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변'이라고 생각했던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상'이 되어버렸다. 바이러스가 침투한 것은 비단 신체만이 아니었다. 평범했던 일상마저 감염시키기 시작했고, 간신히 버티고 있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올해 통계청에서 발표한 '2020년 12월 및 연간 고용동향'에 따르면 지난해 연간 취업자 수는 2690만 4000명으로 1년 전보다 21만 8000명 감소했다.

IMF 이후 22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줄어든 것이다. 코로나 장기화에 따라 삶의 위기를 느낀 다양한 사람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아닌 '코로나 블루'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코로나 블루'란 사회적 거리 두기와 함께 활동 반경이 좁아지며 나타난 현상이며 일상의 균열로 우울감과 불안증을 느끼는 상태를 말한다.

회사의 구조 조정, 자영업자의 폐업. 불황이었던 청년 고용 시장은 말할 것도 없다. 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MDIS)에 따르면 취업 경험이 없는 청년은 사상 최대인 32만 명에 달했다. 지난 11월에는 5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의 응시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사이트가 일시적으로 마비되기도 했다. 시험장이 없어 다른 지역으로 시험을 치고자 이동한다는 글도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불안 속에서도 성장을 위해 안간힘을 다하는 청춘들이 있다. 그런데도 자꾸만 도미노처럼 속절없이 무너지는 이들에겐 어떤 말을 건네야 좋을까.
 
성장만이 '정답'인 것일까

항상 위기를 기회로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이터널 션사인>에서는 관계의 위기에 닥친 연인들이 등장한다. 아침에 일어나 왠지 충동적으로 결근을 함과 동시에 몬톡으로 향한 기차를 타게 된 조엘(짐 캐리)는 도착한 겨울 바다에서 독특한 머리 색의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두 사람은 운명과도 같이 사랑에 빠지고, 만남을 이어나가려던 찰나 클레멘타인은 이상한 우편을 하나 받게 된다.

메리(커스틴 던스트)라는 수상한 사람으로부터 도착한 우편에는 카세트테이프와 함께, '당신은 기억을 지웠다'는 말도 안 되는 메시지를 보며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차 안에서 카세트테이프를 재생하게 되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에 가려져 있던 충격적인 현실을 맞닥뜨리게 된다. 바로 서로가 이미 과거의 연인이었으며 이별로부터 오는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기억을 지운 상태라는 사실이다.

영화는 이별을 조엘과 클레멘타인의 관계를 통해 드러내고 있지만, 이것을 꼭 '사랑'이라는 개념 안에서만 국한되어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 태어나 죽는 순간까지 매해 겨울을 겪어야 하는 것처럼, 사람이 겪는 이별이란 필연적인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일종의 '숙명'과도 같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것과는 별개로 인간은 사랑이든, 증오이든, 불안과 우울함이든 모두 그 감정이 끝나지 않을 것처럼 맹목적으로 매달리며 떼어내기를 거부한다. 만약 이별이 곧 성장이라면, 인간은 어째서 뭐든지 쉽게 놓지를 못하는 것인가.

인간은 약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기대어 사는 삶을 선택했다. 현실은 몰아치는 한파처럼 냉엄하니 공존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선택한 일종의 아이러니한 낭만이다. 더불어 살며 상대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것은 어디까지 환상의 영역에 속해있다.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자란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이번 일을 경험했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유지해온 삶의 습관은 절대 변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진실 앞에서 그저 괜찮다는 조엘에 말에 클레멘타인은 반박하고, 그러면서도 이끌리는 마음을 참지 못해 울먹이다 울어버리는 것이다. 이들 역시도 자신들의 관계가 성장하는 과정이었다고 납득하며 넘어가기에는 무언가가 막연했으리라.
 
안녕은 영원한 헤어짐이 아니듯이

판본에 따라 여러 버전의 이야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땅의 아래에서 사는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한 것은 언 땅에 씨앗을 심는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긴 겨울은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는 인고의 시간이다. 대지를 은유하는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가 땅 위로 싹을 돋우는 그 시간을 슬픔으로 기다린다. 태어난다는 것은 반드시 고통을 수반하기 마련이다. 작디작은 자신의 아이가 스스로를 깨고 얼은 땅을 뚫고 나오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테니 그 고통을 대신할 수 없는 어머니는 냉혹한 추위 아래에 자신을 던져놓기를 택한다.

