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이 언제나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디즈니 만화영화 같지는 않았다는 걸 우리는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여러가지 풍파를 겪기 마련이니까요. 즐겁고 행복했던 기억들 이면에는 꼭 슬프거나 외로웠던 순간들이 자리잡고 있죠. 그 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존재인 부모 혹은 그를 대신하는 양육자와의 관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아서 받는 상처가 제일 아프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쿠보와 전설의 악기>는 바로 그런 상처를 안고 사는 소년 쿠보의 모험과 성장을 다룬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입니다. 한 쪽 눈이 없는 쿠보는 일본의 외딴 바닷가 바위굴에서 반쯤 정신이 나간 듯한 어머니를 보살피며 살고 있습니다. 원래 '달(月)왕'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한조'라는 이름의 사무라이와 금지된 결혼을 한 죄로 아들 쿠보와 함께 추방당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쿠보에게는 특이한 재주가 있습니다. 바로 일본 전통 악기인 샤미센을 연주하여 그 선율을 통해 갖가지 모양의 종이접기 인형들을 조종하는 것입니다. 이 재주를 가까운 마을 저잣거리에서 선보이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던 그는, 해가 지기 전에 돌아와야 한다는 어머니의 충고를 그만 어기고 맙니다. 이 때를 틈타 어둠의 암살자인 쌍둥이 이모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고, 가까스로 도망친 쿠보는 미지의 세계에서 아버지의 유품인 세 가지 보물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게 되지요.

독특한 느낌의 스톱 모션 애니메이션

 영화 <쿠보와 전설의 악기>의 한 장면. 자기를 노리는 쌍둥이 이모의 손아귀를 피해 미지의 세계로 도망친 쿠보(아트 파킨슨)는 그를 돕는 원숭이(샤를리즈 테론)와 딱정벌레(매튜 매커너히)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보물 세 가지를 찾는 여정에 나선다.

영화 <쿠보와 전설의 악기>의 한 장면. 자기를 노리는 쌍둥이 이모의 손아귀를 피해 미지의 세계로 도망친 쿠보(아트 파킨슨)는 그를 돕는 원숭이(샤를리즈 테론)와 딱정벌레(매튜 매커너히)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보물 세 가지를 찾는 여정에 나선다. ⓒ UPI 코리아


이렇게 줄거리만 요약해도 뭔가 독특한 느낌이 물씬 나는 이 영화는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을 전문으로 만드는 제작사 라이카 엔터테인먼트의 작품입니다. <코렐라인: 비밀의 문>(2009)을 시작으로 <파라노만>(2012), <박스트롤>(2014) 같은 영화를 만들었죠.

그런데 이 영화들은, 어린이를 중심으로 한 가족 단위 관람객을 타깃으로 하는 영미권 장편 애니메이션 시장의 트렌드와는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부모의 부재 혹은 냉대를 경험한 끝에 겨우 제자리를 찾게 되는 주인공들, 지나치게 어두운 색감, 심심찮게 등장하는 신체 훼손, 고딕 공포 소설에나 나올 법한 배경 등이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적 공포를 자극했지요. 한 마디로 대중적인 호응을 얻기 힘든 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 <쿠보와 전설의 악기> 만큼은, 기존의 개성을 유지하면서도 대중들과 만날 수 있는 접점을 찾아낸 성공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라이카 애니메이션들의 특징은 이 영화에도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쿠보가 외할아버지에게 눈을 빼앗긴 설정, 혈육 간의 비정한 싸움, 정통 호러물 만큼 공포 효과가 돋보이는 액션 시퀀스 등이 그런 예입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의 지배적인 톤은 밝고 따뜻한 쪽입니다. 바닷가 마을의 햇살 따뜻한 풍광 뿐만 아니라, 쿠보가 모험을 겪는 미지의 세계가 지닌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보기에도 훨씬 편하고 안정감이 있습니다. 기존 작품들과는 달리 배경을 유럽에서 일본으로 옮기면서, 일본 목판화의 작화 스타일과 밝은 색감을 반영한 결과라고 합니다.

