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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한복판에 동지(12월 21일)가 있는데 동짓날 밤은 1년 중에 가장 길다. 1973년에 나온 한세일의 독집 앨범 수록곡 '모정의 세월'은 동지 밤이 짧다고 노래한다. 집 떠난 자식 걱정에 근심으로 지새우느라 동지 밤도 짧다는 것인데, 어머니 마음이 아니더라도 요즘 농민들의 동지 밤도 예전처럼 길지가 않다. 옛 농사와 현재의 농사가 달라서 그렇다.

밤과 낮의 구분이 흐려지는 삶

1970년대만 해도 아이들은 호롱불 곁에서 손바닥을 모아 벽면에 토끼나 쥐, 강아지 모양을 만들며 놀았다. 동네 아낙들은 호롱불 심지를 돋우어 가며 길쌈과 바느질을 했다. 사랑방에 모인 남정네들은 새끼를 꼬거나 멍석을 짰다.

논갈이 중인 농부
▲ 논갈이 논갈이 중인 농부
ⓒ 전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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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도 바빴지만 입도 쉬지 않고 움직였다. 농사 얘기에서부터 동네 대소사가 입길에 오르내렸다. 도시건 농촌이건 모여 앉았다 하면 뉴스에 나오는 하야다 탄핵이다 하며 최순실·박근혜 얘기를 하는 요즘과는 다른 모습이다. 생활이 달라도 온 국민을 같은 생각과 같은 말을 하게 하는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직접 눈에 뜨이고 손에 잡히는 것 외에는 화제가 되지 못했다.

호롱불 심지가 타서 불이 어두워지면 심지를 돋우는데, 정신을 애먼 데 두면 심지를 너무 올려 그을음이 생기므로 주의해야 했다. 책을 읽던 학동은 깜빡 졸다가 호롱불에 머리칼을 태워 먹기 십상이었다. 그만큼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듯 과거엔 농경 생활을 축으로 일상이 배치되고 관심과 이야깃거리도 농사와 연결되는 것이었다. 밤의 길이는 해 지는 시각과 해 뜨는 시각을 기준으로 정해졌다. 요즘은 해가 지고 뜨는 것을 개의치 않고 하루를 보내기 때문에 동짓날이지만 밤이 길다는 것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산다. 현대 농업은 농촌의 동짓날 밤도 계속 단축시켜 왔다고 할 수 있다.

스무댓 가구쯤 되는 우리 산골 마을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매일 품팔이 농사일을 하러 온다. 어떤 농장은 아예 합숙소를 지어 놓고 일을 시킨다. 200억을 들여서 5천 평에 유리 온실을 지은 탓이다. 스웨덴 기술자들이 와서 최신 기술로 지었다. 시설비가 워낙 많이 들어간 터라 한시도 시설을 놀릴 수가 없다. 지열을 이용해서 한겨울에도 농장은 24시간 돌아간다. 동짓날 밤에도 여느 날처럼 24시간을 시간 단위로 쪼개서 일을 한다.

우리 농촌이 잃어버린 것들

날이 춥건 비가 오건 가뭄이 들건 신경 쓰지 않는다. 지열 펌프와 수액 탱크만 잘 돌아가면 그만이다. 계절도 날씨도 신경 쓰지 않는 농사다 보니 세시풍속도 필요 없고 기우제나 산신제도 필요 없다. 농업용 전기 요금이 내리기를 바라고 면세유가 등유뿐 아니라 경유로까지 확대 적용되기를 바랄 뿐이다. 이렇게 변한 우리 농촌이 무엇을 잃었는지 논매기를 예로 들어 이야기해 보자.

