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같았던 3개월이었을 것이다. 축구로 치면 아시안컵과 컨페더레이션스컵, 월드컵 최종예선이 한 시즌에 모두 열린 셈이다. 그것도 선수들이 휴식을 취하고 다음 시즌을 준비해야 할 비시즌 기간에 말이다.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무려 4개의 국제대회에 출전하며 강행군을 펼친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 이야기다.

한국 여자배구는 지난 6월 월드그랑프리 세계여자배구대회를 시작으로 8월 아시아선수권대회, 9월 그랜드 챔피언스컵과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 예선전까지 무려 4개의 국제대회에 출전했다. 한국은 1.5군이 참가한 그랜드 챔피언스컵에서만 전패를 당했을 뿐 월드그랑프리 2그룹 준우승, 아시아 선수권 동메달,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 예선전 B조 1위라는 성과를 올리며 선전했다.

여러 대회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선수들은 대회를 치를수록 체력의 부담을 느꼈고 대한배구협회는 그랜드 챔피언스컵에서 주전 선수들을 대거 제외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올해 열린 4개의 국제대회에 모두 참가해 주전으로 활약하며 대표팀을 위해 헌신한 선수가 있다. 이제는 대표팀에서 절대 없어선 안될 부동의 주전 센터가 된 김수지가 그 주인공이다.

소속팀에서도 대표팀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제2 센터'의 설움

 김수지는 흥국생명으로 이적한 후에야 비로소 팀 내 넘버원 센터가 될 수 있었다.

김수지는 흥국생명으로 이적한 후에야 비로소 팀 내 넘버원 센터가 될 수 있었다. ⓒ 한국배구연맹


김수지는 김동열 원곡고 감독과 홍성령 전 원곡중 코치의 장녀로 어린 시절부터 좋은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배구를 접했다(김동열 감독은 김수지 외에도 '여제' 김연경을 비롯해 황연주, 배유나, 강소휘 등 많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도했다). 하지만 김수지의 프로 생활에 마냥 꽃길만 펼쳐졌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김수지는 2005-2006 시즌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3순위로 현대건설 힐스테이트에 입단했지만 당시 현대건설에는 여자배구 최고의 센터 정대영(한국도로공사 하이패스)이 있었다. 김수지는 정대영과 짝을 이뤄 루키 시즌부터 많은 경기에 출전했었지만 같은 나이에 절친이자 넘사벽 김연경이 있어 당연히 신인왕은 꿈도 꿀 수 없었다(김연경은 입단 첫 시즌부터 신인왕과 정규리그, 챔프전 MVP를 휩쓸었다).

2007년 정대영이 GS칼텍스KIXX로 이적한 후에도 김수지에게 봄날은 오지 않았다. 같은 해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거요미' 양효진이 현대건설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루키 시즌부터 블로킹 부문 3위(세트당 0.57개)에 오르며 현대건설의 희망으로 떠오른 양효진은 2009-2010년부터 블로킹 부문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올랐다. 김수지는 프로에 입단한 지 9년이 지나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로 이적한 후에야 뒤늦은 전성기를 맞을 수 있었다.

대표팀에서도 김수지의 차례는 조금 늦게 찾아왔다. 2000년대 한국 여자배구 최고의 영광으로 꼽히는 2012년 런던 올림픽 4강 당시 한국은 양효진과 정대영, 그리고 189cm의 장신 하준임으로 센터진을 꾸렸다. 김수지는 정대영과 활동 범위가 겹친다는 이유로 주전은커녕 대표팀 엔트리에도 이름을 올리지도 못했다.

한국이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이후 20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김수지의 이름은 찾을 수 없었다. 당시 대표팀을 이끌었던 이선구 감독은 양효진과 배유나를 주전으로 내세우고 유사시엔 신장(186cm)이 좋은 레프트 박정아를 간간이 센터로 활용했다.

'맏언니' 김수지, 3개월 동안 27경기 강행군

 김수지는 후배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경기마다 수훈 선수에게 메달을 걸어주는 섬세한 선배이기도 하다.

김수지는 후배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경기마다 수훈 선수에게 메달을 걸어주는 섬세한 선배이기도 하다. ⓒ 아시아 배구연맹


김수지가 대표팀에서 조금씩 존재감을 나타내기 시작한 건 작년 리우 올림픽부터였다. 과거 현대건설에서 수 년간 호흡을 맞췄던 양효진과 대표팀에서 재회한 김수지는 특유의 날카로운 이동공격을 앞세워 한국의 8강 진출에 적지 않은 공헌을 세웠다. 그리고 소속팀에서나 대표팀에서나 눈에 잘 띄지 않던 김수지는 2016-2017 V리그를 통해 한국 여자배구 정상급 센터로 발돋움했다.

김수지는 2016-2017 시즌 정규리그에서 블로킹 부문 4위(세트당 0.64개)와 속공 부문 1위(56.03%)를 차지하며 흥국생명의 정규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김수지는 지난 4월에 열린 V 리그 시상식에서 센터부문 베스트7에 선정됐는데 이는 V리그 13년 차 김수지가 받았던 첫 번째 개인상이었다(2013년 KOVO컵 MIP제외). 만29세에 비로소 첫 번째 전성기가 찾아온 것이다.

김수지는 V리그에서의 맹활약을 대표팀에서도 계속 이어갔다. 월드그랑프리대회에서는 유럽의 장신 선수들을 제치고 블로킹 부문 2위(세트당 0.73개)에 오르며 맹활약했고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는 대회 도중 부상으로 이탈한 양효진의 몫까지 뛰었다. 김수지는 주전들이 대거 제외됐던 그랜드 챔피언스컵에도 붙박이 주전 선수로는 유일하게 참가해 임시 주장직까지 맡았다.

그리고 24일 폐막한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 예선전에서도 김수지는 전 경기에서 교체 없이 풀타임으로 출전하며 한국의 무실세트 전승을 이끌었다. 특히 고비가 될 수 있었던 북한과의 첫 경기에서는 블로킹 5개와 서브득점 2개를 기록하며 13득점을 올리는 맹활약을 펼쳤다. 김수지의 서브는 아주 강하진 않지만 변화가 심하고 까다로운 코스로 들어와 국제대회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시즌이 끝난 후 IBK기업은행 알토스로 이적한 김수지는 새 팀에 적응할 시간도 없이 대표팀에 소집돼 4개 대회에서 무려 27경기를 소화했다. 월드그랑프리에만 출전했던 김해란 리베로를 제외하면 김수지는 김연경과 함께 대표팀의 최고참 선수다. 결코 체력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 아님에도 올해 열린 모든 국제대회에 빠짐없이 출전한 김수지의 헌신은 대표팀만 소집되면 이런 저런 이유로 빠질 궁리부터 하는 일부 선수들이 보고 배워야 할 자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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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배구 세계선수권대회 아시아예선전 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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