감정의 탄생도 매한가지다. 인간은 모두 여태까지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을 가슴에 심고 발아하는 순간까지 맨몸뚱이를 관계 속에 집어 던져야만 한다. 불꽃처럼 타오르는 기쁨의 구덩이 속에서 희열을 느끼며 춤추는 때가 있는가 하면,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설산의 꼭대기에 발가벗은 몸뚱이로 웅크리며 고통과 슬픔을 터트리는 날도 반드시 존재한다.

<이터널 선샤인>의 또 다른 주인공인 라쿠나 사의 접수원 메리(커스틴 던스트)는 조엘의 기억을 지우고 있던 스탠(마크 러팔로)를 찾아온다. 기억을 지우는 과정 중 조엘이 행복했던 기억만은 지키기 위해 아주 깊고 은밀한 기억 속에 숨어버리자, 길을 잃은 기계가 멈춰버린다. 어쩔 수 없이 라쿠나의 원장인 하워드(톰 윌킨슨)이 새벽에 현장인 조엘의 집으로 찾아오게 되고, 스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메리는 충동적으로 하워드에게 입을 맞추고 만다. 메리는 이미 과거에도 이렇게 하워드를 사랑한 적이 있었으며 하워드는 유부남이었다. 부적절한 관계의 말로는 기억을 지우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메리는 기억을 잃은 채 다시 하워드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거다.

메리는 라쿠나 사를 떠나는 것을 택함과 동시에 기억을 지운 고객 모두에게 진실이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발송한다. 이것은 복수의 의미가 아니다. 감정은 지우거나 묻어두는 것만으로는 절대 갈무리할 수 없다. 체념하거나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맞서 스스로를 긍정해야만 진정한 이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증거이다. 메리와 조엘, 클라멘타인이 다른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두 모습은 모두 마치 이별로서의 도피가 아닌 맞섬으로서의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지만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낭만이라면 메리는 현실이다.

전자의 연인이 어떤 방향으로 갈지 모르지만, 그래도 행복했으면 하는 환상의 영역에 있다면 메리는 스스로를 감정 속에 내던져보기로 한 성장의 영역에 있다. 그녀는 자신의 모든 감정을 긍정하지 않는다. 괜찮다는 말 한마디로 묶어 정리하지도 않는다. 마치 모두에게 지워버린 과거의 기억을 전송하였듯이 저 자신 역시도 없애버린 기억의 고통 속에서 살기로 한다. 이제 메리에게 남은 미래란 명확하다. 봄을 기다리며 자신의 딸이 고통과 인내의 시간 끝에 피어나기를 기다리는 데메테르처럼 그녀 역시도 제 몸 안으로 던져넣은 감정이라는 씨앗의 발아를 지켜보며 인내할 것이다. 그래야만 성장하지 못하더라도 저 자신을 위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이별이 성장이 아니며, 때로는 수습하지 못할 상처를 남긴다 하여도 나는 끝내 인간은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믿는다. 여기서 '인간'과 '인간'이란, 나와 타인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나' 역시도 포함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종종 삶을 배신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그럴 수도 있다며 체념과 순응의 영역에서 인내하는 것은 성장이 아니다. 괜찮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괜찮지 않은 일에 불과하며 그 자체 그대로 긍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조엘의 '괜찮다'는 대사를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말을 남길 수가 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한파가 몰아 닥쳤고,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얼어붙은 일상 속에서 오롯이 서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추운 겨울의 다음에는 봄이 반드시 돌아오고, 사계는 세계가 아니라 나의 안에서도 끝없이 반복된다. 이 시간이 지나면 반드시 성장할 것이라 믿는 것이 아니라, 내던져진 자신을 보듬고 위로해야만 한다.

우리는 긴 시간을 버텨냈고, 앞으로도 그래야만 할 것이다. 어느 날 실패해 주저앉게 된다면 자기도 모르게 이 시간 동안 성장하지 못한 자신을 채찍질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라지 못한 자신의 애씀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며, 그것마저 사랑해야 한다. 그게 사랑이 아니던가.
코로나바이러스` 이터널선샤인 미셸공드리 코로나블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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