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생 후르츠> 포스터.

영화 <인생 후르츠> 포스터. ⓒ (주)엣나인필름

 
몇 해 전 '텃밭을 해보겠다'는, 나로서는 꽤 당찬 꿈을 갖고 도시농부 과정을 이수했다. 한겨울에도 푸르고 붉은 채소며 과일을 무심히 소비하던 내가 텃밭에 도전하게 된 건, 전희식 농부가 쓴 책 <소농은 혁명이다>를 읽고나서 였다. 읽는 내내 사고 먹어대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소농은 혁명이다>는 농사를 통해 얻은 경험과 성찰이 겸허히 스며있을 뿐 아니라, 기업식 농경이 생태계를 해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득하며 소농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나는 그의 주장에 완전히 설복 당했다. 이사해야 할 시점에 텃밭 딸린 주택을 작정한 것도 이 맥락에서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감행하지 못하고 좌절된 꿈이 영화 <인생 후르츠>를 보며 소환됐다. 인생의 굽이를 다 넘은 노부부의 삶은 단정하다. '이만하면 됐다'는 노부부의 달관이 곡진히 다가왔다.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 (주)엣나인필름

 
"전쟁이 끝났다"는 1950년을 배경으로 한 영화는 낯설었다. 1950년은 한국으로서는 6.25 전쟁이 터진 해이기에, 전쟁의 참화를 떠올릴 수밖에 없는 한국인의 인지부조화였으리라. 일본은 베이비부머 세대인 '단카이 세대'들이 겪는 주택난을 대규모의 뉴타운 사업으로 돌파할 수 있었던 건, 한국전쟁이 가져다준 경제 특수도 크게 작용했을 터다. 제국주의의 몰락과 함께 침체된 일본 경제를 한국전쟁이 견인했던, 비극적인 역사의 한 대목도 보여준다.
 
건축을 공부한 '츠바타 슈이치'는 '고조지 뉴타운' 사업에 투입된다. 사람이 사는 집은 자연과 어우러져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돈으로 움직이는 건축 판을 깰 수 없었다. 그의 관점에서 명백히 실패한 도시계획에 대한 책임감이었을지 대항이었을지, 그는 고조지 뉴타운을 떠나지 않고 300평의 땅을 사들여 숲이 있는 집을 실현한다. 집을 지을 당시 50이었을 테니, 남은 생을 새 집과 함께하겠다는 결심이었으리라.

새집을 짓고 그 집에서 40 년을 넘게 지내면서 집 뜰에 심은 과실수와 농작물에서 과일 50종과 채소 70종을 수확하며 소농을 꾸려 나간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처럼 전원에서 시도하는 거의 완전한 자급자족은 아니지만, 넉넉한 수확물을 염장 가공해 먹는 식생활과 나누는 즐거움은 노부부가 누리기에 충분한 기쁨이다.

300평 대지에 고작 15평 단출한 집을 들이고, 나머지 공간을 식물들에 허하는 그들의 '숲이 있는 집'은, 과시나 재산의 수단으로 집을 소유하는 이들에겐 적잖은 불편함을 준다. 자연에 답이 있다는 그의 건축관은 이마리시 정신과 병원 설계에 그대로 녹아들었다. 자신의 건축관을 에누리 없이 수용한 병원 측에 설계료를 한 푼도 받지 않음으로써 신념의 가치를 지켰다.
 
슈이치는 여전히 손글씨로 편지를 보내는 이 세기 마지막 종이 메신저다. 그가 마을 생선가게에 주인에게 보낸 감사의 손 편지는 동네 가게 주인에게 보냈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진지하고 품위 있다. 게다 손 편지에 늘 등장하는 그의 그림은 글로 못다 한 애정을 다정하게 내민다. "돈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그의 인품이 느껴지는 글과 그림이다.

