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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영도에 유배 온 이토의 양녀 배정자

1905년 등잔불에 바람이 부는 급격한 시절이었다. 초량에서 경부철도 개통식을 보고 온 정공단 아이들은 점점 세상에 귀를 기울였다. 봄날 정공단 골목에서 햇빛 쬐기를 하던 아이들에게 천택이 가쁜 숨을 몰아쉬면 말했다.

"얘들아. 절영도에 배영자가 유배를 왔대!"
"배정자가 누군데!"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라고 하던데!"

청일전쟁 이후 고종이 친러파를 물리치고 국사범을 사면하고 일본 유학생을 채용하면 일본 정부는 한국과 공수동맹을 체결하여 한국을 원조하겠다는 일본 밀서를 고종에게 배정자는 전달했다. 밀서는 일본이 고종에게 보내는 일이 일종의 '권고서'로서 오만방자한 문서였다. 친러파는 이 일을 계기로 배정자를 3년 유배형으로 부산 절영도(현, 영도)로 보냈다. 1905년 2월이었다. 그런데 귀양 온 절영도에 배정자를 위로하는 위배사(慰配使)들이 왔다. 궁궐에서는 승어관 민병환, 헌병대장 강창희, 시종무관 오봉향, 어담이 왔고, 일본공사관에서는 서기관 구니와케 쇼타로, 간카와 이치타로 등을 파견하여 위문했다.

또 일본 정부에서도 총리대신과 외무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대신하여 이노우에 가쿠고로-일본 재야의 거물이자 문명개화론의 선구자인 후쿠자와 유키치의 제자로 한국 최초의 근대신문 <한성순보>의 편집장으로 서울에 상주한 최초의 일본 민간인이었다. <한성주보>에 '국한문혼용체'를 처음 적용했다-를 보냈다. 또한 부산 일본영사관과 일본군대. 일본거류민단에서도 각기 위문을 왔다. 경남관찰사와 경북관찰사도 유배지에 와서 위로하였다. 경상남북도 군수도, 사찰에서도, 경성부인회에서도, 일본 적십자사에서도, 애국부인회에서도 위문을 왔다. 유배라기보다는 정양차 휴양온 광경이었다. 배정자 자신의 기록이라 과장이 있을 수 있지만, 모두가 거짓은 아닐 것이다.

배정자가 유배를 오니 그녀와 관련한 이야기가 부산 일대에 쫙 알려졌다. 러일전쟁이 한창인 상황에서 도대체 배정자가 누구이길래 이토록 황실과 일본에서까지 와서 위로한단 말인가?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들도 궁금했다.

1948년 9월 국회 본회의에서 「반민족행위자처벌법」이 통과되자, 악질적인 친일 행위를 한 여성 6명이 구속되었다. 배정자가 제일 먼저 검거되었다. 그녀의 죄는 "일본 정부와 통모(通謀)하여 한국 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 한국의 주권을 침략하는 조약 또는 문서에 조인한 자와 모의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과 유산의 전부 또는 혹은 2분지 1 이상을 몰수한다"는 반민 처벌법 제1조에 해당하였다. 1949년 4월 28일 배정자(83세)의 반민특위 1회 공판이 있었다. 재판장 신태익, 검찰관 이의식이 입회한 가운데 기소 사실이 낭독되었다.

