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흘러가면 많은 것이 변한다. 우리도 그것을 피해 갈 수 없다. 누군가는 아버지가 되고, 누군가는 어머니가 된다. 그냥 죽을 수도 있고, 그냥 살 수도 있다. 어찌 됐든 그 경험 사이의 어딘가는 추상적으로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린 사진을 찍는다. 그래서 우린 일기를 쓴다. 우리가 기억하는 이 순간은 찰나에 불과하니까. 그 찰나가 당신이 남긴 기록 속에 남는다. 마치 카메라의 플래시 불빛처럼. 눈 깜짝할 사이.

숱한 영화들이 그 찰나의 느낌을 기록하려 애쓰곤 한다. 방법은 다양하다.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미묘한 변주의 지점을 찾아내던가 (<패터슨>), 시간을 거꾸로 돌려 새로운 방향을 부여하던가(<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런 영화들 사이에서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설정은 아무래도 '타임리프'가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타임리프는 시간 자체를 다룬다는 점에서 모든 '찰나' 영화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콘택트>(1997)는 그런 영화 중의 하나다. 하지만 아주 묘한 설정들로 덮여 있어 첫눈에 알아보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이 작품을 볼 때 '믿음'에 대한 영화라고 착각하곤 한다. 실제로 영화의 전체적인 플롯은 과학과 종교가 대립하다가, 끝내 화합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왜 그런 평가가 나오는지 짤막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콘택트>와 진리

과학은 종교를 설명할 수 없고, 종교는 과학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는 천문학자 '엘리 애로웨이(조디 포스터 분)'와 신학자 '팔머 조스(매튜 매커너히)'를 연인 관계로 만들며, 화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을 이어 놓는다. 당연하게도, 그건 두 사람뿐만 아니라 두 학문을 이어 놓는 것이기도 하다. 이때 두 간극 간의 연결고리는 '사랑'이고, 그건 어느 쪽에서 바라보든 이견이 없다. 사랑은 결코 정의되지 않는 무언가이기 때문이다. 과학의 눈으로 보아도 종교의 눈으로 보아도 그 따스함은 "그 자리에 있다."

 영화 <콘택트>의 작품 포스터

영화 <콘택트>의 작품 포스터 ⓒ 워너브라더스


그런데 사랑이 어느 학문에서나 '있다'라고 정의되는 건, 그것이 확실한 존재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다. 과학적으로 볼 때 사랑은 심장이 요동치고 화학물질이 분비되는 무언가다. 종교적으로 볼 때 사랑은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을 내어줄 수 있는 무언가다. 겉으로 명백하게 관찰되고, 주위를 둘러봐도 관찰된다. 이미 신체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강력하게 뿌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 감정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재현하지 못하기에 사랑은 일종의 '성역'으로 남는다.

그리고 이 작품에는 외계적인 존재가 등장한다. 그 존재는 26광년 떨어진 베가성에서 강력한 신호를 보내오고 있다. 하지만 인류는 그곳에 닿을 수 없다. 베가성으로 받은 초대장에 답할 수가 없다. 첫째는 그곳에 갈 기술력이 없고, 둘째는 그곳에 갈 추진력이 없다. 그 외계인이 우호적인지 배타적인지를 두고 싸우거나, 외계인에 대한 태도가 우호적인지 배타적 인지를 두고 싸운다.

결국 사랑이나 외계인이나 여러 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곳은 '성역'이다. 쉽사리 닿을 수 없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그 성역이 지구인들에게 이리 오라 손짓한다. 말하자면 사랑이 먼저 손을 내민 셈이다. 보통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이 경우는 "사랑이 누군가가 되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우주 어딘가에 나타난 사랑 그 자체에 대해 다루고 있다. 말하자면 갑작스레 찾아온 사랑에 당황스러워 하는 것과 같다. 마치 첫사랑처럼.

이제 다시 위의 문단으로 돌아가 보자. 이 영화에서 우주에 있는 그 사랑이 정말로 있을까? 신호를 보내오니 외계인이 있다는 건 확실하다. 이때, 이 확실함에 의문을 품는 누군가가 생긴다. 당신이 사랑해본 적이 있다면 이것을 잘 이해할 수 있다. 나는 정말로 그를 사랑하는 걸까? 누군가는 단박에 확신했을 것이지만 누군가는 아니다. 한 번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면 의심해볼 법한 감정이다. 더군다나, 그건 물질적인 것이 아니니 의심을 키울 수밖에 없다.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한마디로 이 영화에서 우주는 인간의 마음을 대변하는 장치다. 우주처럼 드넓은 우리 마음 어딘가에 '외계인'이 있을 것이다. 주인공 '엘리'는 그런 사람이다. 영화 초반에 엘리는 아버지와 사이가 무척 좋은 것으로 묘사된다. 어머니가 없기에 당연하다. 그의 아버지는 죽은 어머니 몫을 합쳐 아주 강한 사랑을 준다. 그 사랑은 우주에 대한 동경과 결합되어 있다. 어린 엘리는 조그마한 전파기에 대고 익명의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 신호는 우주, 혹은 지구 어딘가로 날아가 다시금 엘리에게 온다. 엘리가 받은 사랑은 전파기를 통해 발신되고, 신호를 받은 누군가에게 사랑을 돌려받는 것이다.

