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메이저리그에서 100년도 넘게 이어지던 저주 하나가 풀렸다. 1908년이 마지막 월드 챔피언이었던 시카고 컵스가 1945년 이후 무려 71년 만에 진출했던 월드 시리즈에서 챔피언 트로피를 가져오는 데 성공한 것이다. 컵스는 지긋지긋하게 따라붙던 염소의 저주를 이겨내고 새로운 역사를 썼다.

3일(이하 한국 시각) 미국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프로그레시브 필드에서 열린 시카고 컵스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컵스는 3차전에 등판했던 카일 헨드릭스(정규 시즌 평균 자책점 1위)가 등판했다. 이에 맞서는 인디언스는 1차전과 4차전 승리투수였던 에이스 코리 클루버(2014년 아메리칸리그 사이 영 상)가 등판했다.

컵스는 초반부터 기선을 잡았다. 1회초 선두 타자 덱스터 파울러가 첫 타석에서 리드오프 홈런을 기록하며 분위기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월드 시리즈 7차전에서 리드오프 홈런이 나온 기록은 월드 시리즈가 처음 시작된 1903년 이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3회말 인디언스는 코코 크리스프의 2루타와 카를로스 산타나의 적시타로 1점을 따라 붙었다. 그러나 승부의 균형을 맞춘 것은 이 때가 마지막이었다. 컵스는 4회초부터 인디언스의 선발투수 클루버를 본격적으로 두들기기 시작했다.

지쳤던 클루버와 밀러, 특정 투수에게 집중된 과부하

인디언스의 고독한 에이스 클루버는 정규 시즌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던 3일 휴식 후 선발 등판을 포스트 시즌에서만 벌써 3번째 소화하고 있었다. 인디언스의 선발 로테이션을 지키던 카를로스 카라스코와 대니 살라자르가 시즌 후반 부상으로 이탈하는 바람에 인디언스는 클루버와 조시 톰린 그리고 트레버 바우어 3명의 선발투수로 포스트 시즌을 치러야 했다.

톰린이 그나마 어느 정도 역할을 수행해줬지만, 바우어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디비전 시리즈가 3경기 만에 일찍 끝난 뒤 바우어는 드론을 고치다가 새끼손가락이 찢어지는 부상을 안고 ALCS 선발에 나섰다가 0.2이닝 만에 물러났다.

인디언스는 월드 시리즈에 진출하긴 했다. 그러나 선발진 운영이 꼬이면서 클루버가 4차전에 등판했다가 패전을 당하고 말았다.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 시리즈를 5경기 만에 끝내긴 했지만 특정 투수들에게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다. 월드 시리즈 1차전과 3일 휴식 후 등판한 4차전에서 승리투수가 되긴 했지만 또 3일 휴식 후 등판하는 클루버는 분명 지친 모습이었다.

ALCS MVP를 차지했던 앤드류 밀러도 마찬가지였다. 밀러는 이번 포스트 시즌에서 10경기에 출전했는데, 그 10경기에서 모두 1이닝을 초과했다. 월드 시리즈 7차전을 포함하여 2이닝 이상을 던진 경기도 7경기나 됐다.

이렇게 지친 클루버를 상대로 컵스 타선은 4회초 공격에서 크리스 브라이언트의 안타, 앤서니 리조의 몸 맞는 공, 에디슨 러셀의 희생 플라이, 윌슨 콘트레라스의 적시타 등으로 2점을 추가했다. 5회초에도 선두 타자 하비에르 바에즈가 솔로 홈런을 추가하며 인디언스의 지친 에이스 클루버를 사정 없이 두들겼다(6-1).

우승 청부사 레스터, 2014년 범가너를 재현하다

결국 테리 프랑코나 감독은 내일이 없는 경기에서 흔들리는 에이스를 그대로 끌고 갈 수가 없어서 클루버를 바로 교체했다. 두 번째 등판한 투수는 역시 지쳤던 밀러였다. 파울러와 카일 슈와버는 병살타로 한 번에 잡아냈지만, 브라리언트에게 볼넷을 허용했고, 리조에게 적시타를 허용하면서 밀러도 지친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물론 인디언스도 포기하지 않았다. 5회말 공격에서 2사 후 카를로스 산타나가 볼넷을 기록하며 호투하던 컵스 선발 헨드릭스를 흔들었다. 그러자 조 매든 감독은 승리투수 요건에 아웃 카운트 하나를 남겨두고 투수 교체를 단행했다.

