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BS 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군부 쿠데타로 정권이 바뀌고 군부의 총격에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미얀마의 소식을 접했다. 방송 중 민주화를 갈망하며 한국 대사관 앞에서 호소하는 미얀마의 학생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22살의 대학생, 무엇이 그 학생으로 하여금 다른 나라의 대사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도와달라는 외침을 하게 한 것일까.  

방송을 들으며 그 나라의 상황이나 국민들이 처한 현실은 나와는 관련이 없는 이야기로 생각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부분이 없다고 생각했다. 국제관계를 모르지만,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라면 국제사회에 목소리를 내기에는 여러 가지 고려할 사항이 많을 것 같았다. 때문에 우리 정부가 그들의 입장을 옹호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1907년이 떠올랐다.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에게 호소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되었던 이상설, 이준, 이위종 특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힘 있는 다른 나라에 기대어 자국이 처한 상황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던 노력, 약자인 우리의 입장에서 조금이라도 영향력 있는 목소리를 기대하며 먼 길을 떠났던 사람들의 무거웠을 걸음이 떠올랐다. 더불어 나라의 운명을 걱정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했다.

당시 우리의 노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결국 실패했다. 그러나 1980년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는 달랐던 것 같다. 광주의 참상이 외신을 통해 먼저 알려졌다. 국민들이 분노했고 세계 각국에 우리의 실상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서구의 언론이 주목했고, 군부의 무도함을 비판하며 광주 시민들을 응원했다.

비틀린 상황에 놓인 자들의 실상을 알린다는 것, 그들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쩌면 기적을 만드는 시작일 수 있다. 누군가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응원한다는 메시지는 마지막 힘을 끌어 모으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도록 한 번 더 용기를 내게 만들기도 한다.

우연히 접한 영화 <12번째 솔저>는 죽음을 불사한 연대와 투쟁의 이야기다. 2차 대전 말, 독일은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독일군에 대항하기 위해 영국에서 훈련을 받은 노르웨이 병사들은 독일군 항공기지를 폭파하는 작전을 펼치기 위해 침투한다. 작전명 '마틴 레드', 그러나 이들의 작전을 도울 접선책은 이미 사망한 상태다. 접선에 실패하고 다시 배로 돌아왔지만, 누군가의 제보에 의해 이미 독일군 함대가 그들을 에워싸고 있다. 가져온 폭탄이 독일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배를 폭파하고 탈출을 시도했지만, 12명의 작전 대원 중 단 한 명만이 탈출에 성공한다.

"당신이 살아남은 데는 분명 이유가 있어요. 얀!"

주인공은 얀 발스루드(토마스 굴레스타드), 발가락을 총에 맞고 쫓긴다. 차가운 얼음 바다를 건너고 눈이 쌓인 산길을 내달리며 도망친다. 뉴스를 통해 그의 소식을 알게 된 네덜란드의 사람들은 그를 조용히 돕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살리기 위해 목숨을 담보한 전쟁에 참여한다. 나머지 한 명을 찾기 위한 독일군과 남은 한 명을 살리기 위한 노르웨이 사람들의 전쟁이 시작됐다. 전쟁은 이미 얀의 전쟁이 아닌 모두의 전쟁이 되었다.

"자네가 스웨덴으로 간다면 그놈에게는 치욕이 되는 거지."

독일군에게 발각되지 않도록 돕는 사람들 모두는 얀과 같은 병사가 되어 있다. 얀을 살려서 스웨덴으로 보내려고 노력하는 이들의 모습은 이미 병사와 다름없다. 서로 은밀한 사인을 주고받으며 음식과 옷과 양말을 전달하고 얀에게 희망의 소식을 알린다. 얀이 살아서 국경을 넘는 것은 그들에게는 국가의 승리이며 그들의 승리다. 얀은 이미 독일군이 가장 두려워했던 승리의 상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가 당신을 돕는 이유는 우리에게 기적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영화에서 순록의 행렬과 함께 탈출하는 얀의 모습을 웅장하면서도 비장하다. 순록이 이끄는 썰매를 타고 설원을 가로지르는 장면은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하다. 영화적 각색이 있었겠지만,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라는 사실은 장면 하나하나가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동물도 사람을 닮은 것일까? 그를 탈출시키려고 가장 튼튼하고 책임감 있는 순록에게 썰매를 연결했다는 순록 주인의 말처럼, 썰매가 분리된 것을 안 순록은 얀이 발각될 위기의 순간에 얀을 찾아온다. 얀은 자신이 탄 썰매의 끈을 순록에게 연결하고, 마지막 남은 총알 한 발을 쏘아 총성을 울려 순록을 출발시킨다.

드디어 기적이 일어났다. 그는 마침내 국경을 넘었고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승리의 상징이 되었다. 영화의 인물들, 얀과 노르웨이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잠시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상황에 처한 12번째 병사가 될 수 있을까. 죽음의 위협 앞에서 두려움을 감추며 그의 탈출을 돕는 또 다른 12번째 병사는 될 수 있을까.

자신과 국가를 동일시하는 사람들. 국가의 위기를 자신의 위기로 생각하는 사람들. 국가를 미래를 위해 자신의 미래를 담보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는 모습은 뭉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말라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배고픔과 추위, 제때 치료하지 못해 상처가 썩어가는 육신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극한의 상황에서 나타나는 인간 본연의 삶의 자세.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는 힘. 주어진 상황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운명을, 국가의 미래를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을 스스로 만들어낸 사람들. 모두가 12번째 병사가 되었던 노르웨이의 국민들을 통해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자연스럽게 우리 민족의 역사를 떠올리게 되었다. 농민운동부터 일제강점기와 독립까지, 이후 민주화를 위한 수많은 희생까지 떠올랐다. 돌아보니 우리의 역사에서도 무수히 많은 12번째 병사가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끈 것은 모두 그들의 희생 덕분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12번째 병사들은 살아있는 민중의 목소리를 알렸고 독립을 이루어냈고 민주화된 나라를 만들었다. 12번째 병사들의 강한 신념이 우리에게 지금의 기적을 이루어낸 것은 아닐까 싶다.

각 나라의 대사관 앞에서 자신들을 봐줄 것을 외치는 미얀마의 12번째 병사들. 그들이 기적을 만들어내길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이미 하나와 다름없는 지구촌이라는 연대 속에서, 미얀마의 12번째 병사들에게, 그들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 정도는 우리도 남길 수 있지 않을까. 당신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응원하고 있다고. 상황은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기적을 볼 수 있다고. 그러니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12번째 솔저 기적 미얀마 군부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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