사랑을 받아본 적이 있어야 사랑을 줄 수 있다는 관용어구는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다. 오래 전 인류가 쏘아 보낸 전파가 베가성으로부터 돌려받아진 것처럼 말이다. 재밌게도 '오래전 인류가 쏘아보낸 전파'는 히틀러가 송출했던 독일 올림픽 연설이다. 사실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것 또한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과거 한때 독일 국민들이 히틀러를 사랑했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결국 이 영화에서 사랑이란 그 자체로의 순수성을 띈다. 광적이거나 병적이거나 하는 것들이다. 이른바 집착이나 의심의 형태로 변용되기까지 하는 감정들이,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걸 넌지시 말해준다. 모든 감정의 근본은 사랑이고, 그게 우주처럼 광활한 어딘가에 떠돈다고 말한다. 우주는 인류가 파악하지 못한 공간이고, 앞으로도 얼마가 걸릴지 모른다. 하지만 우주는 지구 어디에서나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인류 역사 이래로 끊임없이 관찰되어 왔다. 다시 말해 우주는 '불변과 초월'의 가치를 지닌 곳이다.

즉 이 영화에서 우주는 감정을 담은 공간이며, 앨리는 그게 불변하고 초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그건 시간의 정의와도 같다. 시간은 불변하고 초월한 가치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 달리고, 이 영화에서 엘리는 불변하는 존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우주의 지적 생명체를 찾는다는 'SETI' 프로젝트는 엘리 자신의 불변함을 찾겠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 불변함은 바로 아버지의 사랑이다.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엘리에게 아버지의 사랑은 불변할 수밖에 없다. 한창 사랑받던 시기에 아버지가 죽었기 때문이다. 이른바 현재진행형에서 과거 진행형으로 바뀌어 버린 그 사랑이, 엘리의 마음 속에 여전히 남아있다. 마음 속 어딘가에 남아있는 따스한 사랑의 흔적이, 우주 어딘가에 남아있을 것이라 믿고 간절히 찾아 헤맨다. 사랑의 존재는 외계인이며, 그 존재의 증명은 곧 자기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변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마침내 엘리는 외계인으로부터 받은 초대장을 통해 아버지의 현신을 목격하게 된다. 엘리의 기억 속 누군가의 모습으로 나타난 외계인은, 그 모습을 통해 정말로 아버지가 된다. 영화 내내 이유를 증명하려 하고 가치성을 부과하려는 엘리의 모습은, 시간 앞에 무색한 우리가 그 이유를 따져 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필멸자이기에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 결과에 이유를 물으려 한다. 끝이 정해진 경주임에도 끝임없이 달려간다.

흔히 시간을 절약하는 개념인 '웜홀'은, 그 입구와 출구의 시간이 달라지게 하기도 한다. 과학적으로 따졌을 때, 웜홀은 시공간을 접어 두 지점을 잇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찰나'의 순간은 18시간으로 늘어진다. 그런데 그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의 18시간이 그쪽 시간으로 찰나에 불과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건 우리가 사랑하는 누군가와 있는 시간이, 1초라도 아깝게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1초도 낭비되어선 안된다. 혹은 그렇게 여겨진다. 18시간을 만나도 '찰나'의 순간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아무리 만나도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모습을 한 외계인은 자신이 이런 일을 수백억 년 반복해왔다고 말한다. 그건 백 년을 사는 우리로서 무척 긴 시간이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 우주의 나이는 138억년이다. 이미 외계인은 우리의 인지범위를 뛰어넘었고, 그건 사랑의 깊이를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혹은 불변한 것처럼 보이는 우주라도, 시간이라도, 사랑이라도 결국은 끝을 볼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영화 내에선 그것이 '진리'라는 말로 표현된다. 신학자에게도 천문학자에게도 진리는 있다. 그건 곧 자신이 믿고 싶은 게 진리라는 뜻이다. 이유를 따져 결과를 확실히 해야 하는 과학자에게나, 단 하나의 신만 믿어야 하는 신학자에게도 진리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막연한 믿음은 과학적 사고에 어울리지 않고, 막연한 믿음은 단일 신앙의 순수성을 깨뜨린다. 그러니까 막연한 믿음이란, 밤하늘에 놓인 별의 수만큼 흔한 것이면서도 일일이 증명할 수 없다.