"피고는 13세에 일인 마쯔오의 소개로 도일하여 대판(오사카)에 있는 안등수장(안경수)의 안내로 그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옥균의 유숙처에 우거하다 15세에 조선침략의 원흉 이등박문의 수양녀로 들어간 후 약 3년간 기마술, 탐정술, 외교술, 변장술, 애장술 등을 배워가지고 19세에 동학란이 발생한 것을 계기로 일인 2명을 대동 조선 내정 탐사차 잠입한 것을 필두로 1895년에 고종황제의 파천(播遷) 내탐, 이어 고종에게 경인 경부 양선부설을 적극 진언함으로써 일제의 일로(日露)전역 추진을 위하여 노력한 사실, 1908년에는 일본 헌병부의 밀정으로 시베리아에 출정했던 사실, 이어 일본 외무성 촉탁으로 봉천(현 중국 랴오닝성 선양)에 주재하면서 독립운동지사 검거에 조력한 사실, 이어 1940년에는 총독부 경무국 촉탁으로 이어 (태평양)전쟁 중에는 남양(南洋) 위문대를 조직하여 70여 명의 낭자군을 데리고 역시 밀정행위와 일본군 위문에 활약하는 등 70이 넘도록 친일 행위로 시종하였다."

반민특위에 기소되었지만, 그녀는 노쇠하여 감방 생활을 유지하기 곤란하여 보석되었다. 대한제국 시절부터 일제강점기 동안 배정자만큼이나 뼛속 깊이 반민족행위자요 부왜인은 없었다. 그녀는 나라를 팔아먹은 여자 친일 거두로 일황의 충녀였다. 해방된 한국은 그녀를 경로우대 하였던 참 예절 바른 나라였다.

통도사로 가출한 기녀 계향

배정자(1867/1870~1952)는 여자라는 조건에서가 아니라, 그의 일생은 너무나 극적이요 운명적이며 또한 엽기적이 그대로였다. 실재 1916년 그의 삶을 보도한 매일신문은 그녀를 "괴물"이라고 했다. 그만큼 그녀는 특이했다. 자전적 기록인 <배정자 실기(1927)>를 남겼다.

배정자의 아버지 배지홍은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활동하다가 대원군의 실각으로 대구 감영에서 사형을 당했다. 그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배정자는 어머니와 같이 도망을 같다. 어릴 때 이름은 개똥이, 분남(粉南)이었다. 모친은 분남을 기생으로 보냈고 계향(桂香)으로 이름 바꾸고 관기(官妓)가 되었다. 기생생활을 하다가 도망을 간 곳이 통도사였다.

계향은 야무지고 예뻤으며 하는 짓들이 괄괄하고 절의 규율 어기기를 일삼곤 했다. 당시 동자승으로 있었던 구하(九河)스님은 절에 오래 있을 아이는 못 된다고 생각했다. 우담(耦潭)이라는 법명보다는 아명인 분남으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개울 건너 으슥한 곳으로 동자승 구하를 데려가 훔쳐다 숨겨놓은 밥과 장독에서 퍼다 호박잎에 싸둔 된장을 꺼내 먹으라고 했다. 이 '끼'가 있던 예비 비구니가 바로 일본에 앞장서 나라 팔아먹는 일에 가담했던 흑치마 사다코, 요화(妖花) 배정자였다.
 
역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 배정자 인물 관계도 역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이루어진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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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에 남아있던 모친의 병 소식을 듣고 우담은 앞뒤 생각 없이 산문을 뛰쳐나와 밀양으로 갔다. 그녀의 병간호로 모친은 완쾌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밀양 관아에 붙들렸다. 유수형(流囚刑)의 죄인이었고, 관기(官妓)의 적(籍)을 무단이탈했기 때문이다. 이때 밀양부사는 아버지와 죽마고우였던 정병하(1849~1896)였다. 그는 농업을 진흥시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동양과 서양의 농학을 종합한 <농정촬요(農政撮要)>를 편찬하였으며, 낙동강의 둑을 막아 농토를 넓혔다. 김옥균의 영향을 받은 개화파 정치인으로, 1894년 갑오개혁, 1895년 을미개혁에 참여했다.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 당시 일본 낭인들이 침입한 것을 알면서도 아무 일이 없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을미사변 이후 명성황후의 폐비를 주장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때 직접 고종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적극적 개화파였던 그는 1896년 아관파천 후 역적으로 몰려 김홍집과 함께 군중에게 피살되었다. 그의 동료였던 유길준, 조희연, 장박, 우범선은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4년 정병하가 밀양부사를 떠나기 전날 밤, 배정자는 군수의 처소에 들어가 작별연을 베풀며 모녀의 생명을 애걸하였다. 군수는 오사카에 사는 안경수에게 편지를 써 주었다. 배정자는 정병하 부사가 소개해준 조선의관으로 차림새를 꾸민 스무살 가량의 삭발한 승려처럼 보이는 일본인 청년 마쓰오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 일제의 <배정자 약력>에 따르면, 12살 때 기생으로 있었던 배정자는 22살(1888) 때 동래순포청 사령으로 있던 오빠 배국태와 같이 근무했던 청장 김의순의 알선으로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배정자는 10년 동안 경상도 일대를 기생으로 생활한 듯하다.