컵스의 두 번째 투수로 올라온 선수는 5차전 승리투수였던 존 레스터였다. 레스터는 올라오자마자 제이슨 킵니스에게 출루를 허용했다. 이 과정에서 교체된 베테랑 포수 데이비드 로스가 송구 실책을 저질렀다. 이에 레스터는 잠시 흔들리며 폭투를 범했고, 주자 2명이 홈으로 들어왔다(6-3). 하지만 레스터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이닝을 마무리했다.

이후 레스터는 매 이닝 주자를 출루시키긴 했지만 6회와 7회를 실점 없이 막아냈다. 그리고 8회말 2사에서 호세 라미레스에게 내야 안타를 허용한 뒤 아롤디스 채프먼에게 마운드를 넘겼다.

파이어볼러 채프먼의 방화, 집중력 잃지 않은 컵스

그러나 채프먼도 6차전에서 베이스 커버를 들어가던 중 발목을 살짝 삐끗했던 아찔한 순간이 있었다. 그리고 채프먼은 올라오자마자 브랜든 가이어에게 2루타를 허용하며 레스터가 남겨 놓은 주자를 불러들였다(6-4).

채프먼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다음 타자 라자이 데이비스에게 낮은 공을 던졌지만, 데이비스가 이 공을 걷어 올리면서 좌측 담장을 넘어가는 동점 홈런으로 만들어버렸다(6-6). 레스터의 구원승은 날아갔고, 7차전 8회말에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9회에 두 팀이 모두 득점을 올리는 데 실패했고, 7차전 승부는 연장으로 이어지게 됐다. 그러나 클리블랜드 현지에 빗줄기가 굵어지면서 경기는 바로 이어지지 못하고 한 박자 쉬어가게 됐다. 그리고 비가 그친 뒤 경기 흐름은 다시 컵스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다시 이어진 경기에서 컵스는 인디언스의 바뀐 투수 브라이언 쇼를 공략하여 선두 타자인 지명타자 슈와버가 안타로 출루했다. 슈와버가 부상으로 인하여 수비와 주루 플레이를 할 수 없었기에 바로 대주자 알버트 알모라가 투입됐다.

다음 타자 브라이언트의 뜬공 때 알모라는 공이 수비수 글러브에 잡히는 것을 확인한 뒤 1루에서 2루로 달렸다. 이어서 리조는 고의4구로 출루했고, 다음 타자 조브리스트의 적시타가 터지며 대주자 알모라가 홈까지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7-6). 컵스는 이어진 만루 찬스를 놓치지 않고 미겔 몬테로의 적시타를 추가하며 한 점을 더 달아났다(8-6).

8회말 2사에서 대형 방화를 범했던 파이어볼러 채프먼은 9회를 막고 10회에서 팀이 다시 리드를 잡은 덕분에 행운의 승리투수가 됐다. 연장전에서 다시 리드를 굳힌 컵스는 10회말에 칼 에드워즈 주니어를 투입했다.

그러나 1948년이 마지막 월드 챔피언(대한민국 정부 수립)이었던 인디언스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10회말 2사에서 브랜든 가이어가 볼넷을 얻어낸 뒤 타석에는 8회말 채프먼을 상대로 동점 홈런을 날렸던 데이비스가 들어섰다. 가이어가 무관심 도루로 2루에 안착하자 데이비스는 적시타를 날리며 다시 한 점을 따라 붙었다(8-7).

그러나 인디언스의 마지막 추격은 거기까지였다. 컵스는 왼손 투수 마이크 몽고메리를 투입하여 마지막 타자 마이클 마르티네스를 3루수 땅볼로 유도, 경기를 마무리하고 무려 108년 만에 월드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10회초 결승 타점을 올린 조브리스트는 월드 시리즈 MVP에 선정되며 2015년 캔자스시티 로열스 소속일 때에 이어서 2년 연속 월드 챔피언을 경험했다.

108년 만에 트로피 되찾은 컵스, 염소의 저주 끝내다

이리하여 현대 스포츠 역사상 유명했던 저주 하나가 풀렸다.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가 1903년에 시작되었고, 컵스는 1908년(대한제국 순종 2년) 마지막 우승을 경험했다. 이후 컵스는 7번 더 월드 시리즈에 진출(1910, 1918, 1929, 1932, 1935, 1938, 1945)했지만 그 때마다 워러드 챔피언 트로피를 탈환하는 데 실패했다.

