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나는 부정한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에서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티모시 어빙. ⓒ ㈜티캐스트


2차 세계대전 중 나치독일의 유대인 대량학살(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극우세력의 주장은 이렇다. 첫 번째, 홀코코스트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사망자 수가 지나치게 과장되었다. 금전적 보상을 노린 유대인들이 희생자의 숫자를 부풀렸다. 세 번째, 아우슈비츠에 가스실 등 대량 학살을 위해 의도적으로 지어진 설비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론적으로, 홀로코스트는 허구이고 날조되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나는 부정한다(Denial)>는 영국에서 4년간 실제로 벌어진 '홀로코스트 명예훼손소송'을 다루고 있다.

미국의 유대인 역사학자인 데보라 립스타트 교수(레이첼 와이즈)의 한 강연에 데이비드 어빙(티모시 스폴)이 찾아온다. 데보라는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그를 홀로코스트 부인론자(denier)이자 인종주의자로 지목해 왔다. 이 자리에서 어빙은 립스타트 교수와 참석자들을 향해 홀로코스트를 입증할 증거가 단 하나라도 있으면 가져와 보라며 그를 몰아붙인다.

 영화 <택시운전사>

영화 <택시운전사>의 일부 장면이 날조라는 주장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다. ⓒ ㈜쇼박스


어빙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채택하고 있는 미국의 법정과 달리 소송의 피고가 원고의 오류와 책임을 입증해야 하는 영국에서 립스타트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한다. 최근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택시운전사>의 일부 장면들이 날조되었다며 법정대응을 검토할 수 있다고 한 전두환 측의 망언을 연상케 한다. 이제 립스타트는, 1980년 5월 광주의 피해자들이 당시의 진압군에 의한 대량학살을 스스로 입증해야 했던 것처럼, 나치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가 실재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증명해야만 한다.

진실을 위한 '전략'

 영화 <나는 부정한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은 결코 쉽지 않다. ⓒ ㈜티캐스트


진실을 지키려는 그를 돕기 위해 최고의 승률을 자랑하는 변호사 앤서니 줄리어스(앤드류 스캇)와 베테랑 변호사 리처드 램프턴(톰 윌킨슨)이 나선다. 그러나 그들은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립한다. 참혹했던 당시의 상황을 검증하기 위해 나선 아우슈비츠의 현장에서 립스타트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러나 변호사 램프턴은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조차 표하지 않은 채, 그저 무심히 당시를 입증할 증거를 수집하는 데만 몰두한다. 그러한 모습에 실망한 립스타트는 묻는다. 당신은 아우슈비츠에서 무엇을 느끼는가? 이에 램프턴은 부끄러움(shame)을 느꼈다고, 자신이 현장의 독일군이었더라도 당시의 명령을 따랐을 것이라는 생각에 수치스러웠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그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차가운 냉철함을 잃지 않는다. 그는 어빙의 모순을 찾아내기 위해 독학으로 독일어를 배우고 수많은 학술서를 검토하고 자료를 수집한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희생자들을 법정의 증인으로 세우려 하는 립스타트를 막아선다. 심지어 의뢰인인 립스타트조차 법정에서는 단 한마디도 증언하지 못하도록 한다. 어빙의 간계는 희생자들의 분노와 슬픔,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한 립스타트의 확신을 악용하여 그들을 감정의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고 이를 통해 역사적 사실의 확고부동한 신빙성마저 희석하려는 것이었다.

이는 전 정권의 보훈처장 박승춘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제창 여부를 지속적인 논란의 대상으로 조작한 수법과 유사하다. 매우 중요한 사안이지만 5·18의 사실 왜곡 등 본질적인 문제는 비껴가면서 유족들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 충분한 도구가 되었다. 그는 보란 듯이 5·18 추모식장에 모습을 드러냈고 언론은 격앙된 유족들의 반응을 자극적으로 그려내며 그들의 당연한 요구를 폄훼했다. 이와 흡사한 어빙의 의도를 변호사 램프턴은 간파하고 있었다.

변호사 램프턴은 명백한 증거와 추론을 통해 어빙을 압박한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가스실 지붕에 화학약품을 투입할 구멍이 없었다고 주장하는 어빙에게 묻는다. "건물의 용도가 가스 유입을 통한 학살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견고한 건물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가?" 어빙은 대피소로 쓰려고 했을 거라는 추측을 내어놓고, 그는 재차 추궁한다. "SS(나치 친위대)의 막사와 가스실은 약 4km 정도 떨어져 있다. 폭격에 대비한 대피소를 그렇게 멀리 지었다는 말인가? 폭격이 시작되면 그 먼 거리를 완전군장을 하고 뛰어가서 대피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당황하며 자신은 아우슈비츠 전문가가 아니라 히틀러 전문가라며 발을 빼는 어빙에게 그는 쐐기를 박는다.

