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재석은 꽤 오랜 시간 '무결점 방송인'으로 꼽혀왔다. 위트 있는 말솜씨에 배려 넘치는 진행 스타일, 술·담배를 하지 않으며, 집-방송국-헬스장만 오가는 '바른생활', 게다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등장하는 그의 숨은 선행들까지. 언제나 자신을 낮추는 그의 진행 방식을 두고 대중은 '섬김의 리더십'이다, '겸손의 리더십'이라고 칭송했다.

오죽해야 네티즌들이 "유재석은 휴지를 두 장 쓰는 낭비쟁이다", "자기는 시원한 배맛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태프에게는 목 매이는 팥맛 아이스크림을 사줬다" 등 <무한도전>에 나온 그의 행동을 지적하며 이게 그의 '진짜 성격'이라고 놀려댔을까. '휴지 두 장 사건', '탱X보이 사건'으로 명명된 이 사건(?)들은, '이런 거 말고는 욕할 게 없다'는 의미가 담긴, 유재석을 향한 네티즌들의 애정 어린 장난이었다. 이렇듯 네티즌들의 절대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던 '유느님(유재석+하느님)' 유재석. 하지만 최근 그의 지위가 흔들리고 있다.

막장 드라마에 놓인 한없이 착한 주인공

 SBS 동상이몽 김구라 유재석

지난여름 종영한 SBS <동상이몽>. 치열하게 대립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MC 유재석의 역할은 '쩔쩔매기'였다. ⓒ SBS


그 시작은 지난여름 종영한 <동상이몽, 괜찮아 괜찮아>(아래 <동상이몽>)였다. <동상이몽>은 갈등 상황에 놓인 부모와 자녀가, 각자의 입장에서 문제점을 이야기해보고 서로를 이해해보자는 내용의 프로그램이다. 자매들에게 왕따 당하는 콩쥐 소녀, 백수 아빠와 소녀 가장, 성형 중독에 빠진 딸, 술에 빠진 아빠…. 치열하게 대립하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MC 유재석의 역할은 '쩔쩔매기'였다.

이 팽팽한 대립의 한 가운데서 '착한 사람', '좋은 사람'인 유재석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결국은 각자 나름의 이유와 사정이 있을 텐데, 한쪽의 이야기만 듣고 섣불리 누군가의 편을 드는 건, 사려 깊은 MC 유재석의 방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막장 드라마의 한복판에 떨궈진 착한 TV 소설의 주인공은 별로 할 일이 없다.

게다가 지금까지의 진행 스타일을 보면, 유재석은 불편하고 어색한 상황을 못 견뎌 한다. 상황이 불편해지거나 어색해지면 쉴 새 없이 수다를 떨고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으며 손뼉을 친다. 유재석을 좋아하는 시청자들이라면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웃겨서 웃는 유재석의 웃음과, 어색한 상황을 모면하려 웃는 웃음. <동상이몽>에서 유재석은 후자의 웃음을 자주 터트리는 듯 보였다.

자극적으로 편집된 가족의 모습을 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짓는 김구라, 잔소리를 쏟아내는 서장훈, 화를 내는 김흥국의 반응은 지극히 평범한 것이다. 이들과 함께 답답함과 짜증, 분노를 느끼고 있던 시청자들 눈에 비친 박수치며 웃는 유재석의 모습은 분명 이질적이었다. 명확하게 나뉜 갈등 구조에서, 황희 정승마냥 그저 '네가 옳다. 허허 너도 옳다' 식의 중재는 '공감능력 부재'로 비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유재석이라는 정상급 MC의 공감 능력까지 의심하게 하였다. <동상이몽>은 유재석이 가진 장점을 발휘할 수 없고, 단점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2000년식 '커플링' 놀이... 2017년 시청자는 불편하다

 KBS <해피투게더> 출연진들 사진(유재석, 박명수, 전현무, 조세호, 엄현경)

KBS <해피투게더> 출연진들 사진(유재석, 박명수, 전현무, 조세호, 엄현경) ⓒ KBS


<동상이몽>이 폐지되고, 잠시 꿈틀대던 비호감이 사그라질 때쯤, 다시 한번 그의 비호감 게이지를 높인 프로그램이 있었다. 바로 <해피투게더3>(아래 <해투>)다. 많은 시청자는 <해투> 안에서 벌어진, 엄현경을 향한 기안84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에 불쾌함을 표현했다. 이미 거절 의사를 표현한 상대를 향한 지속적인 공개 구애는 폭력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유재석은 진행자로서 기안84의 이런 행동을 부추겼고, 지금까지 유재석에게 가장 열렬한 지지를 보냈던 20·30세대 여성들의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X맨> <동거동락>, 초창기 <런닝맨> 등에서 보여준 강제 로맨스, 즉 '커플링' 역시 도마 위에 올랐다. 과거의 일이지만, 오늘의 시청자들은 그때부터 지금까지 변하지 않은 그의 진행 스타일을 두고 "여성 출연자들을 남자 출연자들의 짝꿍으로 만들지 못해 안달 난 것 같다"고 지적하기 시작한 것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을 계기로, 20·30세대 여성들은 빠르게 여성주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오랜 시간 당연하게 여겨져 온,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 혐오나 성차별 구도를 무너뜨리기 위해 노력한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여성 대상화'다.