그리고 1945년 월드 시리즈 4차전에서 염소를 데리고 온 관중을 강제 퇴장시키면서 염소의 저주가 시작됐다. 관중은 퇴장당하면서 컵스가 월드 시리즈에서 승리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고, 이후 컵스는 무려 71년 동안 내셔널리그 챔피언에도 오르지 못했다.

2016년 컵스는 정규 시즌에서 103승 58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을 올렸다(1경기는 우천 중단). 디비전 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상대로 3차전에서 연장전 패배를 당했지만 그 이외 나머지 3경기를 모두 승리하고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 안착했다.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는 클레이튼 커쇼가 버티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만났다. 1차전을 승리했지만, 2차전과 3차전에서 커쇼와 리치 힐에게 막히며 2경기 모두 무득점 패배를 당하며 탈락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그러나 컵스는 4차전에서 신인 투수 훌리오 유리아스를 공략하며 공격력 회복에 성공했다. 그리고 5차전에서는 에이스 레스터가 다시 한 번 승리를 이끌었다. 6차전에서는 기어이 커쇼 공략에도 성공하며 71년 만에 월드 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월드 시리즈도 순탄치 않았다. 기선 제압이 필요했던 1차전에서 이전까지 월드 시리즈 무패 기록을 자랑했던 에이스 레스터가 첫 패전을 당했다. 그러나 2차전에서 2015년 사이 영 상 투수 제이크 아리에타의 호투로 승부를 원점으로 돌린 채 리글리 필드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컵스는 NLCS에서 보여줬던 약점이 또 드러났다. 타선이 또 다시 침묵하면서 홈 경기에서 내리 2연패를 당하며 시리즈 패배 위기까지 몰렸다. 하지만 벼랑 끝에 몰린 컵스는 5차전에서 다시 레스터가 호투하여 분위기 전환을 만들어냈다.

슈와버가 부상으로 인하여 수비와 주루를 할 수 없었던 컵스는 오히려 지명타자 제도를 쓰는 원정 경기에서 슈와버를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타선에 힘을 보탠 컵스는 6차전에서 시리즈를 다시 원점으로 돌렸고, 살아난 공격력은 7차전에서도 승리에 큰 힘이 됐다.

저주 2개 끊어낸 엡스타인 사장, 첫 챔피언 경험한 매든 감독

현 시카고 컵스 구단 사장인 테오 엡스타인은 2003년부터 당시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보스턴 레드삭스 단장을 맡았다(1973년생).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연소 단장이 된 엡스타인은 단장 부임 2년 만에 레드삭스를 월드 챔피언에 올려 놓으며 밤비노의 저주를 86년 만에 풀어냈다. 이후 엡스타인은 2007년에도 레드삭스를 월드 챔피언에 올려 놓으며 천재 단장이 됐다.

2011년 겨울 레드삭스 단장에서 물러난 엡스타인은 컵스와 5년 2000만 달러에 계약을 맺고 구단 사장으로 부임했다. 본격적인 리빌딩에 착수한 엡스타인은 2015년 컵스를 내셔널리그 승률 3위에 올려 놓으며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내셔널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뉴욕 메츠에게 4전 전패로 스윕을 당했지만, 엡스타인이 사장으로 부임한 이후 드디어 성과를 보였다.

2015년에 컵스 감독으로 부임했던 매든 감독 역시 처음으로 월드 챔피언을 경험하게 됐다. 매든은 만년 하위권 탬파베이 레이스 감독을 맡아서 2008년에 레이스를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로 이끌었던 적이 있었다.

만년 하위권 팀을 강팀으로 만들었다는 경력을 인정 받아 매든은 엡스타인의 영입으로 컵스와 인연을 맺었고, 첫 시즌인 2015년부터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다. 그리고 부임 2년 만에 자신의 첫 월드 챔피언 경력을 역사적인 기록으로 장식하게 됐다.

컵스가 지구 우승을 확정했을 때, 구단에서는 정규 시즌이 끝나기도 전에 엡스타인과의 계약을 5년 더 연장했다. 이에 따라 엡스타인 사장의 시대는 한동안 더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108년이나 이어지던 염소의 저주를 끊어낸 컵스가 강팀의 이미지로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될지 지켜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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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널 브랜더/서양사학자/기자/작가/강사/1987.07.24, O/DKU/가톨릭 청년성서모임/지리/교통/야구분석(MLB,KBO)/산업 여러분야/각종 토론회, 전시회/글쓰기/당류/블로거/커피 1잔의 여유를 아는 품격있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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