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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왕의 남자> 중 한 장면, 여자 같은 남자 공길(이준기 분)과 장생(감우성 분)이 개망초 꽃밭을 거닐고 있다. 개망초는 이들의 비극적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영화 <왕의 남자> 중 한 장면, 여자 같은 남자 공길(이준기 분)과 장생(감우성 분)이 개망초 꽃밭을 거닐고 있다. 개망초는 이들의 비극적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 <왕의남자>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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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국 단편 문학 역사상 최고의 걸작인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가 봉평에서 대화까지의 칠십리 밤길을 걸어가는 장면이다. 소설의 배경을 설명해줄 가장 백미이면서 클라이맥스인 장면이다. 달빛 아래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메밀꽃의 아름다움을 시적 언어로 풀어놓고 있는 이 대목은 빈번하게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명구절이기도 하다.

달밤은 아니었다. '반월(半月) 마을' 유적지 휴경지에서 누군가 가꾸어 놓은 듯한 흰 꽃밭을 만났다. 떼를 지어 피어나기 시작한 희디흰 순백의 꽃이 뙤약볕 아래 가득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한여름에 서리가 내린 것 같다.

반월 마을 휴경지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개망초 꽃밭. 결국‘제초’라는 칼을 맞았다
 반월 마을 휴경지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개망초 꽃밭. 결국‘제초’라는 칼을 맞았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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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밭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메밀꽃과 흡사하다. 이효석이 이 풍경을 보았다면 어떻게 묘사해 냈을까. 자못 궁금해진다. '개망초 필 무렵', 어째 제목부터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 이 꽃은 그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민망한 이름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꽃, '개망초'다.

녹음이 짙푸르러 가는 여름, 대부분의 여름 꽃들은 숲 속이나 그늘에서 피어난다. 좁쌀만 한 작은 꽃을 피워 내는 산수국은 꽃을 보호하기 위해 가장자리에 진짜 꽃의 몇 배 크기에 달하는 하얀 가짜 꽃을 만들어 놓고 곤충을 유혹한다.

달개비와 달맞이꽃은 어떠한가. 그 미미한 향기와 초라한 모양새가 부끄러운 탓인지 한낮을 피해 새벽이나 아침을 택하거나, 달이 떠오르는 밤에 맞춰 꽃을 피워낸다. 헛꽃을 달기도 하고 혹은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시간대를 골라서 꽃을 피워내는 여름꽃들의 생존 방식이 눈물겹다.

'개망초', 가식적이고 위선적인 헛꽃을 달지 않는다. 다른 농작물들의 양분을 도둑질하지도 않는다. 한 줌의 흙과 한 방울의 물만 있으면 '의기양양'한다. 한여름의 태양을 피하지 않는다. 뙤약볕 아래 고개를 당당히 쳐들고 맞서는 개망초는 여름이 다 가도록 우리의 산과 들을 하얗게 지키고 있다. 

찾아오는 이 없는 무덤, 외롭지 말라고  하얗게 하얗게 피어있는 개망초
 찾아오는 이 없는 무덤, 외롭지 말라고 하얗게 하얗게 피어있는 개망초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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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에 찌는 더위는 나의 시련일지라도 굴하지 않고 저 거친 광야를 지키리라. 그늘지고 음습한 곳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여, 때로는 '제초'란 이름의 날카로운 칼날을 맞기도 한다. 바람에 눕기도 한다. 머리채를 잡힌 채 뿌리째 뽑혀 내동댕이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당당하게 다시 일어선다. 그리하여 '민중의 꽃' 개·망·초다. 잡초가 아니다.

핑크 플리베인이 '개망초'가 된 사연

개살구, 개꿈, 개떡 등 흔하고 쓸모없는 것을 말할 때 '개'라는 접두사를 붙인다. 모든 사물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 때로는 이름이 삶을 대변하기도 한다. 개망초는 그 이름 때문에 설움을 받고 있으며, 우리의 슬픈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여름 한철 우리의 산과 들을 하얀 꽃으로 수놓고 있으니 당연히 우리 토종 꽃이려니 하겠으나, 사실은 북아메리카에서 온 귀화식물이다. 고향인 필라델피아에서는 '핑크 플리베인(pink fleabane)'이란 세련된 이름을 갖고 있었다.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는 이 세련된 이름답게 관상용으로 가치가 높았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자태는 신품종 개발과 인간의 변덕스러운 성격 탓에 어느 날부터 사람들의 눈길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꽃집에서 쫓겨난 개망초는 산야로 터전을 옮기게 됐다.