배정자, 일본에서 밀정 교육을 받다

배정자는 일본에서 자기 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남자를 만난다. 조선인 안경수, 김옥균 그리고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가 그들이다.

<배정자 실기>에 따르면, 안경수(1853~1900)는 살림살이는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분남을 지극히 사랑하여 공주를 대하듯 하였다. 구마모토 소학교에 입학시켜 일본어, 문화와 생활을 배우게 하고 가르쳤다. 경제가 더욱 어려워져 안경수는 오사카 히라노마치로 이사를 하여 증권거래 소개업에 종사하였다. 다소 형편이 풀려 분남을 천황사(天皇寺) 소학교에 편입시켰다. 6개월 뒤인 1886년 7월 동경에서 온 편지를 받고 안경수는 배정자와 함께 오사카와 고베를 거쳐 동경에 도착하여 대도여관(大島旅館)에 투숙했다. 여관에서 1개월 머물다가 갑신정변의 주역인 김옥균(1851년~1894)을 만났다.

안경수는 양육의 어려움이 있어 분남에게 여자티를 버리고 남장 생활을 권유하였고, 이름도 배정자에서 조난석(趙蘭石)이라 바꾸었다. 그리고 김옥균의 문도(門徒)에 들게 하였다. 조난석은 김옥균에게 신학문을 배우고 김옥균의 서신을 팔거나 학자금 모집을 하였다. 이 당시에 밀양 기생 시절 만났던 첫사랑 전재식(田在植)을 다시 만났다. 대구 중군(中軍) 전도후의 아들 전재식이 일본으로 유학을 오자 배정자는 그와 다시 만나 결혼하였다. 그러나 배정자의 첫 결혼생활은 당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 다니던 전재식이 잠깐 귀국했다가 병을 얻어 죽는 바람에 끝장나고 말았다.

이토 히로부미는 김옥균과 친하여 그의 집에 바둑을 두며 오갔다. 수년 동안 잔심부름과 다동역(茶童役)을 하는 과정에 이토의 주시를 받아, 김옥균은 조난석의 신변 안위를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에 보내기로 하였다. 이토의 집으로 가게 되었고, 이름도 이토 히로부미가 작명하여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라고 바꾸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문하에 들어간 이래 배정자는 4, 5년간 지극한 보호를 받았지만, 외출은 불허되었다. 배정자의 신분 보호를 위해 별도의 경찰을 두었다. 의복과 음식, 숙소 범절에 있어서 가장 화려하고 특히 식사 때는 이토가 일일이 지휘 감독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에게 특별한 교육을 받았다. 말타기(승마), 자전차 타기, 수영하기, 시격술(試擊術)과 시포술(試鉋術), 탐정법, 변장술, 취물법(取物法), 모험적 행위하기, 인가(人家)에 불 지르기 등 정상적인 교육 내용이 아니었고 여자로서 견디기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잘 견디었다.