일상을 소중하게 대하는 슈이치는 고조지 뉴타운에 대한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며 이렇게 말한다. "이제 저도 90이라 저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싶습니다." 40년을 한 집에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소중할 수 있는 건, 과거의 덧없음과 미래의 불안함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닮고 싶은 현자들의 삶의 방식이었다.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 (주)엣나인필름

 
'슈이츠'의 반려자 '츠바라 히데코.' 87살의 나이에도 여전히 부엌일을 놓지 못한다. 60부터 싫어지더니 70엔 부엌간에 들어서기조차 싫다던 내 엄마를 생각해볼 때, 히테코는 매우 놀랍다. 남편의 하루 삼시 세끼를 차려내야 하는 노동이 사랑으로 상쇄되는 걸까? 대충도 아니고 인스턴트도 아니고 지극 정성으로 삼시 세끼를 차려내는 그녀의 수고로움은, 그녀가 잃지 않는 미소로 보람 있음을 보여주어도 어쩔 수 없이 안쓰럽다.

"여자는 미소를 잃지 않아야 한다. 자기 전까지 누워있으면 안 된다"고 귀에 목이 박히게 들었다는 통제의 언어가 이미 그의 내면을 길들여 놓았던 것은 아닐까. "결혼하면 남편을 먼저 생각하고 제대로 된 것을 입히고 제대로 된 것을 먹이고 그래서 남편이 좋아지면 돌아서 결국 나에게 온다"는 오래된 가부장의 신화가 그의 믿음에 깊게 드리웠다는 생각에, 늙어 더 이상 재지 않은 몸놀림을 최대한 바삐 움직이는 그의 몸이 좀 가엽게 느껴졌다.

물론 슈이츠는 좋은 남편이다. 슈이치가 아내 하데코에게 보내는 "최고의 여자 친구"라는 찬사는 그에 대한 깊은 애정과 신뢰를 내보임과 동시에 평생을 헌신하게도 했을 것이다. 집을 설계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남편 슈이치처럼, 일평생 남편의 그림자가 된 돌봄 노동 말고 비록 작더라도 오롯한 그만의 성취는 무의미했던 걸까?
 
츠바라 부부는 행복하다. 서로 격려하며 살아가는 부부의 모습은 서로가 상대에게 꼭 필요한 존재임을 보여 준다. 츠바라 부부는 노인이라고 하기엔 믿을 수 없을 만큼 활달한 행보로 대만 여행을 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 고자군 해군 공장에서 복역했던 슈이츠는 기지 내 군수 공장에서 대만에서 끌려 와 강제노역을 하던 10살에서 17살의 어린아이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가 강제노역 당하는 이국의 어린 노동자들에게 연민을 느낀걸 보면, 제국주의로 광기에 휩싸였던 일본에서도 숭고한 인류애를 가진 소수의 일본인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 수 없이 파렴치한 일본의 과거도 드러난다. 우정이 깊어져 동생처럼 지냈다는 한 친구를 찾고 싶었지만 그는 이미 죽은 뒤였다. 그의 무덤에 찾아가 애도를 표하는 슈이츠를 보며 문득 야릇한 심정이 들었다. 한국인 징용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은 대목이었다.

슈이츠는 그가 그린 그림에 그들 부부의 나이 90과 87을 합해 177년으로 표기한다. 노부부가 살아낸 세월을 각각 합산한 177년. 아. 그렇구나. 65년을 함께 살았지만,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만큼은 오롯이 그 자신에게 귀속한다고 전제한다면,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살았을지라도 그 시간만큼은 독자성을 부여할 수 있으리라. 스스로 꾸준히 꾸려왔을 시간들을 65년으로 퉁치지 않는 계산법. 각자 그 시간만큼 들였을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셈법.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영화 <인생 후르츠> 스틸 컷. ⓒ (주)엣나인필름

 
두 노인의 177년은 노인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식에게조차 짐 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가 되어 먼저 행한다. 스스로 몸을 움직여 자연과 조화하며 살아내는 두 노인의 삶은 뒷방 늙은이의 소외라는 오래된 관념을 무너뜨린다. 이런 노년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살수록 인생은 더욱 아름다워진다고.'
 