무양서원 담장 아래 개망초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무양서원 담장 아래 개망초가 소담스럽게 피어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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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의 역사는 12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99년 구한말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건설되고 뒤이어 경부선과 경의선이 개통됐다. 이 철도들은 모두 대륙 침략을 위한 전초 기지로 사용하려던 일본의 야욕을 위해 건설되었다. 이때 쓰인 철도 침목 대부분이 미국에서 수입되었다. 이 침목 사이에 핑크 플리베인의 씨앗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철로를 따라 하얀 꽃이 피기 시작하자, 우리 조상들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이 조선을 망하게 하려고 씨를 뿌렸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래서 망국초(亡國草)라고 불렀다가 다시 망초라고 불렸다.

그 후 처음 피었던 망초 꽃과는 다른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망초 보다 더 크고 예쁜 꽃이었다. 망국의 한이 담긴 철로에 핀 예쁜 꽃을 보며 조상들은 더욱 서러웠을 것이다. 나라 잃은 설움에 백성들은 이 식물에 '개'란 접두사를 붙여 망초보다 못한 꽃이란 뜻으로 '개망초'라고 불렀다.

나라 망한 것이 어찌 망초와 개망초의 탓이었을까.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무능하고 부패했던 위정자들이야말로 망국초들이 아니었겠는가. 하필이면 나라가 기울어 가고 있는 시기에 들어와서 푸대접을 받는 억울하고도 서글픈 사연을 가진 들꽃이다. 개망초는 가난했지만 순수했던 우리 민족의 애환을 품고 있는 꽃이다.

흔한 것이 귀한 것이다

꽃의 모양이 계란 프라이 같다고 해서 ‘계란꽃’ 이라고도 부른다
 꽃의 모양이 계란 프라이 같다고 해서 ‘계란꽃’ 이라고도 부른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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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망초는 국화과 두해살이 들꽃이다. 마치 달걀 노른자 같은 중앙의 노란 관상화를 혀 모양의 수많은 하얀 설상화가 감싸고 있다. 바깥쪽의 하얀 설상화는 암술만 가지고 있는 암꽃이고, 안쪽의 노란 관상화는 암술과 수술이 있는 짝 꽃이다. 이러한 꽃 모양이 달걀을 튀겨놓은 것 같다고 해서 '계란꽃'이라는 애칭도 가지고 있다. 충청도에서는 이 꽃이 많이 피면 풍년이 든다 해서 '풍년초'라는 좋은 이름으로 부른다.

한 여름철에 논두렁 밭두렁을 뒤덮고 도시의 공터, 야산 무덤가, 사람이 떠난 빈집 터, 농사를 짓지 않는 묵정밭에 온통 지천으로 피어 있다. 어디에서나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꽃이다.

요즘처럼 가뭄이 심할 때는 뿌리를 깊게 내려 척박한 땅의 숨통을 열고 중금속을 흡수해 표토층을 되살린다. 기꺼이 자신의 한 몸을 희생해 다른 작물의 거름이 돼주기도 한다. 이른 봄, 어린잎들은 나물로 무쳐 먹는다. 식감이 부드럽고 잡냄새가 없어 봄나물로 손색이 없다. 최근 뉴스에 의하면 개망초에는 폴리페놀과 비타민C 성분이 블루베리의 두 배에 달하고 항산화 효과가 뛰어나 기능성 화장품의 원료로 쓰인다고 한다.

개망초, 흔하다고 해서 과연 쓸데없는 잡초일까. 무엇이든 흔한 것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여기는 세상이다. 뒤집어 보면 흔한 것들일수록 필요가 많다는 의미일 수 있다. 안도현 시인은 "눈치코치 없이 아무 데서나 피는 게 아니라 개망초꽃은 사람의 눈길이 닿아야 핀다"라고 했다.

작금의 우리 사회는 이념·세대·계층 간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건 '화해'가 아닐까. 개망초의 꽃말이 바로 '화해(和解)'란다. 개망초는 그 '흔함'으로 고귀한 가치, '화해'를 역설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태그:#개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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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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