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여전히 문을 연다. 인생을 뭉텅이로 나누어 보면 그렇다. 태아였을 때 처음 열고 나온 엄마의 배, 걸음마를 배운 뒤 첫 심부름을 안고 나서는 대문, 학교에 들어설 때 통하는 교문, 처음으로 집을 장만해 열고 들어갈 문 그리고 생을 마무리한 뒤 들어갈 관문. 문 말고도 많은 것들이 있을 테지만 나서고 들어올 수 있는 것은 문뿐이다. 안과 바깥의 경계를 나누고 서로 다른 풍경을 그리는 기준도 결국 문이다. 

마음에도 문이 있을까. 난 모든 변화를 앞두고 문을 넘기 전 많은 생각을 한다. 열어볼까, 말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누가 있을까. 뭐든 잘 할 수 있을까, 외롭진 않을까. 감정의 골은 다양하지만 문을 앞에 두고 내겐 항상 많은 고민이 따른다. 디즈니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형태 없는 마음의 문을 조금은 그려볼 수 있었다.
 
 영화 <토이스토리>(1995) 포스터.

영화 <토이스토리>(1995) 포스터.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토이스토리1>은 1995년에 개봉한 애니메이션이다. 제목처럼 장난감들이 나와 펼치는 이야기로 영화는 구성된다. 아이였을 때 처음 영화를 접했을 땐, 장난감들이 나와 여러 가지 좌충우돌 사건을 겪는 것이 흥겹기만 했다. 내게도 몇 가지 장난감이 있었고 생김새는 달라도 모두 '장난감'이란 사실은 같았다. 그것들은 내가 놀아주고 관심을 주는, 놀잇감에 불과했다. 내가 없는 사이 그런 장난감들끼리 이야기를 꾸미는 묘사가 재밌어서, 장난감들에게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정말 살아있을까, 멈춰 있을까.

장난감은 멈춰 있었다. 내가 찾는 곳에 늘 있었고, 사라져도 다시 사면 그만이었다. 오로지 내 손만을 기다리는 존재였다. 플라스틱 얼굴에 볼펜으로 낙서를 해도, 다리를 접어 늘어뜨려도 웃는 모습 그대로 있었다. 바보 같기도 했고 사랑스럽기도 했다. 그 아이들을 안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내 첫 유년의 문을 연 셈이다.

1999년 <토이스토리2>가 개봉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스토리는 바뀌었지만, 하려는 이야기는 같았다. 여전히 장난감들이 주인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었다. 주인공 '우디'(앤디가 가장 좋아하는 장난감)를 중심으로 여러 장난감들이 대열을 이루고 함께 의지해 살아간다.

우연히 우디는 장난감 수집광인 '알'에게 잡혀가 주인 앤디를 놓치게 된다. 다른 장난감들은 사라진 우디를 구하려고 알이 있는 곳으로 모험을 떠난다. 우디는 도망치려 했지만 알이 있는 곳에서 다른 버려진 인형들(제시, 불스아이, 프로스팩터 광부인형)을 만난다.
 
 영화 <토이스토리2>(1999) 스틸 컷.

영화 <토이스토리2>(1999) 스틸 컷. ⓒ 브에나비스타코리아

 
버려진 인형들은 원래 보안관 우디와 한 세트를 이룬 인형으로 우디가 그들과 함께 서면 꽤 어울리는 한 쌍이 된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우디가 앤디에게 돌아갈 것을 염려한다. 자신들도 믿었던 주인에게 버림받았고, 다시 돌아간다 해도 결국 넌(우디) 버려지게 되어있다고 말한다. 우디는 앤디를 믿지만 조금씩 갈등한다. 우디도 그들과 함께 인형 박물관에 가는 쪽으로 마음을 기운다.

앤디의 장난감들이 우디를 구하러 오자, 우디는 고민하던 끝에 결국 다시 앤디에게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제시와 불스아이, 프로스팩터에게 모두 함께 가자고 설득한다. 하지만 악역을 맡은 프로스팩터는 장난감들이 다시 돌아가지 못하게 무력으로 막는다. 그리고 그를 물리치려는 장난감들의 소동이 시작된다. 결말은, 다시 장난감들은 무사히 앤디 곁으로 오게 된다. 제시와 불스아이도 함께. 내용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결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한 치도 빗나가지 않는다. 그럴 것을 알고 보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다.
 
<토이스토리> 시리즈에서 시계추처럼 등장하는 건, 오히려 사람이 아니라 장난감들끼리의 모험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끼리 주고받는 유대와 협동이다. 사람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사람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작고 연약한 것들끼리 사실은 연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짠하면서 사랑스러웠다. 주인이었던 내가, 어느새 조용히 장난감들의 우정을 응원하고 있었다. 비슷하게 난 학교를 졸업했고, 사회로 향해 문을 나서는 친구들과 나를 응원했다.
 