제초제를 뿌리는 것과 직접 논매기를 하는 것은, 잡초를 없앤다는 면에선 같아 보일 수 있지만 생명의 세계는 달리 작동한다. 모 심은 지 보름여 지나서 하는 첫 논매기인 '아시논매기'는 6월 중순경에 한다. 아시논매기는 물론, 그로부터 보름쯤 뒤에 하는 두벌매기 때도 논호미로 흙을 파 뒤집는다. 그래야 벼의 뿌리도 일부 잘리면서 성장이 촉진된다. 영양분도 고루 공급되고, 특히 벼 뿌리로 공기 유통이 좋아진다.

모 키우기와 모 심기
▲ 모 키우기 모 키우기와 모 심기
ⓒ 전새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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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을 매는 방식도 논의 상태에 따라 다르다. 잡초가 자라는 흙을 한 덩이 파내고 제자리에 도로 뒤집어 넣는 '제구녕치기'가 논매기의 정석이다. 물 사정이 나빠서 풀이 잘 자라는 논이나 초짜배기 농부가 이런 정공법 논매기를 한다.

'얹어먹기' 논매기는 사뭇 다르다. 흙덩이를 떠서 옆자리에다 뒤집어 얹어 놓는다. 치밀성이나 정확성은 떨어지나 매우 능률적이다. 잡초가 심하지 않고 물이 넉넉한 논에 쓰는 농법이다. 물 사정이 아주 좋고 잡초가 거의 없는 논은 '오간뜨기' 논매기를 한다. 논을 호미로 길게 파헤친 다음 손과 발로 대충 바닥 흙을 주물러 짓이기는 농법이다. 대단히 효율적인 논매기다.

세 벌 논매기인 '말물논매기'는 또 다르다. 이때는 꼭 손으로 논을 맨다. 이미 벼가 자라 있어서 출수기를 앞둔 벼 뿌리가 호미에 상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제초제만 뿌려 잡초를 없애는 논과 세 벌 논매기를 하는 논의 차이를 노동력과 비용의 차이로만 볼 수는 없다. 토양의 건강성과 벼의 생명성으로 본다면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농부의 철학과 세계관, 나아가 나라의 농업정책과도 긴밀하다. 한 사회의 문화‧정치‧경제적 소산이라 할 수 있다.

농기계의 등장과 농촌의 격변

1970년대초 경운기가 나온 때는 농사일에 혁명이 일어난 때다.
 1970년대초 경운기가 나온 때는 농사일에 혁명이 일어난 때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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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초 경운기가 나온 때를 농사일에 혁명이 일어난 때라고 할 수 있다. 리어카 정도의 이동 수단도 귀했던 처지에서 경운기는 산과 들로 거침없이 다니는 운송 수단으로서도 손색이 없었고 갈이도 하고 써레질도 했다. 펌프를 연결하면 농약을 칠 수도 있었다. 도랑의 물을 퍼 올리는 양수기 노릇도 했다.

종합 농기계였던 경운기를 농촌에서 못 본 지 오래고, 짐칸이 야트막했던 포니2 픽업트럭도 농사용으로 적격이었는데 이젠 볼 수가 없다. 모두 세분화된 대형 농기계들로 대체되었다. 승용 이앙기와 대형 트랙터가 등장했고, 콤바인도 부대형과 탱크형으로 분화되었다.

콤바인은 나락 베는 일과, 볏단 세우기와 말리기, 탈곡과 풍구질을 통합해 버렸다. 모판형 이앙 농법이 모찌기, 모 묶어 나르기, 모심기를 다 통합한 것과 같다.

논매는 일도 1970년대 후반 들어서는 서서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초기'라 하여 지네 발 모양의 바퀴가 2개 달린 철제 농기구가 나타났는데, 줄모 심은 논에서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서서 밀었다 당겼다 하며 골 따라 밀고 다니면 됐다.

우렁이 농법을 쓰거나, '논다매'라는 예취기 부착형 농기계를 쓰기도 한다. 최근에는 중기 논 제초제로 '근절탄, 저격수, 황금볼' 같은 이름이 붙은 것들이 있다. 제초제 덩이를 멀리서 논에 던져 넣는 식의 것들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아 약제 쏠림이 없고 일하기 쉽다고 선전하는 제초제다.