츠바라 부부의 삶은 분명 복된 삶이다. 해로한다는 것은, 부부 사이가 좋은 경우, 더없는 행운일 것이다. 이들의 복된 삶의 상당 부분은 이들의 훌륭한 인격에 기인한다. 나머지는 해로를 가능하게 한 건강, 자식에 기대지 않을 만큼의 연금 등에 비롯할 텐데, 이것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부부로 지내다 혼자된 독신 노인이나, 애초부터 혼자였던 노인들의 일상은 어떨까?

여유 있는 노인들은 좋은 시설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도 여의치 않다면 홀로 고립되어 있을 것이다. 츠바라 부부의 삶은 부부라는 가족 형태로는 이상적 모델이 될 수 있겠지만 독거노인에게는 유효하지 않다. 내 엄마 같은 독거노인을 집 밖으로 불러내 서로에게 조금씩 기대보게 하고 아직 나눌 것이 있는 쓸만한 인간임을 확인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마을마다 획일적으로 꾸려진 '노인정' 말고 말이다. 이미 늙은이라고 상정된 배제의 공간에 나라면 선뜻 발 들이고 싶지 않을 듯싶어서다.

슈이츠는 짚 뜰의 제초 작업을 하고 쉬기 위해 누운 후 영면했다. 노동 후 '쉼'과 동시에 마지막 '숨'을 거둔다는 것은 얼마나 정갈한 죽음인가? 슈이츠의 죽음은 스콧 니어링의 존엄한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물과 음식을 물리치고 스스로 맞이한 100세의 죽음. 남편이 선택한 죽음의 방식을 존중하고 곁을 지킨 아내, 헬렌 니어링. 그는 남편이 떠나고 그들이 지은 버몬트의 돌집을 홀로 지키며 삶을 꾸려갔다. 그들의 책 제목처럼, '조화로운 삶'을 떳떳이 보여주었다.
 
홀로 남은 히테코는 풀 죽지도 그렇다고 더 씩씩하지도 않게 하루를 보낸다. 달관이 스민 노년의 철학. 어쩌면 "지금부터 열심히 살 테니 걱정 마요"라며, 숨을 거둔 남편에게 한 약속을 성실히 옮기는 중인지도 모른다. 남편의 영정에 삼시 세끼 따뜻한 상식을 올려 변치 않는 사랑을 보내고, 밭을 가꾸고, 농작물을 수확하고 갈무리한다. 남편과 함께 하던 일을 혼자서 해내면서 히데코는 87세의 나이를 방패 삼지 않는다.

영화 말미 혼자 살아내는 히데코를 보며 내 생각 일부를 수정해본다. 분명 "뭐든 혼자 해내다 보면 길이 보인다"는 남편의 말을 따르며 살아온 생이지만, 남편의 신뢰 속에 어느 날부턴가 혼자 결정하고 행동할 수 있었다는 히테코는 어느 시점엔가 불완전하나마 독자성을 확보하게 됐으리라. 히테코는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자신에게 남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그의 것이 된 신념을 실행하면서 말이다. '천천히, 꾸준히.'
 
<인생후르츠>가 극 영화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저건 영화니까"하며 무력함을 비현실로 전가시킬 핑계를 거두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미뤄두었거나 좌절했던 계획을 다시 꿈틀거려볼 깜냥을 세울지도 모른다. 아직 살아계시거나 혹은 돌아가셨을지도 모를 히테코 할머니에게 따뜻한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리고 이 영화의 내레이션을 완벽히 마치고 영면한 배우 키키 키린 할머니에게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윤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소농은 혁명이다 - ‘똥꽃’농부 전희식이 꿈꾸는 희망농촌

전희식 지음, 모시는사람들(2016)


인생후르츠 키키 키린 텃밭농사 노년의삶 소농은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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