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하고 싶은 말이 봇물 터지듯 나오는 영화가 있다. 감상이 끊임없이 쏟아져나오고, 함께 본 사람과 그걸 나누고 싶어 안달이 나는 영화가 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영화도 있다. 영화가 별로여서일 때도 있지만, 말문이 막히는 경우는 대개 평생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영화여서일 때가 많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후자에 가까운 영화다.

승률 100%를 자랑하는 최고의 로비스트 '슬로운'(제시카 차스테인). 그녀는 클라이언트의 이익을 위해, 정치적 성공을 위해 의원들을 뒤에서 움직이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다. 성공 가도를 달리던 그녀는 총기 규제 관련 법안 캠페인을 맡게 되고, 총기를 둘러싼 거대한 이익단체와 재벌들, 의회 의원들을 상대로 싸움을 시작한다.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녀는 뛰어난 전략으로 한 번도 굴복한 적 없는 거대 권력에 맞서지만, 동시에 자신과 주변 사람 모두를 위험에 빠트리게 된다.

이미 그녀에게 당해 있을 당신


영화이기 때문에, 이 영화가 결국 어떤 결말로 치닫게 될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영화가 과연 이 부분을 어떻게 풀어내는가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주인공의 감정선, 상황, 현실과 같은 부분을 충분히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래서 영화 속의 논리에 관객들이 설득당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영화가 생명력을 갖고 사람들 사이에서 오래도록 회자할 수 있게 해 주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대부분 영화가 주인공의 유년시절, 혹은 개인사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강인해만 보였던 주인공이 아주 개인적인 속사정을 공개함으로써, 그리고 약간의 감정적인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인간적 모습을 받아들이고 공감하게 된다. 그런 공감으로부터 영화에 대한 몰입이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공감은 몰입을 유도하고, 몰입은 관객이 영화의 약한 부분들을 잊고 감정적 무드에 취하게 한다.

그러나 영화 <미스 슬로운>은 감정선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나 겉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을 택한다. 여주인공 리즈 슬로운은 워싱턴에서 가장 성공한 로비스트 중 하나로, 얼음으로 만들어진 여자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무자비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녀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유연하게 넘나들며, 도덕과 윤리 역시도 전략적 관점에서 활용하는 여자다. 관객은 영화가 보여주는 그녀의 화려한 기술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방법들에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만큼 그녀의 방식은 타인의 허를 찌르기 때문이다. 정신을 차리고 나면 우리는 모두 이미 그녀에게 당해 있다.

로비는 통찰력에 의한 것이다, 그녀가 극 중에서 자주 하는 말이다. 성공적 로비를 위해서 우리는 상대의 수를 읽어야 하며, 상대의 허를 찌르는 수를 적재적소에 낼 줄 알아야 한다. 상대를 놀라게 할지언정, 놀라는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영화 내내 제시카 차스테인이 연기하는 리즈 슬로운은 그 역할을 충실하게 해낸다.

수단이 중요한가, 결과가 중요한가


슬로운은 욕망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다. 모든 돈과 권력이 집중되는 워싱턴에서 그것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익숙한 사람이다. 영화 내내 그녀는 인간적 면모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그려진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 욕구인 식욕, 색욕, 수면욕조차 그녀에게는 중요하지 않다. 음식을 고르고 즐기는 것이 중요하지 않아 매일 저녁 같은 중국요릿집에서 밥을 때우며, 만성적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깨어있기 위해 각성제를 복용한다. 돈으로 파트너를 사 갈급한 욕구를 해소하는 그녀의 일상에는 오로지 일만 존재할 뿐이다. 인간적 접촉과 공감은 그녀의 인생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러므로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승승장구한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사람을 도구처럼 이용해 미래를 내다보는 한 수를 생각해내며, 그녀는 로비스트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나간다.

영화 홍보를 위해 일부 매체에서는 슬로운이 본인의 신념을 위해 행동하는 소신 있는 사람처럼 그려내는 경향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내가 본 그녀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것마저 전략 일부로 사용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녀는 전략적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선악의 구도를 완전히 깨부순다. 결과를 얻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으며, 결국 그 결과를 얻어내고야 만다.

영화 속에서 그녀가 얻어내는 결과는 총기 규제 법안의 통과다. 결과가 공동의 선을 향해 있으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괜찮은 것일까? 과연 그녀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결과가 중요한가 아니면 수단이 중요한가? 동기가 중요한가 행동이 중요한가? 더 큰 권력과 더 큰 부정을 잡아내기 위해서 작은 악과 작은 잘못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선악의 구도를 벗어난 완전히 새로운 구도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들은 무자비하게 불법을 서슴지 않는 그녀를 응원하게 될 것이다. 그녀는 마치, 새로운 형태의 안티 히어로(Anti-hero)라는 느낌마저 선사한다.

엔딩 크레디트가 오르며 극장을 나올 때 관객은 각자 마음속에 한 가지씩 답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장면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지막 장면에서 슬로운이 던지는 말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각자 다르게 해석하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함께 보았을지라도, 각자가 생각하는 윤리의 범주와 몰입의 정도에 따라서 영화가 제시하고 있는 메시지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미스 슬로운>은 플롯뿐 아니라 배우들의 연기도 돋보이는 작품이다. 특히 여주인공 제시카 차스테인의 연기를 비롯해 주·조연들의 연기가 매우 훌륭하다. <미스 슬로운>을 극장에서 미처 보지 못했던 관객이라면, VOD를 통해서라도 이 영화를 꼭 만나보기를 권한다. 색다른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매우 추천하고 싶은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