이렇게 성능 좋은 농기계와 농약은 농부와 자연의 거리를 멀리 떼어 놓았다. 예로부터 농사는 노동이면서 기술이었고, 예술이면서 놀이였다. 사회제도이자 경제였다. 농사 기술 하나가 도입되거나 농지 소유 관계가 변하면 세상이 바뀌곤 했다.

대표적인 것이 '연작상경법'의 등장이다. 한두 해 땅을 놀린 다음에 농사를 짓던 '휴한법' 또는 '휴경법'이 해마다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연작상경법으로 전환하자 과거에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던 1년 1작이 기본 경작법이 된다. 조선 초기인 세종 때의 일이다.

이는 땅을 놀리지 않고 매년 농사를 지어도 수확이 줄지 않는 심경(땅을 깊이 가는 것) 기술과 시비법이 따랐던 덕이다. 새로운 시비법으로는 가을에 거름을 뿌리고 깊이 갈아엎는 '선분후경'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황토를 뿌려 지력을 돋우는 '객토법'이 등장함으로써 해 걸이 농사를 극복하는 연작상경법이 가능해진 것이다. <농사직설>(1429)에 상세하게 나온다.

우리 농경문화는 어디로

연작상경법의 결과는 실로 엄청났다. 고려 초에 1결(약 3천 평)에서 평균 6~11석이 생산되던 쌀이 세종조 중기인 1430년에는 20~30석 내지 50~60석이 생산되었다고 한다. 근 3~8배로 생산력이 향상된 것이다. 혁명적인 농법이라 할 것이다.

이앙법과 줄모 심기도 이와 버금간다고 볼 수 있다. '정조식'이라 하여 1930년대 이후 줄모가 본격화되었다. 바람이 잘 통하고 김매기가 수월할 뿐더러 농사 품이 적게 든다. 조선 후기 농서인 <산림경제>에서도 이앙법을 소개하고 있다.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졌지만 재미있는 모심기 농법이 있었다. 1980년대 후반에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해 보급한 '던진모심기'다. 볍씨 여러 개가 발아할 수 있는 작은 플라스틱 육묘 판에 모를 기른 다음 육묘 판을 논에 옮겨서 일정 간격으로 끌고 다니면서 포트에서 자란 모포기를 통째로 뽑아 던지는 모내기다. 모찌기가 생략되고 모포기 나누기도 생략되었을 뿐 아니라 허리를 구부려 모를 심는 과정도 생략된 획기적인 모내기였다.

그러나 던진 모포기의 간격이 일정치 못했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모포기가 바로 서지를 못했다. 착근에 소요되는 기간도 길었다. 착근하기 전에 소나기가 오거나 바람이 불면 모가 밀려 한쪽으로 쏠리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논을 두루 다니면서 부실하게 던져진 모만 다시 심어 주는 식으로 이 농법을 계승했다. 일이 훨씬 수월했다. 자동 이앙기가 등장하기 전까지 일부 지역에서 애용되던 농법이다.

경지 정리와 함께 수리 시설 강화로 논농사가 강화되더니 1990년대 들어서는 우루과이라운드와 자유무역협정 확대로 농산물 값이 폭락하자 돈 되는 농사를 찾아 특용작물과 과수, 원예 쪽으로 선회되었다. 그렇다 보니 애써 만든 논을 다시 밭으로 되돌리고 있다.

인간 사회를 조직화하고 모계사회를 열었던 농경문화는 사회 변천을 촉진하기도 하고 그 영향을 받기도 했다. 앞으로 달라져 갈 농사는 어떤 모습일까. 이는 농사에 기술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느냐는 문제이자, 전통 농법을 어떻게 계승하느냐와 같은 물음이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살림의 <살림이야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동지, #농경문화, #연작상경법, #모심기, #논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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