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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기 마지막 주. 오후에 교과서와 짐을 가지러 오라고 각 가정에 예고해 두었기 때문에 아침부터 마음이 분주하다.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완화되지 않은 터라 방학 들어가기 전, 아이들이 새 학년 교과서를 받으러 오는 날에 함께 챙겨 보내야 할 것들이 많다.

배부 목록에 있는 것들을 빠짐없이 각각의 책상에 놓아두었는지 체크한다. 가장 잊지 말아야 할 통지표와 방학생활계획 안내장, 아이들의 작품이 실린 교지, 독서 인증서, 그리고 내일 화상 수업에 활용할 수업 자료까지.

그 외에도 아이들 각자의 책상 속과 사물함 등에는 등교를 하지 못한 기간 동안 활기를 잃은 아이들의 학용품들도 많다. 며칠 전부터 잊는 물건이 없도록 하나씩 점검했지만, 그래도 혹시 중요한 것을 놓치지는 않았는지 다시 확인한다.

오전 화상 수업을 끝내고 점심시간이 지나자 하나, 둘, 교실로 찾아드는 아이들. 어떤 아이는 엄마와, 또는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때로는 형제자매와 함께다. 자기 책상 위에 놓여있는 많은 물건들의 양에 놀랐는지 아이들의 눈이 동그래진다.

다음날 받아 가기로 한두 아이를 제외하고 28명의 아이들이 다양한 가족, 친지들과 함께 와서 그들의 물건을 챙겨간다. 함께 온 이들과 가벼운 인사를, 아이들과 새 학년의 희망을 나눈다.

잠시 후 우리 반 여자아이 하나가 홀로 들어온다. 마트에 장 보러 갈 때 끌고 가는 천 캐리어를 끌고. 혼자 왔냐고 물어보니, 혼자 왔단다. 요즘 화상 수업에 수업 준비물을 잘 갖추지 않고 들어오는 데다, 화상 수업 외에 해야 할 가정 학습을 잘하지 않던 아이다.

엄마는 집에 계시지 않느냐고 물어보니 계신단다. 짐이 많은데, 혼자 들고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어 오늘 엄마 바쁘시냐고 물어보니 네, 아기 보느라 바빠요, 한다.
알고 보니 엄마가 보름 전쯤 둘째 동생을 낳으셨단다.

큰아이가 초등학교 2학년인데 어린 둘째에 이어 갓난아기까지. 아이의 엄마는 얼마나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을까. 그런 사정도 모르고 수업 시작해서야 안내된 자료를 급조해 주시던 그 아이 엄마를 마음으로 몇 번을 타박했는지 모른다.

먼저 알았더라면 수업 자료를 미리 챙겨주었을 텐데. 그런 안내 문자 메시지도 볼 틈이 없었을 어린아이 셋 엄마의 고단할 일상이 그려진다. 화상 수업 시간을 꼬박꼬박 챙겨 들어와 2시간씩 수업을 받고 가는 이 아이가 그동안 얼마나 스스로 잘하고 있었던 것인지. '수업 준비는 미리 했어야지'라고 말하며 다 마치지 못한 수업 결과물은 따로 해서 보내라고 채근했던 나를 나무란다.

"엄마가 챙겨주시기 힘드셨을 텐데, 우리 OO이가 여태 혼자 준비해서 수업 듣느라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이의 환한 표정을 보니, 더 미안해진다. 물건을 다 챙겨 교실을 나가기 전, 아이가 내 손에 들려준 종이 조각 한 장, 연필로 꾹꾹 눌러쓴 손편지다. 선생님과 헤어져서 아쉽다는, 언젠가 복도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은.

39.5도. 건강검진 결과 나의 심장 나이가 같은 연령에 비해 4살이 더 젊단다. 그래서 내 멋대로 일차방정식 계산하여 산출한 나의 추상적인 심장의 온도다. 내 심장을 녹여내어 누군가에게 편지를 쓴다면, 나의 편지의 온도는 저 언저리쯤 되지 않을까 생각하며.

풋풋한 여고생 시절, 한 달간 말 안 하다 내 쪽이 지쳐 이제 그만 화해하자고 썼던 편지의 온도가 이 정도이지 않았을까 싶다. 사춘기 때 엄마의 마음을 휘갈기며 모진 말을 해대고는, 새벽에 일어나 후회하며 썼던 편지는 38.5도 정도(조금은 차분한 심장이 되어 썼을 테니). 대학 때 사귀자던 선배의 수줍은 고백 편지에 오히려 담담했으니 답장 편지는 39도 정도였을까? 지금 내 옆에 있는 평생 짝이 처음 보내온 편지엔 내 온 심장도 펄떡댔을 테니, 답장 편지는 아마도 치사량의 온도였으리라.

초등학교 2학년 아이들의 손편지를 들여다본다. 그리고 아이들이 머릿속 생각을 짜내어 글을 쓸 때의 표정과 몸의 움직임을 떠올린다. 잔뜩 좁혀진 양미간과 힘이 들어가 앙다문 입 언저리, 완성되지 않은 소근육으로 잔뜩 힘이 들어가 꽉 연필을 쥔 손. 손의 움직임은 다른 기관들의 조화롭지 않은 협응을 불러오기도 한다. 잔뜩 웅크린다거나, 다리가 벌어진다거나, 쓰고 있는 공책이 점점 틀어진다거나….

아이들의 체온은 나보다 더 뜨거울 텐데. 거기에 아이들의 팔딱이는 심장 박동을 더 해 한 자, 한 자, 써 내려갔을 손편지는 몇 도나 될는지. 편지를 읽어내려가며 뜨거워지는 온기는 편지의 것일까. 내 마음의 것일까.
첨부파일
2학년손편지.jpg

태그:#손편지, #학년말, #초등학생, #화상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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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은 공립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아이들에게서 더 많이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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