또 사상 교육을 받았다. 국가관 교육, 한중일 관계 및 역사, 서양 세계 각국 상황, 인종 간의 우열교육 등이었다. 특히 일본은 조선을 등한시하지 않을 것이다. 조선을 완전한 독립국으로 확립해 나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조선 독립 없이는 동양 평화가 있을 수 없다. 조선이 독립하여 동양 정국의 중심이 되어 중국과 일본이 연대하여 동양 평화의 길을 열고 나아가 황인종이 세계평화의 길을 밝혀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교육을 받은 배정자는 그를 점차 숭배하게 되고 그의 헌신적 수하가 될 것을 진심으로 다짐하였다. 일본 황후궁 대부 향천(大夫 香川)에게 미려한 의복과 보석을 하사받기도 하고 황실에 가서 명치(明治, 메이지) 왕의 말을 듣기도 하였다.

1916년의 매일신문 <괴물 배정자> 연재에는 김옥균 문하에서 있었던 일과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교육받은 사실이 없다. <배정자 실기>는 그녀의 과장과 시기적 오류가 이 많다. 정병하가 밀양부사에 부임한 것은 1888년이었고, 배정자가 김옥균의 문하에 들어갔다고 할 즈음 김옥균은 오가사와라(小笠原) 섬에 1887년부터 유배 중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의 마타하리 배정자에는 항상 영향력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 배정자의 남자들 일본의 마타하리 배정자에는 항상 영향력있는 남자들이 있었다.
ⓒ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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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온 밀정 배정자

1892년, 초가을 조선에서 동학 최제우의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일본 정부에서는 조선을 시찰하고자 많은 사관(士官, 장교)들을 보냈다. 일본의 조선 진출을 위한 밀탐이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갑오년(1894)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고 청일전쟁이 일어나 조선정치가 변화무쌍하였다. 1895년 조선으로 돌아오기를 원하는 배정자를 이토 히로부미는 통역인으로 보냈다. 일본공사관 안에 거주하였다. 일본 사관들과 함께 남해안을 순시하며 통영에서 통제사와 회견하고, 동학운동이 일어난 전라도 장흥에서 군수의 보고를 듣고 서울로 가기 위해 진해에서 일본 사관은 돌아가라고 했다. 서울로 가기 전 모친을 만나다가 배정자의 정체가 탄로 나서 관군에 잡혔다. 모든 서류는 압수되고 부산 감리서 감옥에 갇혔다.

동래부사 이호성은 강제로 수청을 들게 하고 가혹하게 죄인으로 다루었다. 이에 밀양 기생 계월이 구명운동을 했다. 계월은 청국 이사부의 통역 김재업을 통해 원세개의 통역인 정남옥의 도움을 받아 당시 청국 대리대사 원세개의 힘을 입어 배정자는 방면되었다. 거주 제한을 받은 배정자는 김재업을 통해 탈출해 마쓰오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탈주하였다. 그때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갑오년 3월 하순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을 모범으로 삼고 일본식 개화를 통해 한국을 개혁하려고 했던 인물이었다. 1894년 3월 28일 중국 상해에서 프랑스 유학파 홍종우에게 암살당했다. 김옥균의 시신은 1894년 4월 28일 서울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당했다. 김옥균의 죽음 이후로 청일 간의 갈등은 심화되고 청일전쟁(1894.7~1895.4)으로 연결되었다.

일본 총리대신인 이토는 한국 국권보호와 동양평화를 위해 청국에 전쟁을 선포하고 육군소장 오시마 요시마사를 보내고 배정자는 군사탐정으로 출병하였다. 이 육군소장의 고손자가 일본 전(前)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이다. 그녀는 이 전쟁으로 조선의 독립 유무가 좌우된다는 이토의 말을 믿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 조선인들은 일본의 힘을 새삼 느끼는 계기가 되었다. 예전에 알고 있었던 일본이 아니었다.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 조약을 하였다. 청일전쟁 이후, 청국의 이홍장과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체결한 조약으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권의 확립, 랴오둥반도, 펑후도 등에 대한 영토 분할, 배상금 획득 등을 조약 내용으로 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청은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고 일본은 조선에 대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지배권을 확립할 가능성을 지녔다. 배정자는 '조선 독립 승인'이라는 대목을 보고 이토의 손을 잡아 흔들며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이 일로 인해 그녀는 이토를 더욱 믿었다. 하지만 조선의 독립은 청나라로부터의 독립이지만, 일본 간섭과 지배의 시작임을 그녀는 몰랐다.