2010년 <토이스토리3>가 나왔다. 방을 둘러본다. 내 방에, 더이상 장난감이라고 볼 만한 것은 없다. 비슷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놀잇감의 역할이 아닌 장식과 치장의 도구로 있을 뿐이다. <토이스토리3>에서도 앤디는 성인이 되었다. 앤디의 방에도 컴퓨터와 학용품은 있지만 더이상 눈에 보이는 곳에 장난감은 없다. 해묵어 먼지 쌓인 상자 속에 장난감들은 쌓여있다. 이제 우디를 비롯한 다른 장난감들도 낡아갔고 그들은 성인이 된 앤디가 자신들을 끝내 버리진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장난감들과 앤디 사이에 오해가 생긴다. 앤디는 그들을 그저 다락에 묵혀두려는 생각이었지만 앤디 엄마의 방해로 장난감들은 탁아소에 기부 될 입장에 처한다. 장난감들은 앤디에게 크게 실망했고 엄마의 훼방을 알아챘던 우디는 끝까지 앤디를 변호한다. 그러려는 게 아니야. 앤디는 우리를 버리려는 게 아니야. 모두 오해야. 라고.
이미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장난감들은 새로운 장소인 탁아소에 적응하려 한다.
 
 영화 <토이스토리3>(2010) 스틸 컷.

영화 <토이스토리3>(2010) 스틸 컷.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탁아소에서는 매년 마다 아이들이 들어오니 함께 놀아줄 주인도 많고 다시 새롭게 장난감의 본분을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곳에도 역시나 악당은 존재한다. '라쏘'라고 불리는 핑크색 곰 인형. 라쏘는 탁아소의 대장 역할을 맡고 있지만 사실 '군림'의 형태였다. 탁아소 장난감들을 제 입맛에 맞게 조절하며 그들이 거처할 방도 마음대로 정한다.

그러한 독재에 이미 편승한 장난감들도 있었다. 질서는 그렇게 유지되고 있었다. 좋아 보이고 정갈하게만 보였던 규칙이, 모두의 의견을 묵살한 독재에서 나오고 있었다. 사실 라쏘에게도 나름의 사연은 있다. 라쏘도 누군가의 어여쁜 장난감이었고 당시 아이였던 라쏘 주인은 잠에 빠져 바깥에 라쏘를 두고 돌아온다. 라쏘는 비바람을 헤치고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간다. 하지만 주인은 또 다른 라쏘를 새롭게 구입해 애정을 쏟고 있다. 라쏘는 쓸쓸했다. 배신감과 열등감이 휘몰아쳤다.

그 후 다른 장난감들을 선동해 탁아소로 거처를 옮겨 '강자'의 매력을 맛본다. 자신을 버린 주인은 자신에 비해 '강자'였고 강자야말로 또다시 그런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자라고 확신한다. 그렇게 라쏘는 다른 장난감들 위에서 잔인하게 군림한다.
 
장난감들은 분개했다. 그리고 협동했다. (그 와중에 '버즈 라이트이어'의 변화-스페인어 버전으로 바뀌는 설정은 은근한 재미를 주었다) 라쏘를 물리치고 다시 앤디에게로 돌아갈 방법을 궁리한다. 여러 방황 끝에 결국 그들은 앤디 곁으로 다시 돌아온다.

라쏘의 독재를 보며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고 장난감들이 탈출하는 과정을 보며 통쾌하기도 했다. 결국 장난감들이라 관객들을 웃겨주기도 했고 애잔하게도 했다. 우리는 아무 개입 없이 그저 그들을 보고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앤디에게 돌아온 장난감들은 우디만 앤디와 함께 대학에 갈 것으로 예상한다. 그리고 나머지 장난감들은 다시 다락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다. 우디만은 대학에 데려가려 했던 앤디도 그렇게 모든 것을, 정리하는 듯 보였다. 가족도, 시간도, 추억도, 유년도, 장난감도.

여기서 우디는 생각을 바꾼다. 자신과 늘 함께했던 장난감들이 다른 상자에 담긴 것을 보고 결국 마음이 동해 자신도 그들이 있는 상자로 자진해서 들어간다. 결국, 한 데 묶인 장난감들은 이웃집에 사는 아이 '보니'에게 전해진다. 앤디는 보니에게 장난감들의 특징을 하나씩 설명하며 자신의 친구들을 잘 돌보아 달라고 한다. 그리고 우디마저 보니에게 건네며 우디는 절대 친구를 배신하지 않는 멋진 장난감이라고 설명하며 길을 나선다.
 
