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의 한장면

<문영>의 한장면 ⓒ KT&G 상상마당


언어 장애를 지닌 열여덟 살 여고생 문영(김태리 분)은 늘 혼자다. 그가 네 살 때 엄마는 집을 나갔고, 그나마 함께 사는 아빠는 알코올 중독자다. 들을 수 있지만 말 못하는 문영은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이런 그의 유일한 취미는 캠코더로 무언가를 찍는 일이다. 학교에서, 등하굣길 지하철에서, 동네 골목에서. 뭘 찍어야겠다는 목표도 없이 눈에 걸리는 족족 렌즈에 담는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영의 뷰파인더 안으로 한 여자가 들어온다. 한 남자 앞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그는 스물여덟 희수(정현 분)다.

영화 <문영>은 <아가씨>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배우 김태리의 장편 데뷔작이다. 마음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근 소녀의 삶이 한 여자로 인해 변화를 맞는 전개가 묘하게 <아가씨>와 닮았다. 귀족집 딸 히데코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접한 숙희가 이 영화에서는 성인 여성 희수를 통해 성장하는 문영으로 대치된다. 배우 김태리의 필모그래피를 하나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문영>을 <아가씨>의 프리퀄(prequel)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문영>의 한장면

<문영>의 한장면 ⓒ KT&G 상상마당


듣지만 말할 수는 없고, 보지만 보여주지는 않는다. 영화 초반부 외부 세계를 대하는 문영의 이러한 태도는 그가 가진 고독의 심연을 짐작케 하는 데 주효하다. 자신과 전 남자친구가 싸우는 장면을 찍은 문영에게 "남의 치부를 마음대로 찍어 놓고 자기 치부는 보이지 않으려 한다"고 꼬집는 희수의 대사는 문영의 캐릭터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

영화는 이런 문영이 조금씩 희수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을 찬찬히 그리며 은근한 온기를 만들어낸다. 촬영한 영상을 보여달라는 희수의 요구에 문영이 그의 집에 가게 되고, 나아가 자신의 집에 희수를 들이는 에피소드는 특히 뇌리에 깊이 남는다. 각자의 이유로 혼자 지내온 두 사람이 급히 집 안을 청소하고 빈 술병을 치우며 상대방을 맞는 장면들에서는 가족애를 향한 이들의 갈증과 설렘이 동시에 느껴진다.

 <문영>의 한장면

<문영>의 한장면 ⓒ KT&G 상상마당


 
은연중에 드러나는 희수의 동성애(또은 양성애)적 성향은 영화의 서사를 한층 폭넓게 확장시킨다. 희수가 '한 순간의 실수로' 10여년을 사귄 남자친구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다는 설정, 그리고 희수의 집을 찾아간 문영이 한 여자와 맞딱뜨리는 에피소드 등은 우회적이고도 효과적인 방식으로 긴장감을 자아낸다. 여기에 놀이터와 공원 등을 오가며 서로에게 진심을 터놓는 문영과 희수는 이상적인 자매이자 친구, 연인의 모습으로 다양하게 비친다. 희수의 방 안에 나란히 마주 누운 이들의 투 숏에서는 <아가씨> 속 숙희-히데코와 닮은 듯 다른 퀴어 영화 특유의 미학이 엿보인다.

문영이 희수를 통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한층 성장하는 영화 후반부 전개는 전형적이지만 의미심장하다. 특히 엄마를 그리워하면서도 엄마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문영의 내적 갈등이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영화 말미 지하철역 시퀀스는 폐부를 깊숙히 찌른다. 고작 1시간이 조금 넘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문영>이 만들어낸 온기는 은근한 미열(微熱)로 꽤 오래 남는다. 오는 12일 개봉.

 영화 <문영> 포스터

영화 <문영> 포스터 ⓒ KT&G 상상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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