이야기 구조도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신화적 영웅의 서사'를 충실히 따라갑니다. 주인공이 변화의 계기를 맞아 자기 세계를 떠나서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다음, 모험 여행을 통해 자신의 주적과 맞서 싸워 이기게 되고, 거기서 얻은 성장의 결과물을 자기 세계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는 식의 플롯 말이죠. 그 결과 관객은 전작들에서처럼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파악하느라 시간을 보낼 필요가 없이, 영화의 주제를 차분히 숙고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됩니다.

어른이 되는 성장담, 박 대통령에게 권합니다

 영화 <쿠보와 전설의 악기>의 제작 현장 사진. 영화 속에 나오는 거대 해골의 모형 앞에 애니메이터들이 앉아 있다.

영화 <쿠보와 전설의 악기>의 제작 현장 사진. 영화 속에 나오는 거대 해골의 모형 앞에 애니메이터들이 앉아 있다. ⓒ UPI 코리아


또한 일본의 복잡하고 정교한 종이접기를 이야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도 작품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는데 큰 역할을 합니다. 쿠보의 샤미센 연주에 따라 움직이는 종이접기의 마법은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사람을 동심의 세계로 안내하죠. 게다가 살아 있는 생물이나 인형이 겪었으면 보기에 거북했을 신체 훼손이나 액션 장면도, 종이접기로 된 물체들이 소화하면 별로 부담스럽지 않은 장면으로 바뀐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할리우드 정상급 배우들인 샤를리즈 테론과 매튜 맥커너히, 랠프 파인즈, 루니 마라 등을 목소리 연기에 캐스팅한 것 역시 대중성에 좀 더 신경을 쓴 결과입니다. 이들이 각기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미리 알고 영화를 보면, 목소리 연기를 감상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음 속에 상처받은 아이의 모습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것을 자기 나름대로의 노력을 통해 어느 정도 다독이지 못하면 어른이 되기 힘듭니다. 자신의 아픔이 어디서 비롯되었고, 그 때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을 어떻게 했어야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인지 되돌아 보는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상처가 인생의 어느 순간이 되었든 불쑥불쑥 튀어나와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정상적인 인간 관계를 맺는 것을 방해합니다.

이 영화 속 쿠보가 겪는 모험도 그런 식으로 어른이 되는 성장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의 문제가 아버지의 부재, 그리고 무력해진 어머니를 자신이 돌보아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닫고, 참다운 양육자로서 부모가 보여 준 애정의 '끈' - 이 영화의 원제가 <Kubo and the Two Strings>(쿠보와 두 개의 현)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 을 놓치지 않고 기억함으로써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된 아이의 이야기이니까요.

이쯤 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약 박근혜 대통령이 양친의 불행한 죽음에서 얻은 트라우마를 제대로 치료하고 극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다면 이런 식으로 비정상적인 사람들에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 아예 처음부터 보수 세력의 꼭두각시로 정치 무대에  등장할 일 없이 조용히 자연인의 삶을 살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많이 늦었지만, 이제라도 대통령이 자신의 삶을 돌아 볼 기회를 가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온전한 성인으로서 자신이 과연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 것인지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만약 어떻게 해야할 지 방법을 몰라 참조할 것이 필요하다면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아주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테니까요.

 영화 <쿠보와 전설의 악기> 포스터. 제작사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대중적인 접점을 찾아낸 것이 나아진 점이다. 뛰어난 미술과 시각 효과가 두드러지는 작품.

영화 <쿠보와 전설의 악기> 포스터. 제작사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대중적인 접점을 찾아낸 것이 나아진 점이다. 뛰어난 미술과 시각 효과가 두드러지는 작품. ⓒ UPI 코리아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권오윤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cinekwon.word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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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책에 관심 많은 영화인. 두 아이의 아빠. 주말 핫케익 담당.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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