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화를 보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천연색 앨범에 끼어있는 흑백사진 같은 불협화이며, 설렘과 두려움의 모순되는 양가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망각의 나락으로 던져진 추억과 관계를 소환하며, 완전히 변해버린 시공간과 인과율을 되살려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다가올 날들의 아픈 상처를 미리 재연하기도 한다.
 
왕가위 영화는 관객에게 깊은 내상을 남긴다. <아비정전>(1990)에서 그는 인간의 실존과 존재의 의미를 사랑에서 포착하려고 한다. 이것은 <중경삼림> (1994), <동사서독> (1995), <화양연화> (2000), <2046> (2004),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2008) 등에서 다채롭게 변주된다. 하지만 왕가위 영화의 본령은 사랑의 모순에서 찾는 인생의 본질이다.
 
<중경삼림>은 사랑을 잃은 두 남자의 다른 듯 닮은 이야기를 얼개로 진행된다. 1994년 4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5월 초하루까지 첫 번째 이야기가 펼쳐진다. 두 번째 이야기는 같은 해 5월 초하루에 시작하여 대략 1년 넘는 동안 진행된다. 사랑을 잃은 청춘들이 어떻게 새로운 사랑과 만나게 되는지를 유려하게 보여주는 영화가 <중경삼림>이다.

사랑의 유통기한: 메이와 지무
 
 
 영화 <중경삼림> 스틸 이미지.

영화 <중경삼림> 스틸 이미지. ⓒ (주)디스테이션

 
4월 1일 작별을 통보받은 사복경찰 223 하지무(금성무)는 갈피를 못 잡고 비틀거린다. 5년을 함께 한 연인 메이가 그를 떠난 것이다. 그는 메이 이외의 다른 선택지가 없다. 순정하고 소심한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메이 주변 사람들에게 밤마다 전화하는 것밖에 없다. 그것도 사태의 핵심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완곡어법으로 속내를 감춘다.
 
우리는 지무를 비난할 수 없다. 78억 지구인의 사랑법은 78억 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유통기한이 5월 1일까지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매일 산다. 1개월을 자신에게 부여하여 메이가 좋아했던 통조림에 예의를 갖추는 것이다. 더욱이 5월 1일은 지무 자신의 생일이며, 동시에 메이의 날, '메이데이'이기 때문이다. 그가 설정한 사랑의 유통기한 한 달!
 
그가 괴로운 마음으로 토로하는 사랑의 유통기한은 울림이 크고 깊다.
 
"사랑이 통조림에 들어있다면, 유통기한이 없으면 좋겠다.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의 유통기한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사랑의 인과율: 지무와 금발여인
 
지무가 범죄 용의자를 추격하다가 레인코트의 금발여인(임청하)과 스치듯 지나간다. 고층빌딩이 밀림처럼 솟아있는 홍콩의 번잡한 도로를 지나는 숱한 사람들. 그들은 어제도 오늘도 옷깃을 스치며 지나가지만, 거기서 맺어지는 인연은 흔치 않다. 정신없이 달려가는 지무를 뒤에서 지켜보는 금발여인. 그들의 관계는 어떤 인과율로 맺어질 것인가.
 
마약 밀매단의 일원인 그녀는 목숨이 위태롭다. 죽거나 죽이거나, 다른 선택은 없다. 온종일 생사의 갈림길을 넘나든 그녀가 바에 들어온다. 4월 30일 밤과 5월 1일 새벽. 지무가 그녀에게 다가간다. 그들은 이미 구면이다. 57시간 전에 지무는 금발여인과 0.01센티미터 거리를 지나쳤다. 인연은 물리적 거리와 무관하게 만들어지는 법 아닌가.
 
금발여인의 독백에는 사랑과 인연에 관한 대답이 들어있다.
 
"파인애플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늘은 좋아했다가, 내일은 다른 걸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중경삼림>의 첫 번째 이야기는 1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진행된다. 사랑의 상처를 견디면서 망각을 시도하는 지무. 금발여인과 지무가 만들어갈지도 모를 새로운 관계를 열린 결말로 포착하는 왕가위. 그렇게 홍콩의 메이데이는 다시 환하게 밝아온다.
 
사랑의 유효공간: 페이와 633
 
 
 영화 <중경삼림> 스틸 이미지.

영화 <중경삼림> 스틸 이미지. ⓒ (주)디스테이션

 
짧은 순간 스낵바 앞에서 지무와 페이(왕비)의 동선이 겹친다. 왕가위는 그녀가 경찰 633(양조위)과 사랑에 빠질 것이라고 예고한다. 지무처럼 633도 실연으로 괴로워하는 인물이다. 25,000피트 상공의 비행기에서 사랑하는 여인(주가령)을 만난 633. 하지만 그녀는 항로를 바꾸고, 그의 아파트 열쇠가 든 편지만 남기고 홀연히 사라진다.
 