그런데 과연 진리라는 게 있을까? 우리는 진리를 믿으면서도 진리가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신앙의 영역으로 여겨진다. 많은 비신앙인들이 신앙인들에게서 듣기 싫어하는 말이 "하느님은 그곳에 계십니다"일 것이다. 이성적인 사람은 그 말을 증명할 수 없으므로 싫어한다. 감성적인 사람은 그 말을 믿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싫어한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믿다'라는 말이 '있다'가 아니라는 점이다. 사랑이나 시간은 믿는 것으로 증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그냥 있는 것이다. 원초적이고 추상적이고 수없이 많은 것들의 모티브가 되기 때문이다. 신앙인들에게 신이란 그냥 있는 것이다. 그들은 신을 믿어 있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신이 있기에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 두 주인공의 관계는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천문학자 엘리는 보아야만 있는 사람이고, 신학자 팔머는 있어야만 보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마치 영화 후반의 엘리처럼 웜홀의 양 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간의 시간은 분명 차이가 있다. 어쩌면 그것이 그들의 믿음의 가치나 사랑의 총량을 대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그런데 과연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고등학생에게 하루는 무척 길고 길지만, 직장인에게 하루는 무척 짧게 느껴진다. 마찬가지로, 노인들에게 하루란 그들 인생 중 찰나를 차지하는 것에 불과하다. 시간의 가치는 상대적이고,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모든 것을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조차 시간의 가치를 매겨 세우지 못한다. 그건 시간이나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 영화는 믿음 이전에 시간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사실 모든 추상적인 것은 이 부류에 속한다. 이 영화를 샅샅이 뜯어보면 여러 구조적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마음에 깊숙이 와 닿는 것만은 분명하다.

<콘택트>와 진심

사실 이 글은 이 부분을 말하기 위해 쓰였다. 사람들은 흔히 영화에 별점을 매겨 구체적인 평가를 내리는데, 과연 그것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넷플릭스 관계자는 영상물에 대한 평가가 '좋아요'와 '싫어요'로 나누어진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별점이 이용자가 작품을 선택하는 것에 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우리는 좋은 영화 나쁜 영화만 구분할 뿐이라는 말이다.

좋은 영화는 무엇이고 나쁜 영화는 무엇인가? 우리는 영화를 보며 평점에 집착한다. 혹자는 평론가들의 평점을 보며 이해할 수 없다고들 말한다. 혹자는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건 결국 취향일 뿐이다. 그 취향이란 것은 영화를 얼마나 알고 사랑하느냐다.

하지만 <콘택트>가 말하듯, 사랑이란 것은 그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엘리는 왜 우주를 사랑하게 되었을까? 그곳에 우주가 있어서는 아니다. 명백하게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부모님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천문학자가 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런 논의는 이유에 대해 따져 세우는 것일 뿐, 지금 엘리의 모습을 대변하지는 못한다. 그 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 세울 수 없기에, 우리는 현재에 가치를 매기는 것이다.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 워너브라더스


시간이 불변해도 당신은 불변하지 않기에 지금 충실히 살아야 하며, 사랑이 불변하지 않기에 지금 아름답게 사랑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란 것은 어느 순간 명명백백하게 따질 수 없다. 우리가 보통 영화에 대해 접근한다면 둘 중의 하나일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성적' 접근과 '감성적' 접근이다. 이것은 우뇌와 좌뇌로 대변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두 유형의 사람은 일반적으로 어울려지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두 유형의 사람은 이미 이 영화에서 나타난 바 있다. 엘리와 팔머는 그런 사람이다. 일반적으로 영화광이라 한다면, 어느 장면이 좋고 이 장면이 어떻게 기능하는지 알고 싶어한다. 세간의 인식도 실제로 그러해서, 대게 영화 평론은 그렇게 쓰인다. 이른바 이론 비평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는 사람 중, 그렇게 접근하는 사람은 몇 안 된다. 대부분 사람들이 영화를 보고 나서 "이 영화는 어딘지 모르게 불쾌하다. 마음이 따듯해진다"와 같은 평을 쓴다. 이른바 인상 비평이다.

사람들은 이론 비평을 하는 사람들을 동경하는 동시에 경멸하기도 한다. 평론가를 싫어한다면 이론을 늘어놓는 그들이 조금 잘난 체하는 것처럼 보여서일 것이고, 평론가를 좋아한다면 영화를 이렇게도 볼 수 있다며 감탄하기 때문일 테다. 그런데 그건 평론가로 인정받는 사람들이 이론에 치중해 있기 때문이다. 이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이론 비평가를 찾겠지만, 영화 시장의 대부분은 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인상 비평가들이 많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그걸 좋아하지 않는다.

왜 사람들은 인상 비평가를 싫어할까? 사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엘리가 그러하듯, 원인과 결과를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주변의 인정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그건 비평이 학문으로 보일 때만 그렇다. 비평과 평론은 명백하게 다르다. 비평은 학문이지만 평론은 '글'이다. 한마디로, 대중의 언어로 쓰여야 한다.

대중의 언어라는 것은 보편적이라는 뜻이고, 그건 곧 누구나 평론가처럼 사고하고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평론가의 글이 왜곡된 건, 그들이 영화에 대해 믿는 사실을 어렵게 꼬아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결국, 비평이 굳이 평론가에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평론은 누구나 쓸 수 있고, 평론가는 그나마 잘 쓰는 사람을 인정한 것뿐이다. 그리고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면 영화를 사랑하기 때문일 텐데, 영화에 대한 사랑에 가치를 매길 수는 없다. 그런 맥락에서 <콘택트>는 우리가 어떻게 영화를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영화 콘택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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