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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학교 집짓기 수업
▲ 간디학교 집짓기 수업 간디학교 집짓기 수업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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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산청군 신안면 외송리에 대안학교가 개교했다. 건물도 몇 채 없고, 운동장도 없고, 화장실도 제대로 없어서 당번을 정해 아침마다 오줌통을 비워야 하는 학교였다.

전교생은 스물여덟 명. 열세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다양한 나이의 학생들이 섞여 있고, 열 명의 교사 중 누구도 학생에게 매를 들거나 욕설을 하지 않는, 평화롭고 자유로운 작은 학교였다. 우리는 선생님들을 '쌤'이라고 불렀다. 미숙쌤, 손쌤, 양쌤, 보경쌤... 중학교 2학년 우리 반은 딱 여섯 명이었다.

당연히 매점은 없었고 새우깡 같은 과자를 먹으려면 삼십 분 동안 산길을 내려가 국도변의 휴게소까지 나가야 했다. 돌아오는 길은 오르막이라 더욱 힘들었다. 돌도 씹어 먹는다는 나이인 우리는, 그래서 종종 학교 식당을 '털었다'.

밤 열한 시, 지리산 골짜기의 밤은 칠흑이었다. 캄캄한 산 그림자 너머로 별들만이 총총히 빛났다. 돌집 이층 기숙사에 살던 재은이와 나는 그날도 주린 배를 움켜쥐다가 식당털이에 나섰다. 살며시 문을 열고 살금살금 계단을 밟았다. 식당으로 가는 길옆에 사감 쌤의 방이 있어서 우리는 숨소리조차 조심해야 했다. 사감 쌤은 잠들었는지 불이 꺼져 있었고 우리는 무사히 식당에 도착했다.

어렵게 감자를 구해 삶았는데...

돌집 뒤편에 컨테이너를 붙여서 지은 식당은 지저분해서 때로는 쥐가 기어 다녔지만 한밤중 우리의 오아시스요 엘도라도가 되어 주었다. 우리는 조심스런 탐험가가 되어 어둠 속에서 '우리밀 2.5 라면'이나 고구마, 굳은 모닝빵 몇 조각을 찾아내고 소리 없는 환호성을 지르곤 했다. 그날 발견한 보물은 감자였다. 우리는 냄비를 찾아내 살며시 물을 채우고 감자를 삶았다. 오 분, 십 분의 기다림, 통통한 감자 여섯 알이 익어가는 중이니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도 즐겁기만 했다.

드디어 감자가 다 익고 우리는 플라스틱 국그릇에 뜨거운 감자를 세 개씩 나눠 담고 설탕을 살살 뿌린 뒤 기숙사 복귀 작전을 시작했다. '감자 여섯 알 없어진 걸 누가 알리', 완전범행을 성공시킨 기쁜 마음이 감자 그릇 위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드디어 감자가 다 익고 우리는 플라스틱 국그릇에 뜨거운 감자를 세 개씩 나눠 담고 설탕을 살살 뿌린 뒤 기숙사 복귀 작전을 시작했다. '감자 여섯 알 없어진 걸 누가 알리', 완전범행을 성공시킨 기쁜 마음이 감자 그릇 위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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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감자가 다 익고 우리는 플라스틱 국그릇에 뜨거운 감자를 세 개씩 나눠 담고 설탕을 살살 뿌린 뒤 기숙사 복귀 작전을 시작했다. '감자 여섯 알 없어진 걸 누가 알리', 완전범행을 성공시킨 기쁜 마음이 감자 그릇 위로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그런데 기숙사 계단을 오르는 순간, 갑자기 사감 쌤 방에 불이 켜졌다. 혼비백산. 이게 웬일인가. 우리는 너무나 놀라 손에 든 감자를 계단 아래에 숨겨 놓고 일단 서둘러 방으로 올라갔다.

"재은이, 늘샘이 느그 안 자고 뭐 하노?"
"아, 태쌤, 저희 잠이 좀 안 와서요. 이제 잘 거예요."

