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

EBS <다큐프라임>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 ⓒ EBS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EBS <다큐 프라임>은 아시아의 가족에 주목했다. 지난 4일 방송한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편은 딸들을 결혼시킬 즈음에 이른 아버지들, 서로 다른 역사적 사회적 환경 속에 살아온 이 아버지들의 현재를 통해 우리 시대 '아버지'를 그려내고자 했다. 

아버지들에게 딸들을 결혼시킨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최근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과 함께 결혼 풍속도도 많이 달라졌다.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선 뒤 사위가 될 사람에게까지 함께 발 맞추어 걷는 모습도 서서히 사라져간다.

딸들은 아버지에게서 남편에게로가 아니라, 동등한 동반자로서 남편과 함께 식장으로 들어선다. 다큐는 전통적 의미의 결혼에서 딸의 손을 잡고 식장으로 들어서는 아버지의 심정에 주목한다. 그 '아버지'의 소회를 들여다 보고자 한다.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에서 살아남은 아버지들
 
 EBS <다큐프라임>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

EBS <다큐프라임>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 ⓒ EBS

 
한 골목에서 30년을 살아온 베트남의 아버지 반뚜안씨에게 딸은 어떤 의미일까? 그는 매일 학교에 딸을 데려다주었다. 딸은 이미 훌쩍 커버렸지만, 과거 어느 비 오는 날 오토바이가 빗물에 미끄러져 웅덩이에 빠졌을 때 혹여 딸이 다쳤을까봐 급하게 아이를 안아 올렸던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딸은 그에게 그렇게 소중한 존재다. 

그런 아버지도 한때는 청춘이었다. 하지만 결혼을 앞두고 빛나는 딸들처럼, 그의 청춘도 아름답게 빛났던 건 아니다. 아버지 반뚜안씨에게 청춘을 상징하는 옷은 군복이다. 캄보디아와 국경을 사이에 두고 1977년 벌어진 전쟁이 그에게 남긴 기억은 참혹하다. 특히 1976에 입대했던 동기들 중 상당수는 군에 적응하기도 전에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목숨을 잃었다. 아버지는 아직도 자신이 살아서 돌아왔단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한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와 낳은 딸이라서 더 소중했다. 그러나 언젠가 그런 딸을 때린 적이 있다.  당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딸을 때린 뒤 혼자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고, 이제야 아버지는 고백한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전쟁의 기억은 오래도록 아버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렇다면 캄보디아의 아버지는 어떨까? 11월은 캄보디아의 결혼 시즌이 시작되는 때다. 하지만 크레브씨의 막내 딸 니타는 "돈을 더 모아 식을 올리겠다"며 조상들의 영전에 인사만 드리고 남편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자식들을 가르치기 위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하며 살아왔다는 아버지 크레브씨. 하지만 그렇게 자식들을 위해 자신을 내던져 왔음에도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농담 한 번, 장난 한 번 치지 못한다. 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역시 아버지가 경험했던 참혹한 기억에서부터 비롯됐다.

크레브씨는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아직도 꿈을 꾸면 끔찍했던 기억 속으로 소환되곤 한다. 1975년 크메르 루주에 소년병으로 징집되었던 아버지는 군대에서 3년 넘는 시간을 보냈다. 베트남과의 전쟁 공포, 그리고 먹을 것이 없어 굶어야만 했던 고통이 '소년' 크레브를 괴롭혔다. 

농민 유토피아를 이루겠다며 17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크메르 루즈는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는 이유로, 혹은 바라는 대답을 안 했다는 이유로 무차별 투옥을 자행했다. 배고픔을 못 이겨 먹을 것을 훔치거나 하면 죽임을 당할 정도로 혹독한 경험을 해야 했다. 그 죽음과 공포의 시간 속에서 아버지 크레브는 오로지 살아남는 법만을 배웠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참혹한 기억을 자식들은 모르길 바랐다. 자신이 말하지 않으면 모를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말을 아낀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자식을 위해 달려온 인생
 
 EBS <다큐프라임>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

EBS <다큐프라임>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 ⓒ EBS

 
한국의 김호영씨는 올림픽이 열리던 1988년 건설회사에 들어갔다. 오전 2시에 일을 끝내고 집에 들어왔다가 다시 오전 5시에 출근을 하기도 했고, 건설 현장을 따라 지방을 떠돌며 한 달에 한번 집에 들르는 등 그렇게 30여년 동안 타지를 떠돌았다. 그렇게 돈을 버느라 아빠 노릇도 못하는 사이, 딸 소연이는 훌쩍 자라 어느 덧 결혼을 앞두게 되었다. 
 
결혼을 앞둔 건 소연씨인데, 부모님이 더 설레한다. 소연씨가 결혼해서 살 집이건만, 가구 배치를 놓고 부모님이 설왕설래하기도 한다. 한국적 결혼의 전형적인 상황이다. 소연씨가 '내 결혼이니 내가 알아서 한다'라고 하니 섭섭해한다. 농담 반, 진담 반 "엄마 아빠 집 같다"는 딸은 "그래도 행복해 보이시니 참는다"로 말한다. 

인도의 결혼 풍속은 우리보다 한 술 더 뜬다. 연애 결혼을 바라는 젊은이들도 있지만, 카비타는 자신을 위해 아버지가 최선을 선택을 해주시리라 믿으며 중매 결혼을 하기로 한다. 아버지 라메시는 교육, 직업, 집안을 따져 알맞은 남자를 골랐다. 

그렇게 딸에게 맞는 조건의 남자를 골라주기 위해 선행되어야 할 것은 아버지의 경제력이다. 일자리를 찾기 위해 시골에서 도시로 올라와 수도 파이프 사업으로 자수성하가한 아버지 라메시는 자신의 여력이 되는 선에서 딸에게 최대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주기 위해 애쓴다. 그게 그가 생각하는 아버지의 자리다. 25년 전 퇴근하고 지친 몸으로 돌아왔을 때 태어난 딸은 그의 삶을 지탱해 주는 가장 큰 힘이다.
 
 EBS <다큐프라임>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

EBS <다큐프라임> '패밀리 아시아, 나의 아버지' ⓒ EBS

 
몽골의 바토그토는 대가족 집안의 맏이로 태어난 유목민으로서의 삶을 이어받아 일가를 이루었다. 사회주의 체제 시절 몽골은 집단 목축을 하여 개인 소유의 가축이 없었지만, 1992년 민주주의 이후 자기 소유의 가축을 기를 수 있게 되었다. 열심히 일했던 바토그토네 집안은 300마리의 양떼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덕분에 네 딸 모두 도시에 있는 대학을 보냈다. 유목을 숙명처럼 여기며 살았지만 자식들에게는 할 수 있는 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막상 둘째 딸이 도시에서 대학을 나오고서도 이웃 유목민 아들과 결혼해 손주를 낳아 돌아오니 기쁘다. 하늘이 자신에게 준 선물과도 같다. 오죽하면 딸이 이웃 집안으로 시집을 가도 손주는 자신이 키우고 싶다고 할까. 

캄보디아, 베트남, 인도, 몽골, 그리고 한국의 아버지들은 서로 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가족과 자식들을 위해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오늘에 이르렀다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지금껏 살아올 수 있었던 삶은 원천은 결국 '가족'이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립니다.
EBS 다큐프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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