 영화 <토이스토리3> 스틸 컷.

영화 <토이스토리3> 스틸 컷. ⓒ 한국소니픽쳐스릴리징브에나비스타영화

 
보니의 품에 들어간 장난감들은 떠나가는 앤디를 지긋이 바라본다. 물론 장난감이니 축 늘어지고 변함없는 얼굴을 한 채로 말이다. 앤디는 마지막으로 우디와 버즈의 얼굴을 보며 말한다. "Thanks guys." 앤디의 차는 떠난다. 앤디가 떠나간 자리에서 우디는 말한다. "So long, parter."

앤디는 대학이라는 새로운 문을 열기 위해 장난감들을 품에서 놓았다. 나 또한 성인이 됐고 그간 여러 번의 이사를 하며 사라진 장난감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이름까지 붙여주며 함께 놀았던 곰돌이 인형, 예쁘게 꾸며주겠다며 얼굴과 머리에 싸인펜으로 색칠을 했던 밀랍 인형, 머리카락을 내멋대로 잘라버린 바비인형. 모두 기억난다. 그간, 내 장난감들도 변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늘 웃는 채로.

하지만 내가 여러 문을 거쳐온 것처럼 장난감들도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뀌니, 그들도 결국 내게 바뀐 존재가 된 건 아닐까. 내가 그들을 정리한 것도 맞지만 장난감들도 나와의 관계를 차근차근 정리해오지 않았을까.

장난감에 여러 감성을 덧대는 것도 우습지만 그게 가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장난감을 장난감 자체가 아닌, 내 유년의 한 줄기로 보게 돼서 그런 것 같다. 어렸을 적 나도, 장난감들 사이에 또 다른 장난감처럼 그들과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문을 하나씩 여닫을 때마다 아이였던 난 고장 난 장난감처럼 옅어져 갔다. 이제는 그때 그 아이가 어떤 방식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는지 흉내 낼 수 없다. 너무 멀리 와 버렸고 아주 많은 것들이 변했다.

앞으로 내게 남은 문은 몇 개일까. 어떤 문들이 남았을까. 인생을 뭉텅이로 두고 본다면 난 과연 어떤 시기에 와 있는 걸까. 내가 조금 어른이 된 건 맞을까. <토이스토리> 시리즈를 보며 이제와 이런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됐다. 흥미롭게만 보였던 '만화 영화'가 이런 질문을 남길 수 있게 하는 데는 분명 특별한 것이 있다. 내가 거쳐온 문들이 꼭 내게만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보편적인 것이 때론 특별한 것이 될 수 있다. 앞으로 또다시 커갈 '보니'도 자신만의 문을 열 것이다. 분명 어떤 시기에 가서는 '이별'이라고만 말할 수 없는 변화들을 겪는다.

안녕,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여기 하늘엔 네가 어릴 때 바닷가에서 주웠던
소라 껍데기가 떠 있어.
거기선 네가 좋아하는 슬픈 노래가
먹치마처럼 밤 푸른빛으로 너울대.
그리고 여기 하늘에선 누군가의 목소리가
날마다 너를 찾아와 안부를 물어.
있잖아, 잘 있어?
너를 기다린다고, 네가 그립다고,
누군가는 너를 다정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네가 매정하다고 해.
날마다 하늘 해안 저편엔 콜라병에 담긴
너를 향한 음성메일들이 밀려와.
여기 하늘엔 스크랩된 네 사진도 있는 걸.
너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웃고 있어.
그런데 누가 넌지 모르겠어. 누가 너니?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메일들이
오로라를 타고 이곳 하늘을 지나가.
누군가 열없이 너에게 고백하던 날이 지나가.
너의 포옹이 지나가. 겁이 난다는 너의 말이 지나가.
너의 사진이 지나가.
너는 파티용 동물모자를 쓰고 눈물을 씻고 있더라.
눈밑이 검어져서는 야윈 그늘로 웃고 있더라.
네 웃음에 나는 부레를 잃은 인어처럼 숨 막혀.
이제 네가 누군지 알겠어. 있잖아, 잘 있어?
네가 쓰다 지운 울음 자국들이 오로라로 빛나는,
바보야, 여기는 잊혀진 별 명왕성이야.
- 장이지, '명왕성에서 온 이메일'


무언가를 버리고 지금에 와 있다고 해서 스스로를 너무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지나온 모든 시기들이 나를 만들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반드시 버린 게 아니다. 모아둔 것이라 생각하면 될까. 우린, 어떤 날의 나를 잊은 게 아니라 흉내 낼 수 없는 것뿐이니까.
토이스토리 영화 우디 버즈 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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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사와 문학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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