여성 대상화는 여성을 하나의 주체로 보지 않고, 남성의 상대이거나 종속적인 것으로 보는 걸 뜻한다. 성차별의 가장 베이스에 깔린 인식이다. <해투>에서 엄현경을 기안84의 구애 대상으로 보거나, <런닝맨>에서 송지효와 개리를 끊임없이 '월요커플'로 엮는 것, <무한도전>에서 광희가 호감을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뜬금없이 소환된 유이 등은 모두 여성 연예인들 대상화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전에는 러브라인에 호들갑 떨며 좋아하는 유재석의 모습이 그저 프로그램의 재미를 북돋는 장치로 받아들여졌다면, 지금의 시청자들은 그 러브라인에 이용되고 소모되는 여자 출연자의 입장을 생각해 함께 불편함을 느낀다. 그 여자 출연자가 실제로 불쾌함을 느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상황이 TV를 통해 '자연스러운', '장난스러운', '재미있는' 상황으로 포장돼 방송된다는 것이 문제다. 현실 세계에서 이런 일은 성희롱이다.

조언과 오지랖은 한끝 차이

 KBS <해피투게더>의 유재석

최근 인터뷰에서 엄현경은 "유재석이 회식때마다 착한 남자 만나라고 조언한다"고 말했다. 유재석은 그저 선배이자 오빠로서, 막냇동생뻘인 엄현경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전형적인 '맨스플레인'이다. ⓒ KBS


흔들린 '유느님'의 지위는, 엄현경의 최근 인터뷰 내용을 두고 일었던 논란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엄현경은 드라마 <피고인> 종영 인터뷰를 통해 "유재석이 회식 때마다 '마음을 봐라'. '착한 사람 만나라' '마음 따뜻한 남자 만나라' 잔소리한다"고 말했다. 물론 엄현경의 의도는 그만큼 '유재석과 친밀하다', '유재석이 이렇게 좋은 오빠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의도와 상관없이 많은 여성 시청자들은 불쾌함을 표현했다.

엄현경은 <해투>에 게스트로 출연했을 당시, "잘생긴 남자가 좋다"는 말로 화제의 중심에 섰다. "예쁜 여자가 좋다"고 말하는 남자들은 넘쳐났지만, "잘생긴 남자가 좋다"고 말하는 여자는 흔치 않았던 현실에서, 자기 욕망과 이상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엄현경의 발언은 많은 여성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안겨줬다. 게스트로 출연한 뒤 바로 <해투> 패널 자리를 꿰찰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은 결과였다.

엄현경은 이미 자기 욕망을 표현했다. 그런 그에게 "착한 남자 만나라, 따뜻한 남자 만나라"는 조언은 의미도 없을뿐더러, 과도한 간섭으로 비칠 수 있다. 과연 유재석은, 그가 진행하던 많고 많은 TV 프로그램에서 "예쁜 여자가 좋다"고 말하던 남자 후배들에게도, 회식 때마다 똑같이 "착한 여자 만나야 한다"고 조언했을까? 노홍철과 띠동갑뻘 여대생들에게 "홍철이 어떻냐"고 묻던(<무한도전> 홍철아 장가가자 특집) 그는, 여대생들의 고운 심성을 단박에 눈치챘던 걸까?

유재석은 그저 선배이자 오빠로서, 막냇동생뻘인 엄현경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여성들은 엄현경과 유재석의 경우를 본인과 직장 상사, 선배 등으로 대입하면서 충분히 기분 나쁠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맨스플레인(Man+Explain, 남자가 여자에게 가르치듯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맨스플레인 역시 전형적인 성차별 행동 중 하나다. 의미도 없고, 먹히지도 않을 조언은 오지랖에 불과하다. 오지랖은 상대의 기분만 상하게 할 뿐, 넣어두는 것이 좋다.

유재석은 그대로, 세상은 앞으로 

 MBC 연예대상의 한 장면. 유재석의 수상 소감은, 평소 자기 생각 발언을 자제하던 이미지와 사뭇 달랐다.

유재석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훌륭한 MC다. 최근 그의 모습이 못마땅한 이들이라도, 그가 '유느님'의 지위를 잃는 것을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 MBC


'유느님'이라는 별명은 그저 그가 능력 있는 진행자이기 때문에 붙은 것이 아니다. 철저한 자기 관리, 흠결 없는 사생활, 몸에 밴 배려 등, '훌륭한 진행자'+'좋은 사람'이기에 얻어진 것이다. 그는 "대학개그제에서 장려상을 받았을 때, 상이 만족스럽지 않아 귀를 파며 거만하게 상을 받으러 나갔다"는 일화를 고백하며, 여러 번 "그땐 어렸다"고 자기반성을 하기도 했다. 지금 유재석의 모습은 긴 무명 생활 동안의 자기반성과 깊은 깨달음 끝에 얻은 결과물인 셈이다. 하지만 그 결과물을 고집스레 유지하다가는, 본인도 모르게 '비호감 급행열차'를 탈 수도 있다. '착하고' '좋은' 것을 판단하는 기준은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유재석을 '한남'으로 몰아붙이자는 게 아니다. 유재석은 불과 2년 전 기준으로 본다면 좋은 남자, 좋은 남편, 좋은 방송인의 표본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사회가 빠르게 진보하고 있는 만큼, 사회적 인식도 급변하고 있다. 제자리에 선 유재석과 앞으로 나아가는 세상. 이런 시기에 '한결같음'은 안타깝게도 '퇴보'가 되고 만다.

유재석은 여전히 대체 불가능한 훌륭한 MC다. 그리고 그는 기부, 선행, 자기 관리 등 늘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최근 그의 모습이 못마땅한 이들이라도, 이를 부인하지는 못할 것이다. '유느님'의 추락을 바라는 이가 어디 있을까. 한결같은 유재석에게도 변화가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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