"그렇다면 막연한 추측만으로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말고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입 닫고 있으라."

최종선고를 앞두고 자신들의 마지막 전략이 무엇인지 묻는 립스타트에게 변호사는 말한다.

"우리에게 전략은 없다. 오로지 진실만으로 꼼짝 못 하게 할 것이다."

영화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한 강의실에서 립스타트 교수는 학생들에게 묻는다. "홀로코스트가 역사적 사실임을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한 학생이 대답한다. "사진이 있으니까요"라고. 하지만 사실 유대인이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죽어가는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나치독일의 철저한 통제 속에 사진 촬영 자체가 불가능했고 설령 기록이 남아있었다 해도 모두 파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슈비츠는 1942년 독일군에 의해 의도적으로 철거되었고 종전 1주일 전 다이너마이트로 폭파되었다.

독일의 홀로코스트 그리고 한국의 광주

황 총리와 환담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5년 6월 29일 오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2015년 6월 29일 오전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황교안 국무총리와 환담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80년 광주의 참상 역시 항쟁 당시에는 신군부의 통제와 국내언론의 침묵으로 인해 외부로 전혀 알려지지 못했다. 그런데도 우리에겐 상당량의 진실을 담은 사진과 영상이 남아 있다. 처절했던 항쟁의 현장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당시 전남도청 부근의 전일빌딩과 같은 건물에는 헬기에서 시민들을 향해 기총소사를 가했던 흔적이 선명하다. 1997년 대법원은 이미 전두환에게 무기징역, 노태우에게 징역 17년을 선고함으로써 광주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성격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통합이라는 명분으로 이들을 사면함으로써 우리 현대사에 또 다른 논란의 불씨를 남겼다.

보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폄훼와 왜곡을 시도하는 세력이 다시 준동하기 시작했고, 이제 그 수괴가 공공연히 자서전을 출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두환은 2016년 <신동아>와의 인터뷰에서, 5·18 당시 북한군 특수군 600명이 광주로 들어와서 시민들하고 같이 봉기했다는 것이 사실이냐는 물음에 분명히 이렇게 대답했다.

"오 그래? 난 오늘 처음 듣는데?"

그런데도 그가 썼다고 주장하는 책에는 5·18이 '광주사태'로 적혀 있고, '북한 개입이 의심된다'는 등 518 왜곡/폄훼 세력의 거짓 주장이 그대로 담겼다. 그러나 지금 국가가 내릴 수 있는 조치는 출판금지가처분의 인용밖에는 없다. '집단표시에 의한 명예훼손죄'의 법리에 따르면 처벌에도 한계가 있어 이제는 법적으로 5·18 왜곡을 방지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독일은 1960년 이후 '홀로코스트 부인(denial)' 혹은 왜곡을 법적으로 금지해 역사 왜곡의 확산을 막았다. 이를 위반한 자는 5년 이하의 자유형 또는 벌금형을 받게 된다. 독일 뿐 아니라 나치에 피해를 보았던 유럽 10여 개 국가에서 이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매장에 <전두환 회고록>이 진열되어 있다.

지난 4월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교보문고 매장에 <전두환 회고록>이 진열되어 있다. ⓒ 권우성


이제 5·18의 역사 왜곡은 단순히 광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의 근현대사 속 모든 비극을 야기한 일본은 여전히 상당수의 역사적 사실을 부인하며 그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그들이 이토록 뻔뻔스러울 수 있는 이유가 오롯이 그들만의 문제이겠는가? 그들은 자국민을 집단으로 사살하고도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그 의미를 폄훼하고 그 책임을 회피하는 국가에 사죄도 보상도 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흑인 대통령의 탄생 이후 많은 이들은 이제 미국에서 더 이상 극단적인 인종주의가 발을 붙일 수 없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트럼프의 당선 이후 백인우월주의를 내세우는 KKK나 네오나치스트 같은 극우주의자들의 망령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우리 역시 이와 유사한 극우주의자들의 행태를 전 대통령의 탄핵 시국에서, 그리고 이후 계속되는 일련의 재판과정에서 여실히 목도하고 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그의 저서 <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홀로코스트와 관련하여 우리가 배운 가장 놀라운 점은 바로 '이런 일'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한나 아렌트 역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경고한 바 있다. 5·18의 역사적 성격을 헌법으로 선언하고 어떠한 왜곡이나 폄훼도 용납하지 않음을 법률로써 규정하는 것은 인류를 향한 우리의 의지 표명일 뿐 아니라 다시는 이와 같은 비극을 재현하지 않겠다는 우리 스스로의 다짐이 될 것이다.

 영화 <나는 부정한다>

역사적 진실을 부정하려는 세력이 다시 준동하려는 지금. 영화 <나는 부정한다>를 다시 볼 이유는 충분하다. ⓒ ㈜티캐스트



광주민주화운동 나는 부정한다 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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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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