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틸 이미지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틸 이미지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앤-사라-애비게일이라는 세 점으로 이뤄진 알레고리의 공간

두 점을 이으면 '선'이 되고, 세 점을 이으면 '면'이 된다. '앤과 사라'라는 기성의 조합에 애비게일이 끼어드는 데서 영화가 시작된다는 점은, 영화 <더 페이버릿>이 면의 세계로 진입하는 쪽을 택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면은 일종의 공간이다. 나는 이 글에서 앤과 사라와 애비게일이 만드는 공간과 '앤, 사라, 애비게일'이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영화 안에서 연출된 실제 배경·공간과 그 세 인물이 어떻게 닮아 있는지를. 그리고 왕궁이라는 공간의 모습과 그것을 담아내는 카메라의 촬영 방식이, 어떻게 세 인물에 대한 알레고리가 되는지를 말이다.

먼저 세 인물의 삼각관계를 간략히 정리하자면 이렇다. 사라와 애비게일이라는 화살표가 팽팽히 맞선 채 그 둘의 정 가운데 위치한 앤을 바라보고 있는 구도. 사라의 손가락을 집어삼킬 듯 애무하면서 그를 탐하는 앤과, 앤의 사랑에 응답하며 앤을 움직이고 인도하여 자신의 정치적 지향을 완성해나가는 사라, 그리고 그 둘 사이의 미세한 틈새를 파고들면서 앤의 마음과 몸을 핥아 '오르며' 자신의 신분 계단 또한 빠르게 밟아 '오르는' 애비게일. 그 세 사람의 긴장 관계가 이 구도를 떠받치고 있다.

세 사람이 만드는 삼각관계는 '포획하는 공간'의 다른 이름이다

세 점으로 이뤄진 삼각형은 왕궁이라는 배경을 통해 완성된다. 왕궁은 세 사람이 발 딛고 선 영토인 동시에 세 사람을 조이고 포획하는 경계망이기도 하다. 왕궁의 내·외부는 미로처럼 설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카메라가 공간을 포착하는 방식 역시 그와 닮아 있다. 딱딱하게 각진 왕궁의 공간을 종종 둥근 원환 속 세계처럼 비추고 있는 것이다. '돌고 돌아도 결국엔 여기'일 것이라는 주문이라도 되는 듯. 이 왕궁이라는 배경, 즉 '포획하는 공간'은 다시 앤과 사라와 애비게일이라는 '삼각관계'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틸 이미지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틸 이미지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그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앤, 사라, 애비게일이라는 세 축은 각기 자신의 축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을 때라야 스스로도 잘 살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 말이다. 서로를 딛고 서거나 밀고 당길 때에야 삶의 충동이 자극된다는 의미에서, 세 사람은 서로에게 서로의 '영토'가 된다. 앤, 사라, 애비게일이 이루는 '삼각관계' 자체가, 포획하면서 유지·관리하는 장치-공간이 되는 셈이다. 그 장치는 세 사람이라는 축이 유지될 때에만 유효하게 작동한다.

실제로 앤이 사라에게 최종 추방 명령을 내린 이후, 즉 사라가 그 세 축에서 영영 이탈한 이후로, 삶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건 오로지 권태뿐이다. 긴장을 놓지 않고 조심스레 토끼들을 만지고 쓰다듬던 애비게일의 '손'의 자리에는 토끼를 뭉개는 투박한 '발'이 대신 들어찼으며, 만져주고 핥아주길 기대하며 수평으로 유연히 늘어져 있던 앤의 '다리'가 있던 자리에는 이제 애비게일을 수직으로 내리누르는 경직된 '팔'이 놓여 있다. 긴장과 욕망을 유지하면서 '살아내는' 데 동원되었던 애비게일의 손과 앤의 다리는 사라지고, 발과 팔이라는 건조한 폭력과 권태만이 남아, 삶의 시간을 '죽이고' 있을 뿐이다.

