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실험영화의 개척자 한옥희 감독

한국 실험영화의 개척자 한옥희 감독 ⓒ 한옥희

 
전주국제영화제가 세계 여성의 날(지난 8일) 올해 특별전 프로그램 중 하나를 미리 공개해 시선을 끌었다. 개막을 한 달 넘게 남겨 놓고 있는 상태에서 다소 이르게 공개한 프로그램으로, 세계 여성의 날의 의미를 더하기 위해 조금 일찍 발표한 것이었다.
 
올해 준비한 특별 프로그램은 세계 영화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여성 독립영화 감독 7인을 집중 조명하는 특별전 '스페셜 포커스: 인디펜던트 우먼(Special Focus: I am Independent)'이다.
 
'스페셜 포커스'는 창의적인 실험과 혁신적인 정신을 지닌 독립·예술영화를 소개하는 전주국제영화제가 그해 가장 중요한 화두 또는 복기해야 할 주제를 제시하는 섹션이다. 올해 두 가지를 선보일 예정인데, 그중에서 여성감독 7인을 조명한 프로그램을 먼저 강조한 것이다.
 
전주영화제에 따르면 1950년대 활동을 시작한 이탈리아 다큐멘터리의 선구자 체칠리아 만지니부터, 20세기 이란 뉴시네마의 대표 감독이자 시인인 포루그 파로흐자드, 1970년대 미국 최고의 독립영화 중 한 편을 연출한 바바라 로든, 프랑스 뉴웨이브의 대표적인 스타이자 감독인 안나 카리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듀녜멘터리'라는 자신만의 영화 형식을 만든 감독 셰럴 두녜이, 뉴아르헨티나시네마의 초기 대표 주자로 손꼽히는 알베르티나 카리에, 그리고 70년대 여성실험영화집단 '카이두클럽'을 이끈 한옥희 감독 등이다. 반세기 동안 이어진 여성 감독 7인의 데뷔작과 대표작을 총망라했다.
 
이들 여성 감독들의 특징은 전위적이면서 억압적인 체제와 사회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을 영화로 표현해 냈다는 공통점이 있다.
 
여기서 가장 주목되는 인물은 1970년대 한국 여성영화운동의 출발과 같았던 한옥희 감독이다. 그는 1970년대 박정희의 유신독재 치하에서 여성실험영화집단 '카이두클럽'을 결성했고, 답답한 사회현실에 대한 저항의 의미를 전위성을 가미한 파격적인 실험영화로 담아냈다. 한국여성영화운동이 본격 태동하기 전, 가부장제가 만연한 시대를 영화로 돌파하고자 했던 영화운동의 선구자였다. 
 
 한옥희 감독 <구멍>

한옥희 감독 <구멍> ⓒ 한옥희

 
전주영화제는 "한국 실험영화의 내·외연을 확장하는 데 기여한 한옥희 감독의 단편 4편을 준비했다"면서 "여성 영화인의 활동과 실험영화 제작에 앞장선 개척자로 관객들의 의식을 실험하고 도전하는 저항 운동으로서의 영화를 만들며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영화적 실험을 감행했다"고 평가했다.
 
전주영화제가 준비한 영화는 억압받던 한국 사회에서 급진적이고 전위적인 영화 언어를 다각도로 표현한 작품 <구멍>(1973), <중복>(1974), <색동>(1976), <무제 77-A>(1977) 등이다. 1974년 남대문 신세계백화점에서 옥상에서 개최한 실험영화페스티벌 등을 통해 공개됐거나 이후에 제작된 영화들이다.
 
한옥희 감독의 실험영화들은 만들어진 지 40년을 넘어 50년이 다 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지금 상황에서 볼 때도 오래되거나 낯설지 않게 보인다. 그의 실험정신은 당시 시대보다 반세기 이상을 앞서간 것으로 보일 만큼, 파격적이면서 경이롭다.
 
지난해에도 인디다큐페스티벌이 한옥희 감독의 작품을 상영하는 등 국내 영화제에서 한국 전위영화와 실험영화 그리고 여성영화의 개척자였던 한옥희를 조명하는 프로그램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올해는 전주영화제가 그 역할을 맡은 셈이다.
 
새로운 영화 형식 제시하며 거침없는 도전
 
이번 특별전에서 소개되는 체칠리아 만지니는 세계대전 후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최초의 여성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도시 개발의 이면, 종교와 파시즘의 결탁, 노동자와 여성이 처한 현실까지 다양한 사회‧정치적 문제들을 과감하고도 독특한 연출력으로 풀어냈다.
 
 이란 포루그 파로흐자드 감독 다큐멘터리 <검은 집>

이란 포루그 파로흐자드 감독 다큐멘터리 <검은 집> ⓒ 전주영화제 제공

 
이란의 포루그 파로흐자드는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예술 세계에 영감을 준 감독인데,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인 <검은 집>(1962)은 한센병 환자 수용소에서 12일간 거주하며 그들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낸 다큐멘터리로, 당시 폐쇄적인 이란 사회의 정치와 종교를 향한 비판적 목소리를 은유적으로 표현했다.
 
배우로 더 잘 알려진 미국의 바바라 로든 감독과 프랑스 안나 카리나 감독의 대표작 2편 역시 독립·예술영화 역사에서 다시 새겨봐야 할 작품으로 조명한다. 셰럴 두녜이 감독은 1990년대 '뉴퀴어시네마'라는 용어가 등장한 시기에 아프리카계 미국 레즈비언으로 첫 번째 장편 극영화 <워터멜론 우먼>(1996)을 연출하고 직접 배우로 출연했다. 알베르티나 카리 감독은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에 부모가 납치된 자전적 경험을 투영한 영화 <금발머리 부부>(2003)를 만들었다.
 
전주국제영화제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이번 특별전에 대해 "당대에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시대적 관습을 이유로 작품이 가진 가치에도 불구하고 깊이 논의되거나 널리 상영되지 못했다"면서 "그러나 산업 논리와 관습에서 벗어나 기존에는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영화 형식을 제시하고 사회에서 금기시된 주제를 전면으로 내세우며 사회적 약자와 소외된 집단에 대한 공감을 이야기하는 등 거침없는 도전을 시도했던 작품"이라 설명했다.
 
이어 "실존과 자유 의지라는 인간 보편의 가치에 질문을 던지는 이들의 영화가 현재의 비평과 만나 새로운 영화 역사를 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전주영화제 한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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