스낵바의 새로운 얼굴 페이가 그의 공간에 들어온다. 떠나간 애인을 잊지 못하는 경찰 633의 순애보에 마음이 끌린 페이가 그의 아파트를 몰래 찾는 것이다. 그만의 고유하고 내밀한 거주공간을 조금씩 자신의 방식으로 바꾸는 페이. 우렁각시처럼 그녀는 그의 부재를 이용하여 아파트를 청소하고, 예전 여인이 남긴 흔적을 하나둘씩 지워나간다.
 
그들이 함께했을 공간을 바꿈으로써 그를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또한 그녀의 향기와 취향을 곳곳에 부설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새기려고 한다. 잘 만들어진 장면 하나. 돋보기를 든 그녀가 감식반 형사처럼 침대 곳곳을 뒤진다. 마침내 그녀가 괴로운 탄성을 내지르며 애꿎은 베개만 두드려댄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을 찾아낸 것이다.
 
633과 페이의 이야기에서 공간은 돌고 돈다. 비행기에서 633의 아파트로, 아파트에서 스낵바로, 캘리포니아 식당에서 비행기로 돌다가 마침내 스낵바로 회귀한다. 비행기를 매개로 시작된 633의 사랑은 여러 공간을 이동하다가 끝내 둘의 재회로 막을 내린다. 그들 각자 따로 존재했던 공간이 이제야 비로소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되는 것이다.
 
사랑의 소품
 
첫 번째 이야기에는 주목할만한 두 가지 소품이 등장한다. 공중전화와 삐삐다. 이제는 박물관으로 보내도 손색없을 지난 세기 90년대의 의사소통 장치다. 지무는 밤마다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구질구질하게 공중전화를 건다. 홀로 있음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탓이다. 옛 애인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 공중전화의 쓸모는 거기까지다.
 
반면에 그의 생일날 아침 6시 정각에 울려 퍼지는 삐삐의 신호음은 강력한 반전의 기제로 작동한다. 금발여인과 함께 따로 보낸 호텔의 702호에서 보내온 구조신호다. 지무의 25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통신기기. 고통의 눈물 대신 아픔을 달래도록 하늘이 그에게 선사하는 빗줄기도 그의 내면풍경을 적실하게 보여주는 소품으로 작용한다.
 
물은 두 번째 이야기에서도 강력한 소품으로 작용한다. 633의 아파트에 차고 넘치는 물의 향연.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만나게 되는 그와 페이. 633이 옛 애인과 장난치던 비행기는 페이의 손에 들려 방 안 곳곳을 날아다니다가 어항에 침몰한다. 663에게 남겨졌다가 페이에게 전해진 편지는 그들의 관계를 진척시키는 중요한 소품이다.
 
캘리포니아 식당에서 전달받은 페이의 편지를 633은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 굵은 빗줄기 속에 젖어가던 편지를 편의점에서 잘 펴서 말리는 633. 그것은 앞의 편지와 대비되면서 변화를 암시한다. 페이의 냅킨 편지는 그 이후에 633의 마음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 훗날 페이는 낡고 흐려진 옛날 편지 대신 새로운 편지를 써주려고 한다.
 
사랑에 관한 왕가위의 철학
 
<중경삼림>의 인물들이 스치고 엇갈리는 장면은 흥미롭다. 페이가 호랑이 인형을 사 들고 나오다가 금발여인을 지나치는 장면은 페이가 지무와 스치는 장면과 겹친다. 하룻밤 같은 공간에 자리하지만, 각자의 영역에서 따로 존재한 지무와 금발여인의 장면 역시 엇갈림을 구현한다. 캘리포니아에서 예정된 만남이 불발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오늘도 수많은 남녀가 거리에서 서로 엇갈리며 길을 간다. 다시 만나지 못할 사람들이지만, 아주 드물게는 남다른 인연으로 엮이기도 한다. 세상사는 근본적으로 미지의 영역에 속한다. 왕가위는 사랑과 인생의 그와 같은 본령을 신속한 크로키 형식으로 잡아내는 달인이다. 그는 우리 주변의 사소한 일상과 소품에서 사태의 고갱이를 잡아낸다.
 
왕가위가 인물들을 어긋나도록 설정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어떤 사랑도 쉽게 시작되지 않으며, 시작이 있다면 반드시 끝도 있기 때문이다. 열린 결말의 영화지만, 이들 네 사람의 미래를 낙관적으로 볼 여지도 적잖아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지독한 상실과 고통의 시공간과 인과율을 넘어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왕가위의 철학에서 출발한다.
 
새로운 형식이나 표현기법에도 관심이 있지만, 왕가위는 근접 촬영에 일가견이 있다. 거기서 드러나는 소품이나 장면처리 방식을 '그저' 스타일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재고해야 한다. 왜냐면 그 지점이 실제로는 우리가 흔히 놓치고 버벅대는 삶의 본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왕가위는 생의 밑바닥을 속속들이 파헤치는 거장이다.
왕가위 중경삼림 유효기간 인과율 유통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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