앤, 사라, 애비게일의 몸은 '일그러진 공간'을 되비추는 신체다

공간과 관련해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가 있다. 어안렌즈를 통해 끊임없이 왜곡되어 비춰지는 공간이 등장하는 것. 그것은 그 셋이 머무는 지금-여기가 하나의 일그러진 세계라는 말이기도 할 테다. 그렇게 일그러진 공간은 다시 그 관계 속 '존재(신체)들'에 대한 알레고리가 된다. 그 신체들이 스크린의 일그러진 공간을 거울처럼 되비추고(re-presentation) 있다는 이야기이다.

통풍으로 얼룩진 아픈 다리와 둔한 육체를 지닌 왕 앤은 영화 속에서, 처음부터 일그러진 몸을 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일그러짐의 원초적 장면을 대표하고 있는 자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앤이 세 인물의 중심에 놓이는 것은 어쩌면 숙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과 사랑의 크고 작은 사건(event)들이 그렇게 일그러진 앤의 신체 위에서 시작되고 종료된다.

그에 반해 사라와 애비게일의 일그러짐은 후천적이다. 애비게일의 음모로 사고를 당한 사라는 그 일로 인해 한쪽 뺨에 크고 흉한 상처를 입게 된다. 그 상처가 사라의 일그러짐에 대한 기표라면, 애비게일의 일그러짐은 직접적으로 신체에 각인되는 것이 아닌 간접 기입의 방식을 따른다. 사라의 일그러짐보다 한 걸음 늦게 그 기표는 완성된다.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틸 이미지

영화 <더 페이버릿: 여왕의 여자> 스틸 이미지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목표하는 신분 위치에 안착하고 자신의 계획대로 사라를 궁정으로부터 영구히 탈락시키는 데 성공한 애비게일은 그 후, 우스꽝스러운 화장을 하기도 하고 때론 사물처럼 늘어져 있으며, 점점 더 자주 술에 취해 비틀거린다. 한 순간도 흐트러짐 없이 꼿꼿하게 목적지를 향하던 애비게일에게 그 비틀거림은 신체에 새겨진 물리적 각인보다 더한 일그러짐의 의미값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경계망은 해체되고 토끼들은 범람한다

이와 관련하여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앤과 애비게일을 비추던 화면이 페이드-아웃되면서 토끼들을 담은 영상이 스크린을 가득 덮는다. 자라나는 토끼, 끝없이 증식하는 토끼들.

토끼는 앤 왕이 잃은 열일곱 명의 아이들을 대신해서 길러온, '상실'의 상징물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앤의 머릿속 존재들이다. 그렇게 무언가를 상실하게 된 존재에 대한 현현이 바로 '일그러진 몸'인 건 아닐까. 사랑의 팽팽한 삼각관계라는 영토 위에서 앤은 잠시나마 자신의 일그러진 몸을, 그 절대적인 상실의 고통과 공허를 등 뒤로 물릴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꿈 같았던 도형의 시간이 무너지자마자 그는 본디의 상실 공간 속으로 밀려들어가 버리고 만다. 토끼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퇴행적 환상의 세계가 실재의 세계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유비가 발견된다. 토끼들을 둘러치고 있던 철제 울타리, 그것은 바로 실재와 환상을 경계 짓는 테두리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 다시 말해 그것은 앤을 지탱시키면서 앤의 '살아냄'을 가능하게 했던 영토 바깥의 경계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경계는 와해되고, 기다렸다는 듯 환상들이 치고 들어온다. 이것이 영화의 마지막 이야기이며, 허물어진 울타리를 넘어 앤의 머릿속 현실(아이들/토끼들)이 실제 현실로 밀물처럼 범람해 들어오는 마지막 시퀀스가, 그 이야기를 대신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웹진 쪽>에도 송고했습니다.
더페이버릿 희음시인 알레고리 웹진쪽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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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음이라는 이름을 쓴다. 사회운동, 기록 및 비평, 시 창작을 한다. 멸종반란, 기후위기 앞에 선 창작자들, 가덕도신공항반대시민행동에서 주로 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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