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8, 1959년 내셔널리그 MVP이자 시카고 컵스의 영구결번,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헌액자 고(故) 어니 뱅크스는 현역 시절 올스타전 11회 출전에 빛나는 컵스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였다. 특히 수비 부담이 많은 유격수임에도 두 번의 홈런왕을 포함해 통산 512홈런을 때려낸 거포 유격수의 원조로 꼽힌다.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등장하기 전까지 시카고에서 가장 유명한 스포츠 스타는 바로 뱅크스였다.

하지만 뱅크스의 화려한 커리어에도 뭔가 허전한 부분이 있다. 바로 플레이오프 출전 기록이다. 뱅크스는 1953년 빅리그에 데뷔해 1971년까지 컵스에서만 19년 동안 활약했지만 이 기간 동안 컵스는 한 번도 가을야구에 진출하지 못했다. 뱅크스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포스트시즌 출전 없이 가장 많은 경기(2528경기)에 출전한 선수로 남아 있다. 역시 야구는 위대한 슈퍼스타 한 명으로 팀을 강하게 만들 수 없는 스포츠라는 것이 뱅크스를 통해 증명된 셈이다.

야구만큼 심하진 않지만 주전 5명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필요한 농구에서도 마찬가지다. 슈퍼스타 한 명을 보유했다고 해서 그 팀이 금방 우승후보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꼽히는 'CP3' 크리스 폴(휴스턴 로케츠)도 NBA 데뷔 후 지난 12년 동안 우승은커녕 컨퍼런스 파이널 무대조차 밟은 적이 없다. 그런 폴이 이번 시즌 생애 최초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고 내심 생애 첫 파이널 진출과 우승까지 노리고 있다.

한 번도 우승권 팀에서 뛰지 못했던 현역 최고의 포인트 가드

아마추어 시절부터 알아주는 유망주였던 폴은 고교 시절 그의 정신적 멘토였던 할아버지가 61세의 나이에 강도의 총에 맞아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폴이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경기에서 혼자 61점을 넣고 동료들 품에서 펑펑 우는 영상은 지금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웨이크 포레스트 대학 진학 후 2년 동안 전미 최고의 포인트가드로 명성을 떨친 폴은 2005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4순위로 뉴올리언스 호네츠에 지명됐다.

루키 시즌부터 16.1득점 7.8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한 폴은 생애 첫 올스타와 어시스트왕에 오른 2007-2008 시즌 뉴올리언스를 플레이오프로 이끌었다. 하지만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큰 경기 경험이 풍부한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만나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스몰마켓의 한계 때문에 많은 전력 보강을 할 수 없었던 뉴올리언스는 언제나 폴과 데이비드 웨스트(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의 콤비플레이에만 의존해야 했다.

폴은 호네츠에서 뛴 6년 동안 어시스트왕 2회와 스틸왕 3회, 올스타 출전 4회, 올 NBA팀 3회 선정 등 개인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리딤팀 멤버로 출전해 8년 만에 미국 남자 농구팀에 금메달을 되찾아 오기도 했다. 하지만 플레이오프에서 폴 혼자 힘으로는 무리가 있었고 결국 폴은 2011년 12월 트레이드를 통해 대도시를 연고로 하는 LA 클리퍼스로 이적했다.

폴의 이적과 함께 클리퍼스는 전혀 다른 팀으로 변모했다. 약 팀의 외로운 에이스가 될 운명에 놓여 있던 블레이크 그리핀(디트로이트 피스톤즈)은 폴과 호흡을 맞추며 리그 정상급 파워포워드로 거듭났고 운동능력과 농구IQ가 반비례하던 디안드레 조던은 폴의 패스를 받아 수많은 하이라이트 필름을 만들었다. 여기에 미남 슈터 J.J.레딕(필라델피아 76ers)까지 가세하면서 클리퍼스는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을 완성했다.

하지만 클리퍼스 역시 폴이 가세한 후 6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을 뿐 번번이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좌절했다. 1옵션 역할을 해줘야 할 그리핀이 부진할 때도 있었고 닥 리버스 감독의 지도력이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 무엇보다 폴 본인이 플레이오프만 다가오면 각종 부상에 시달리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NBA팬들은 폴이 컨퍼런스 파이널에 가지 못하는 것은 단순한 징크스가 아닌 '과학'이라고 조소를 보냈다.

최고의 동료 하든과 함께 황금전사들의 화력 깰 수 있을까

클리퍼스에서 우승에 도전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폴은 2016-2017 시즌이 끝난 후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했고 클리퍼스는 계약 기간이 1년 밖에 남지 않은 폴을 휴스턴으로 보냈다. 7명의 선수와 신인지명권에 현금까지 받은, 단일 선수 이적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의 트레이드였다. 이로써 폴은 휴스턴에서 NBA 현역 최고의 슈팅가드로 꼽히는 '털보' 제임스 하든과 호흡을 맞추게 됐다.

공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폴과 하든의 플레이 특성상 동선이 겹칠 거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마이크 댄토니 감독은 두 선수의 출전시간을 적절히 배분해 주며 효율적으로 팀을 이끌었다. 그 결과 휴스턴은 정규리그에서 65승을 올리며 서부컨퍼런스의 지배자 골든스테이트를 제치고 1번 시드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폴은 정규리그에서 18.6득점 5.4리바운드 7.9어시스트로 개인 기록이 다소 떨어졌지만 폴이 합류한 휴스턴은 구단 창단 후 최다승을 달성했다.

휴스턴은 플레이오프에서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와 유타 재즈를 각각 5경기 만에 가볍게 제압하고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휴스턴에게는 2014-2015 시즌 이후 3년 만의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이고 폴에게는 생애 첫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이다. 폴은 유타와의 컨퍼런스 준결승 5차전에서 홀로 41득점 7리바운드 10어시스트 0실책이라는 황당한 기록으로 휴스턴의 컨퍼런스 파이널 진출을 이끌었다.

하지만 하킴 올라주원 시대 이후 23년 만에 파이널 진출을 노리는 휴스턴 앞에는 '디펜딩 챔피언'이자 4년 연속 파이널 진출을 노리는 '황금전사군단' 골든 스테이트가 길을 막고 서 있다. 골든스테이트는 정규시즌에서 주전선수들의 줄부상으로 58승에 그쳤지만(?) 뉴올리언스 펠리컨스와의 컨퍼런스 준결승에서 스테판 커리가 복귀하면서 '완전체 전력'을 구축했다.

기존의 농구상식들을 차례로 깨고 있는 신개념 슈터 커리와 현존하는 최고의 정통 포인트가드 폴의 매치업은 농구팬들에게 최고의 볼거리를 안겨줄 것이다. 폴이 커리와의 맞대결에서 상대적 우위를 점한다면 그만큼 휴스턴의 파이널 진출 확률도 높아질 것이다. NBA 13년 동안 언제나 최고로 군림했으면서도 정작 우승반지와는 인연이 없었던 크리스 폴이 생애 처음 경험하는 컨퍼런스 파이널 무대에서 휴스턴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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