조선 황실을 염탐한 흑치마 사다코

"한일관계는 동양 평화의 기초가 되므로 한국 국권이 흔들리면 안 된다. 러시아가 조선과 동양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광무황제를 설득하라"라는 이토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배정자는 귀국하였다. "배정자는 홀연 조선으로 건너와 남산 산록 일본공사관 안에 거주하였다. 조선사람도 아니요 일본 여자도 아닌 일종의 기이한 물건이 되어 성명도 괴이하게 '우담화(優曇華)'라 하는 여자가 되었다."

배정자는 국사범으로 일본에 머물던 고영근을 통하여 엄비의 이종인 김영진을 통해 궁궐을 출입하였다. 고영근은 동학 농민 운동의 지도자 전봉준이 격서에서 민영준, 민영환과 함께 3대 탐관오리로 지목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의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민비 시해에 동참했던 우범선(육종학자 우장춘의 아버지)을 일본 망명 중이던 1903년 11월 살해하였다. 당시 광무황제는 아관파천(1896.2.11.~1897.2.25.)하여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었다.

배정자는 녹의(綠衣, 연두저고리)에 홍상(紅裳, 다홍치마)을 입고 궁녀처럼 변장하여 들어갔다. 광무황제는 일본공사관의 통역으로 있다는 엄비의 소개를 받은 배정자를 통해 일본의 비밀, 계획, 제반 활동 등 정보를 얻고자 했다. 엄비 역시 조선인으로서 위국충성(爲國忠誠)하여 충신이 되기를 당부하였다. 배정자는 잠 못 드는 광무황제에게 매일 밤에 들러 일본의 사정과 형편을 보고했다. 하지만 배정자는 매일 하야시 공사의 지시대로 광무황제에게 정보를 제공하였다. 목적은 친러 세력의 배제였다. 먼저 일본군의 침궐설(侵闕說)은 친러파의 흉계라고 하였다. 하지만 황제 주변에는 친러파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평양으로의 파천까지 압력을 가했다. 친러파에 염증을 느끼던 시기에 배정자가 나타나니 황제는 배정자를 총애하였다. 결국 일본 공사는 황실의 신뢰를 힘입어 점차로 그 세력 판도를 넓혀갔다.

일본은 일영동맹(日英同盟)을 맺어 해군을 확장하고 러일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또 일본 정부는 배정자를 통해 경인, 경부 두 노선의 철도부설권을 얻고 이에 따른 소요부지, 소요목재, 소요석재, 인부 사용을 일본 측 임의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러시아와 조선 교섭과 황실 경비 사용을 탐지하게 하였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정자를 통해 일본은 많은 이득을 얻었다. 일본공사의 우대 접견, 일본 화폐의 배척 해소, 군비확충을 위해 일본군함 수입과 일본군기(日本軍機) 수용, 송도 관삼(松島官蔘)의 일본인 경영 승낙, 조선 조정 각 부처와 군대에 일본인 고문 채용, 일본인에게 상권 주선 등이었다. 또 이토를 통해 한일 양국 황제의 밀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 이병길 : 경남 안의 출생으로, 부산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주변인과 시』, 『주변인과 문학』 편집위원을 역임하고 현재 울산민예총(감사), 울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부산・울산・양산 지역의 역사 문화에 대한 질문의 산물로 『영남알프스, 역사 문화의 길을 걷다』, 『통도사, 무풍한송 길을 걷다』를 저술하였다.

**오마이뉴스, 폴리뉴스 동시 연재함

덧붙이는 글 | 폴리뉴스에도 연재합니다.


태그:#의열단원 박재혁, #배정자, #이병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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