다행히 사감 쌤은 감자의 냄새를 맡지 못하고 돌아갔다. 십 분쯤 지났을까. 방으로 돌아간 쌤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우리는 계단 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감자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계단 밑에 하얗게 움직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흰둥이였다. 몇 주 전에 태어난 강아지 흰둥이였다. 재은이는 원래 개를 좋아했는데 특히 흰둥이를 엄청 예뻐하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작고 귀여운 흰둥이가 우리가 고대하던 감자를 다 먹어치우고 있었다.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와구와구, 감자는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게나 강아지를 사랑하는 재은이도 얼마나 황당했던지 흰둥이를 옆으로 세차게 밀어 버렸고, 나도 울상이 되어 흰둥이의 작은 머리에 꿀밤을 먹였다. 우리의 보물이 저철없는 놈 흰둥이의 뱃속으로 사라져버렸다. 그 얼마나 안타까웠던가. 하지만 말 못하는 흰둥이는 흰둥이대로 또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뜨거운 감자를 호호 불지도 못했을 텐데.

이웃들과 생명들에 음식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 되고 싶다
그 작고 귀여운 흰둥이가 우리가 고대하던 감자를 다 먹어치우고 있었다.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와구와구, 감자는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있었다.
 그 작고 귀여운 흰둥이가 우리가 고대하던 감자를 다 먹어치우고 있었다. 신나게 꼬리를 흔들며 와구와구, 감자는 게 눈 감추듯 사라지고 있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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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그날 다시 감자를 새로운 삶으러 갔는지, 더욱 굶주린 배를 안은 채 잠들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식당털이는 무단외출, 흡연 등과 함께 '식구회의'의 단골 토론거리였다. 때로는 사라진 음식의 양이 많아서 문제가 되기도 했고, 많은 학생들이 배고픔을 이겨내기 힘드니 저녁 간식을 주는 게 어떠냐는 의견이 나오기도 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식당털이는 학교가 커지고 교육부의 인가를 받은 학교가 되며 점점 사라져 갔다. 커다란 식당 건물이 새로 지어졌고 문에는 튼튼한 자물쇠가 달렸다. 중학생인 우리는 급변하는 세월을 한탄했다. 몇 년 뒤에는 매점이 생겼고, 배가 고픈 학생들은 각자 돈을 주고 손쉽게 과자를 사먹을 수 있게 됐지만, 용돈이 없는 학생들도 많았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식당털이가 용인되던 옛 시절을 전설처럼 그리워 했다.

졸업 후 십 년이 흐른 뒤 방문한 모교에는 아스팔트가 깔려 있고, 곳곳에 '새콤'이 설치되어 있었다. 마음 한 구석이 쓰렸다. 이 산골마을 작은학교에서, 도둑 맞을 뭐 그리 소중한 게 있는 걸까.  

식당털이는 도둑질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또 우리의 양식이 되어준 아랫마을의 단감, 밤, 돌배 같은 열매의 '서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가족이라면 밤에 배가 고파 냉장고를 열고 음식을 먹는 소녀를 도둑으로 몰지는 않는다. 작은 마을의 이웃들 사이라면 과일 몇 개를 훔쳐 먹는 소년에게 변상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자라나는 아이들의 배고픔과 부도덕을 그러려니, 용인해주는 마음이 우리네 공동체에는 있지 않았던가. 서리는 도둑질이지만 관용과 환대의 문화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에는 그런 공동체의 마음이 있었다. 삭막한 입시교육이 펼쳐지는 일반학교를 떠나 정과 사랑을 주고받는 작은 학교에서 보낸 학창시절은 나에게 사람과 사회에 대한 오롯한 믿음을 가지게 해주었다. 요즘 남한에서는 '서리'라는 단어가 거의 사라진 것 같다.

하지만 성인이 된 내가 중국, 라오스, 인도 등지의 시골길을 여행할 때, 식당도 가게도 없는 외딴 길을 걸을 때, 그곳에는 언제나 기적처럼, 기꺼이 음식을 나누어주고 잠자리를 내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삭막하고 분주한 도시를 벗어난다면, 자연과 가까이, 자연에 순응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면, 사람들은 여전히, 배고픈 사람을 돌보고, 서로를 보듬으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식당을 털고, 서리를 해 먹고, 여행길에서 얻어먹은 것들만큼, 그보다 더 많이, 배고픈 아이들과 나그네, 이웃들과 생명들에게 음식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태그:#간디학교, #대안학교, #대안교육, #서리,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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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 바다 미륵섬에서 유년기를, 지리산 골짜기 대안학교에서 청소년기를, 서울의 지옥고에서 청년기를 살았다. 2011년부터 2019년까지, 827일 동안 지구 한 바퀴를 여행했다.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 생활놀이장터 늘장, 여행학교 로드스꼴라, 서울시 청년활동지원센터, 섬마을영화제에서 일했다. 영화 <늘샘천축국뎐>, <지구별 방랑자>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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