿐이다. 숙우의 공손한 인사가 끝났다. 숙우도 텅 비었다. 숙우의 빈 몸에 손끝을 갖다 댄다. 찻물이 떠난 걸 아직 모르는지 여전히 온기로 덥혀있다. 몸이 차차 식으면서 숙우는 얼마나 외로워질까.

숙우는 한숨 식히기 위해 거쳐 가는 공간이다. 그래서 숙우는 꽁꽁 싸매는 법을 모른다. 찻물이 얼마나 차오르든 본인이 가질 수 없는 존재임을 태어날 때부터 깨우쳤을 것이다. 얼마나 뜨거운 열기가 오든 숙우는 그것을 포옥 감싸 안으며 동시에 자신이 푹 잠긴다.

내 인생엔 숙우가 있었던가. 아니다. 그저 펄펄 끓는 열정과 들입다 삼키려는 성급함만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데이고 속살이 벗겨졌나보다. 서둘러 내 것으로 만들려는 이기심이 나를 다치게 하고 말았다. 내 손안에 들어온 건 한 방울도 놓치기 싫었다. 무작정 놔주는 건 손해라고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스스로를 깊은 물 한 가운데 가둬버리고 말았다. 작은 우물처럼 보이는 다기들조차 때때로 공중에 띄워져 물줄기를 만들 줄 아는데 내가 뭐라고 그랬을까.

물주전자에서 다관으로, 다관에서 숙우로, 숙우에서 찻잔까지 건너온 녹차가 둥글게 고여 있다. 이제 마지막 기울기만 남았다. 나는 찻잔이 놀라지 않게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들어올린다. 잠시 표면이 얄랑거리며 찻잔 속 고요함을 헹군다. 마침내 찻잔과 입을 맞추는 순간이 왔다. 나는 부끄럼을 타듯 시선을 찻잔 밖으로 던지며 잔입술을 가볍게 문다. 이내 찻물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씁쓸한 맛도 얼마든지 향긋할 수 있다. 왜 그걸 모르고 단맛만 찾았을까. 음미할 새도 주지 않고 혀를 취하게 만드는 그 직설적인 맛을. 혀끝을 앞니 뒤에 대고 미세하게 문대어본다. 찻물이 이 사이에 골고루 스며든다. 투명한 맛이 혀에 더께처럼 붙어 있던 묵은 침을 벗겨낸다. 맑고 묽은 침이 새로 솟아 입안을 씻긴다. 차가 지나간 입안이 산뜻하다.

지나간 자리마저 산뜻한 사람이 되기란 나에게 너무도 요원한 일이다. 상대방을 제대로 보기도 전에 말을 섞고 표정을 내보이고 서로의 감정을 건드렸다. 아무리 즐겁게 웃고 떠들어도 뒷맛까지 개운한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사탕을 주고받으면 그만인 줄 알았다. 설탕으로 뒤덮인 혀는 텁텁하고 깔깔했지만 애써 외면했다. 그런 관계가 오래되자 어느덧 물렸다. 사탕을 굴리는 동안은 그런대로 버틸 만 했지만 사탕이 녹고 나서는 음미할 만한 관계가 없었다.

찻잔이 떠난 입안은 헛헛하기보다 가뿐하다. 뭐라도 채워야겠다는 조급함이 없다.
찻잎만 남은 다관에 다시 물을 채우려는데 찻집 주인이 와서 바로 뜨거운 물을 붓지 말고 숙우에서 식혔다가 넣으라고 말해준다. 김이 펄펄 나는 뜨거운 물은 녹차 잎에게 너무 뜨겁다고 한다. 찻물을 우려낼 땐 무조건 뜨거운 물을 넣어야 좋을 거라는 나의 무지가 뒤로 물러나며 작은 깨달음이 나를 밝힌다.

그러고 보니 다관에 든 것은 세작, 어린잎이었다. 그 여린 잎 앞에서 나는 어떻게든 진한 찻물을 우려낼 욕심을 부렸다. 세작이 내어준 그 푸른빛을 마시고도 어째서 나는 하는 생각마다 이렇게 혼탁할까.

또 한 번 찻물이 우러난다. 내가 할 일은 다소곳이 기다리는 것뿐이다. 녹차가 맹물에게 전하는 향과 맛과 색을 상상해본다. 찻물이 왜 그렇게 애틋한가 했더니 뺏는 것이 아니라 전하는 것이어서 그랬나 보다. 찻잎은 기꺼이 뜨거운 물밑까지 몸을 푹 담그고, 그 배려를 받아 찻잎을 충분히 머금은 물은 차가 된다. 둘 사이에는 치열함이 아니라 은근함이 존재한다. 야단스럽지 않고도 이렇게 완벽할 수 있다는 것이 신비로워서 한참 뜸을 들인다.

아차. 2분 동안 우려낼 것을 넋 놓고 8분이나 보내버렸다. 서둘러 찻물을 숙우에 따라낸다. 잇따라 찻잔으로 옮긴다. 부산을 떨었더니 다관과 찻잔이 부딪치고 만다. 쨍 소리로 차분함이 달아나버린다. 뒤늦게 침착한 자세로 찻잔의 홑입술을 내 입술 사이로 밀어 넣는다. 슬쩍 흘러든 찻물 맛이 전과 같지 않다. 떫은맛이 쌉쌀한 맛을 감춰버리고 내주지 않는다. 내가 사색과 망상의 경계에서 방황한 탓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늘 그럴 듯 했다. 알 것 같다 싶으면 예기치 못한 일에 뒤통수를 맞고 허둥거렸고, 이젠 다 됐다 싶어 고개를 들면 눈앞이 아득할 정도로 멀고 먼 길이 쭉 뻗어 나를 아찔하게 만들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찻물로 적셔진 마음 덕일까, 뭐 어떠랴 싶었다.

잔입술은 미세하게 바깥쪽으로 벌어져 있다. 그럼에도 자태가 되바라지거나 천박하거나 헤퍼 보이지 않는다. 꽃잎의 끝자락처럼 열린 그것은 일견 자애롭기까지 하다. 웬일로 여유를 부리나 했더니 요 잠깐 사이 내 마음도 조금은 바깥쪽으로 뻗은 것 같다.

마지막 찻물이다. 입안에 또 다시 찻물이 번진다. 딱히 삼킨 것 같지도 않은데 찻물이 헤실바실 없어진다. 나는 꾸준히 찻물을 홀짝인다. 한 시도 마른 입술을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점점 낮아지는 찻물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내 시선은 잔바닥에 꽂혀 있다. 울이라고 해봤자 내 검지보다도 길이가 짧은데 고임자리가 한없이 웅숭깊어 보인다. 이상하다. 순간 차와 눈이 마주친 것만 같다. 이제 내려놓을 시간이야. 아, 심장이 두근거린다. 끝이라는 것도 이렇게 가슴 설렐 일이던가. 나는 처음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을 때의 설렘 그대로 차와 이별한다.

떠나기 전, 나는 다기를 다정히 쓰다듬는다. 참 정적이고도 동적인 세계다. 일정하면서도 변동하고, 가붓하면서도 엄숙하고, 격정적이면서 관조적이며, 관능적이면서 동시에 정조가 엿보인다. 그 어떤 훌륭한 경치를 봤을 때도 이보다 흠뻑 정취에 젖었던 적은 없었다.

찻집을 나오는데 주인이 다음에 또 오라며 수제 쿠키를 건넨다. 나는 빙긋 웃으며 또 오겠다고 대답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전처럼 비참하지 않다. 삶이 허무하지도 않다. 기운 내라고 지치지 말라고 스스로를 몰아칠 필요도, 다독일 필요도 없었다. 나에게 필요한 건 반성도 참회도 각오도 다짐도 아닌, 찻물에 물드는 시간이었다. 찻집에 있는 동안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니 나는 참새의 혀를 닮은 어린잎들과 매순간 은밀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용한 미소에 입술이 달아오른다. 녹차의 온기가 아직까지 나를 뭉근하게 덥히고 있다.

태그:#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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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해지고 싶으면서도 다른 사람과 달라지는 것에 겁을 먹는 이중 심리 때문에 매일 시름 겨운 거사(居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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